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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신화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차이의 신화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 정리 강성민 기자
  • 승인 2004.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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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석학 신화대담 : 정재서 교수와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만남(2)

편집자주 : 지난 호에 이어 한일석학 신화대담의 2차분을 싣는다. 2차 대담에서 두 학자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비롯한 서구의 신화해석학이 어떻게 동양의 신화적 전통과 만나게 되는지, 그리고 때로는 동양인의 심성구조와 신화원리를 왜곡하게 되거나 불일치를 보이는지 등에 대화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 교수는 특수성을, 나카자와 교수는 보편적 원리를 더 강조하고 있지만, 동양의 신화연구자로서 공유할 수밖에 없는 고민들도 많이 확인되고 있다. 이번 대담을 통해 신화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정재서 : 저는 오늘날 주류라고 인정돼온, 신화를 해석하고 연구하는 방식 즉 신화학의 특정한 경향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신화로 간주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이러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근대 초기 서구 학자들은 자기네들의 3분법을 표준으로 "중국에는 신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언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제가 주목했던 것은 프로이트가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근거로서 거론했던 부자 갈등, 친부 살해의 모티프입니다. 이 모티프는 인도 신화에서 바빌론 신화를 거쳐 그리스 신화, 게르만 신화 등에 이르기까지 연속성을 지니고 나타나는 모티프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우라노스를 아들 크로노스가 제거하고 다시 크로노스를 그 아들 제우스가 제거하지 않습니까. 인류학자, 비교신화학자 등은 이를 인도 유러피안 신화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모티프로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오이디푸스 신화 유형을 표준으로 기정화하고 이 신화와 유사한 신화를 수많은 동아시아 신화 중에서 몇 개 찾아내 오이디푸스 신화가 보편성을 지닌다고 일반화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오이디푸스 신화와는 다른 수많은 특성들이 무시될 것입니다. 가령 한국 신화의 경우 부자 갈등의 경우보다는 오히려 부녀 갈등의 사례가 더 많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특정한 심리학적 전제로 환원시킬 수 없는 문화 환경상의 엄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화는 무의식의 소산이고 무의식은 다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볼 때 우리는 신화의 풍토성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카자와 : 선생님께서 제기하신 문제는 신화연구만이 아니라 문화의 이해 전반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제 겨우 서구학문의 압도적인 영향력과 주술적인 힘으로부터 탈출해서, 동아시아에서 살아온 인간의 사고와 감성에 어울릴 만한 자긍심과 자각을 바탕으로 한 학문을 형성하고자 하는 우리가 함께 힘을 합쳐서 해결해야 하는 커다란 과제에 대해 언급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신화연구의 큰 틀은 19세기의 서구에서 만들어졌는데, 그 때 신화와 역사전설을 구분하는 분류기준이 제시됐습니다. 그런 분류기준이 제시되기에 이른 과정을 추측해 보면,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서구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규정할 수 있는 부분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인의 세계에서 이미 신석기식의 신화적 사고에 대한 억압이 시작됐습니다. 그 세계에서는 신화적 사고를 움직이던 '무의식의 사고'가 활동의 자유를 상실한 채, 고대 그리스 세계 특유의 형이상학적 사고에 종속돼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종교적 사고가 신화적 사고에 변형을 가해, 신화를 다른 형태로 만들려고 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정재서 : 신화의 풍토성과 관련해 저는 창조신화의 예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우주창조신화에서 거인의 死體化生說은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돼 있습니다. 거인의 죽은 시체의 각 부분이 산도 되고 강도 되고 해도 되고 달도 된다는 이야기인데 중국에서는 盤古 신화가, 인도 유러피언 신화에서는 인도의 뿌루샤, 바빌론의 티아맛, 게르만의 이미르 신화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다 같은 사체화생 모티프이지만 중국과 서구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거인의 죽음의 방식에서 인도 유러피언 신화에서는 모두가 살해됩니다. 이 최초의 살해, 최초의 희생에 의해 세계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중국 신화에서는 거인 반고가 수명이 다해 죽으면서 저절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인도 유러피언 신화의 살해에 의한 창조 모티프에서 우리는 충격과 갈등에 의해 변화,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변증법적 사고의 단초를 보게 됩니다. 이것과 중국의 自化論, 자연발생론은 세계관에서 대조를 보입니다. 또 한 가지, 신화학자 브루스 링컨은 인도 유러피언 창조신화에서 모든 거인들의 신체가 적대자에 의해 살해된 후 절단되고 분할되어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반고는 죽고난 후 그의 몸이 통째인 상태에서 제각기 변모해나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서구의 분석적, 논리적인 사고와 중국의 全一的, 統全的 사고의 맹아를 엿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화는 비록 동일한 원형 심상에서 기인했을지라도 풍토에 따라 표상하는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저는 차이의 신화 해석, 곧 '차이의 신화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나카자와 : 서구의 신화연구는 오랜 동안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를 하나의 준거점으로 삼아왔지만, 그런 신화들은 이미 신석기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原신화'들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변화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하신 바와 같이, 고대 그리스신화 몇 가지를 예로 들어서 그것을 '인류의 보편적인 신화적 사고'의 유형으로 삼는 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오이디푸스신화'가 바로 그런 전형적인 예에 속합니다. 프로이트가 이 고대 그리스신화를 서구인들의 신경증에 대한 이해를 위해 거론했을 때, 그는 서구의 '일신교적 전통'이 자신의 사고의 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듯합니다. 유대교와 같은 일신교는 무의식에 억압을 가하는 '원초적 억압'의 기구를 신성화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럼으로 해서 지나칠 정도로 '父性'을 중요시하게 됩니다. '억압'과 '부성'은 하나로 결합되기 쉬운 법이지요. 그 결과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의 '개체성의 획득'이라는 문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며, 그리고 신경증으로 발병하게 되기도 합니다.

 

정재서 : 이런 문제와 관련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해석학을 재고해보고 싶습니다. 그의 이론이 적절하지 않게 남용될 때에 발생할 수 있는 폐단에 대해 말입니다. 이 不世出의 논리는 그 정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어느 순간 도식적이다 싶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의 대칭성의 논리는 융의 '對極의 합일'이라든가 뒤랑의 '균형잡기'와도 일맥상통하는, 또 어느 면에서는 동아시아의 음양론과도 비슷한, 충분히 보편성을 지닌 논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항대립에서 선험적인 조화의 논리를 찾아가는 해석의 과정은 자칫 도식적인 모순조화론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해석학에서 우리가 구조와 조화라는 보편적, 공시적 전제에 너무 치중할 경우 개별적, 역사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소홀해질 여지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카자와 : 네. 그런 문제제기에는 충분히 동감합니다. 그와 관련 신화에 대한 아시아적 전통을 좀더 언급해보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문명의 토대에 서구에서와 같은 일신교적인 억압을 받은 적이 없는, 우리와 같은 아시아인에게 있어서 '개체성의 획득'을 방해한 것은 다른 요인이었습니다. '개체성'의 형성을 위협해 온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아니라, 선생님이 지적하셨듯이 오히려 어머니와 자식간의 갈등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실제로 1930년대에 비엔나에서 프로이트 밑에서 공부한 일본의 정신분석학자 고사와 헤이사쿠(古澤平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인간이해의 기준이 되는 신화로 간주되는 것에 의문을 가져, 후에 '아자세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불전에 등장하는 '아자세'는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불전의 이야기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아이가 자신의 죄를 자각함으로 해서 '개체'의 확립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인류 보편의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사와를 비롯한 일본의 정신분석학자는 어머니의 번뇌와 그로부터 야기되는 아이의 원망이 무의식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자 했습니다. 즉 그들은 '오이디푸스신화'는 인류 보편의 신화가 아니며, 민족이나 종교의 차이 등에 의해 무의식의 형성에 기여하는 근본신화는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했던 셈입니다.

 

정재서 : 선생님은 자본의 신화착취와 오용을 비판하셨는데, 앞으로 근본적인 견지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단순한 대증적(對症的) 차원의 비판을 넘어선, 새로운 인식론의 수립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도 이러한 취지에서 현대 자본주의 원리의 근본적인 갱신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신화 귀환의 시대에 살고 있고 삶의 토대도 가상공간으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차제에 우리는 과거에 배제해왔던 주술적 인식과 설화적 인식 그리고 기존의 과학적 인식을 통합하는 새로운 인식의 패러다임을 구축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식론의 토대 위에서 향후 문화비평의 관점과 이론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서구 근대주의에 의해 폄하되어왔던 동아시아적 상상력이 "상상력의 균형잡기"를 위하여 충분한 기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나카자와 : 이것은 정신분석학 쪽에서 든 일례이지만, 신화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신화의 풍토성'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인류(호모 사피엔스)의 '마음'을 형성하고 있는 보편적인 구조를 소재로 삼으며, '풍토'에 따라 다양한 변형을 체험하게 됩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은 그런 인류의 '마음'의 보편적인 구조를 탐구하는 방법으로 개발되어 왔지만, 제 생각으로는 아직 보편적인 구조에 이르지는 못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아직 특수한 레벨에 속하는 것을 보편적 구조로 이해해 버린 결과, '풍토'에 따라서 변화를 하는 다양성의 발현 양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보편적인 구조라는 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 될지 여부조차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발견되지도 않은 보편적 구조로 인해, '풍토'의 차이에 의해 탄생한 '차이의 신화학'을 멸시할 수는 없는 겁니다.

 

정재서 : 冒頭에서 말씀드렸듯이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점점 신화에 대한 성찰의 깊이가 더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전자 메일을 통한 대화가 지면상, 표현상의 한계는 있을 수 있겠으나 신화라는 時宜性이 강한 주제를 두고 한·일 양국 지식인이 진지한 대화를 갖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과 더불어 이러한 행운을 공유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기회를 마련해준 교수신문사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이같은 생산적인 대화가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빕니다.

 

나카자와 : 두 차례에 걸친 대담을 통해, 선생님께서 무엇을 문제시하고 계시며, 어떤 것을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계신지를 점차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와 근본적으로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점을 발견하고 매우 기뻤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교수신문'의 스탭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대화는 더욱 더 심화돼 가야 하겠지요. 그리고 언젠가 선생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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