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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다시 쓰다
옛이야기. 다시 쓰다
  • 교수신문
  • 승인 2020.06.1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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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다시 쓰다
옛이야기 다시 쓰다

 

루쉰 지음 | 이욱연 옮김 | 문학동네 

 

문학동네는 중국 판화계의 거장 자오옌녠의 목각 판화와 함께 읽는 루쉰 작품선집을 꾸준히 소개해왔다.『아Q정전』『들풀』『광인일기』『고독자』에 이어 이번에 그 다섯번째 권으로 『옛이야기, 다시 쓰다故事新?』를 선보인다. 『옛이야기, 다시 쓰다』는 루쉰이 56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하기 전에 발표한 마지막 소설집이다. 신화와 전설에서 시작해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대사에 등장하는 인물을 재해석하고 당대 사회 현실과 결합해 현대적으로 재창작한, 제목 그대로 ‘다시 쓴’ 옛이야기 여덟 편이 실렸다. 루쉰의 글과 완벽히 조화를 이루며 독자에게 루쉰 작품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자오옌녠의 판화가 함께한다. 평생 중국 문화사업에 크게 공헌한 루쉰 역시 국내외의 저명한 회화와 판화 작품을 보급하고 소개하는 데 힘쓴 바 있다.

『옛이야기, 다시 쓰다』에 실린 소설은 소설집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에서 오랫동안 전해져온 옛이야기를 루쉰이 나름대로 해석하고 가공하여 다시 쓴 것이다. 그러기에 예전에 없던 새것이란 개념의 근대소설 개념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 소설이다. 루쉰 스스로는 『옛이야기, 다시 쓰다』를 역사, 신화, 전설에 대한 연의演義라고 정의하였다. 연의란 주로 역사를 이야기꾼이나 소설 저자 나름대로 해석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연의에서는 정사와 일치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사를 비틀고 새롭게 해석하는 관점과 의미가 중요하다._‘옮긴이의 말’에서

중국의 어두운 현실을 묘사하고 날카롭게 해부했던 『외침?喊』속「아Q정전」과「광인일기」,『방황彷徨』등 루쉰의 리얼리즘 문학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중국 신화와 전설, 역사 속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옛이야기, 다시 쓰다』는 다소 낯설 수 있다. 하지만 루쉰은 루쉰이다. 오랜 시간 전해오면서 불가피하게 특정 시대의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의 세례를 받은 신화와 역사 속 인물들의 고정된 이미지를 해체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부여해 새로운 이미지와 생각거리를 만들어냈다. ‘옛이야기’와 ‘다시 쓴’이야기 사이에 루쉰이 만들어낸 간극, 그 간극이 지닌 의미를 가늠해보는 것. 『옛이야기, 다시 쓰다』를 읽는 재미와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철저한 현실감각과 블랙유머로 무장한
지금 여기의 영원한 청년, 루쉰
 

『옛이야기, 다시 쓰다』의 첫번째 소설「하늘을 수리하다」는 1922년에 쓰였다. 문제작 「광인일기」를 발표하고 사 년이 흐른 뒤다. 루쉰 스스로 서문에서 밝혔듯 소설 창작의 시작은 프로이트의 학설을 빌려 창조의-인간과 문학의-기원을 해석하려는 시도로, 꽤 진지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소설 쓰기를 멈췄다가 젊은 시인의 글을 비판하는 ‘음험한’ 평론을 보고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 여와의 다리 사이에 옛날 의관을 차려입은 사내를 등장시켰다. 루쉰은 이것이 진지함에서 장난으로 떨어지는 시작이었다며, 장난은 창작의 절대적인 적일진대 이런 스스로가 불만이라 했다. 이 사내는 여와의 다리 사이에서 여와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여와는 그를 전혀 개의치 않는다.

“벌거벗고 음탕한 것, 덕을 잃고 예를 능멸하고 도를 무너뜨리는 것, 이는 금수가 행하는 바라. 나라에 형벌이 있어, 이를 금하노라!”
여와는 그 작은 네모 판자를 쳐다보며 자신이 별 소용 없는 질문을 했다고 속으로 웃었다. 이런 것들과 말을 해도 통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25쪽

이렇듯 『옛이야기, 다시 쓰다』 속 인물과 소재들은 루쉰이 살고 있던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장치로서 사용됐다. 그 비판은 매섭게 내려치는 채찍질이 아니라, 장난기 많은 소년이 새총을 통통 쏘듯 경쾌해 적재적소에서 웃음을 선사한다. 일 년 내내 까마귀 짜장면만 먹는다고 남편 예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항아나, 글자 ‘우禹’에는 벌레蟲가, ‘곤?’에는 물고기魚가 있다며 단순한 파자破字로 우를 끌어내리려는 사람들, 생강탕이 매워 먹지 못하는 백이, ‘입만 살고 할 줄 아는 건 없’다고 핀잔을 듣는 장자 등의 모습이 그러하다. 중국 문화에서 성인과 영웅으로 숭배되었던 이들이 일상 속 범부凡夫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독자들은 소설 속 그들이 처한 상황을 자신의 현실과 등치시키며 동일화하기 쉬워진다. 익숙한 과거를 통해 오늘을 새로이 바라보는 것, 이것이 루쉰이 옛이야기를 다시 쓴 이유가 아닐까.

루쉰은 그저 골동품 감상 차원이나 복고주의 차원에서 옛이야기를 다시 쓴 것이 아니었다. 옛이야기를 그가 살던 당시 현실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가 살고 있던 당대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과거를 빌려 오늘을 비판한 것이다. 풍자와 비판이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루쉰의 소설 창작 기술과 루쉰 사상이, 그리고 루쉰의 역사의식과 현실 비판의식이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집이 바로 『옛이야기, 다시 쓰다』이다._‘옮긴이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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