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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새해 새아침, 다른 인생을 꿈꾼다"
특집: "새해 새아침, 다른 인생을 꿈꾼다"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01.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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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農的 삶을 찾아서

삶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일상이라는 것은 항상 고여 든다. 일상에 빠진 삶은 무뎌지고 지루해지며 때론 허무하기도 하다. 이 땅의 지식인들도 그런 일상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약간의 의식전환, 약간의 실천만으로도 삶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날아오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현상으로 대두되고 있는 게 바로 느림과 여유의 철학으로 충만한 소농적 삶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교수와 농부의 일상을 하나의 삶의 사이클 속에 담아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온갖 문명의 기득권을 모조리 포기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수면 위로 파문을 만들어내는 돌멩이처럼, 사소해보이는 조그만 실천 하나를 삶이라는 호수 위로 던질 때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또한 넓어지는 것이다. 교수신문은 새해를 맞아 소농적 삶을 실천하는 교수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살고 있는 모습과 그 안의 즐거움들을 음미해봤다. 그것을 새로운 삶에 대한 제안으로 제시해본다. <편집자주>

주중엔 '교수', 주말엔 '농부'

남한산성 기슭 검단산으로 둘러싸인 하남시 춘궁동. 언덕배기 대나무 울타리 안에 감나무와 배나무가 있고, 텃밭엔 수십 종의 채소들이 심겨져 있다. 밭 구석엔 닭이 열댓 마리 있다. 언덕끝에 자리잡은 태양열 주택은 널따랗고도 아름답다. 집안으로 들어가보니 나무 땔감을 때우는 온돌방이 있고, 거실과 부엌 모두 친환경적 구조로 돼있다. 이곳이 바로 권광식교수(방송통신대·경제학)가 십년간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터전이다. 

'헌마을 운동'의 권광식 교수

십년 전, 권교수는 왜 이 촌구석에 자릴 잡은 걸까. 학교도 멀뿐 아니라, 농사를 지을 짬은 전혀 안날 것 같은 데 말이다. 사실 그가 농사와 인연을 맺은 건 삼십년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박정희정권 때 새마을 운동에 반발해 YMCA에서 '헌마을 운동'이란 강좌를 열었던 것. 이후 농민운동에 가담 하면서 정부로부터 수차례 고문을 당해 몸도 망가지고 학교에서도 해직 돼 사회로부터 고립됐다. 그런 와중 아픈 몸도 달랠 겸 이곳으로 이사하게 돼 자연히 텃밭도 가꾸고 삶도 친환경적으로 바꿔나간 계기가 됐던 것이다. 

텃밭엔 딸기, 고구마, 배추, 미나리, 가지, 호박, 고추 등 없는 게 없다. 아내와 막내아들 세 식구가 사는데, 주말엔 첫째 아들 내외도 합류해 밭을 가꾼다. 일주일에 한두 번 들르는 퇴비주는 아저씨도 있다. "처음에 여기 왔을 땐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정도로 땅이 박토였다. 하지만 밭을 일구고 퇴비도 주고 해서 지금은 수확이 아주 좋다"라며 고진감래 한 사연을 털어놓는다. 지극정성은 땅도 알아보는가 보다. 이젠 여기서 웬만한 반찬거리는 다 해결될 정도로 농사가 잘된다. 유기농 먹거리들이 건강에 좋은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땅과 대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가장 값지다고 한다. 땅의 육중한 힘은 마치 살아 숨쉬는 생명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권교수는 뜻 맞는 이들과 작은 모임도 하나 꾸리고 있다. '생명과 환경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이 그것. 열 다섯 남짓 모여 현미밥 먹기, 흙집이나 목조건물에 살기, 태양열 이용하기, 목재땔감 사용하기, 세제 사용하지 않기, 유기농산물 먹기 등을 실천지침으로 삼고 있다.

"땅이 아프면 내 몸이 아프다"라는 생활철학을 지닌 권교수는 진짜배기 농사꾼이나 다름없다. 동료 교수들도 어떻게 하면 생태적 삶으로 전환해볼 수 있겠는가 하고 묻자, 그는 교수들의 '의식부족'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실 친환경적인 삶은 지식인들이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변명을 하는 것이 그에겐 마땅찮게만 여겨진다. 텃밭을 몸소 가꾸다가 "아! 자연이란 게 바로 이런 거구나"라고 자기 궁둥이를 탁 쳐봤던 경험을 다른 교수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영석 교수의 우연한 만남

분당구 운중동 저수지가 텃밭은 이영석 교수(농업전문학교·채소학)와 인연이 있었던 걸까. 이교수는 그야말로 우연한 계기에 농사를 짓게 됐다. 5년 전 동사무소에서 마을에 방치된 공한지를 '선착순 무료분양'으로 나눠줬는데, 때마침 이교수도 줄서서 기다리다 삼십 평 남짓한 밭을 얻게 됐던 것. 그때부터 주말에 한 두 시간씩 밭을 가꿔왔는데, 상추, 쑥갓, 근대, 파, 깻잎, 고구마, 감자, 토마토, 호박, 무우, 배추, 부추, 딸기 등이 주요 작물이다. 무비료·무농약이 원칙이며, 집에서 모은 일주일치 음식물 쓰레기를 잡초와 섞어 퇴비로 사용한다.

그간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걸로, 오히려 그는 2년 전 안 좋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일년간 어렵사리 키워낸 호박과 고구마를 수확하려 하니, 그날 새벽 누군가 와서 다 캐갔던 것. 애지중지 자식처럼 키웠던 것들이라 '분노'와 함께 복수심마저 느꼈지만, 그래도 이 일을 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보낸 추억들이 한아름이다. 딸기로 아이들에게 딸기우유와 잼을 만들어 주고, 부추로는 만두도 만들어 먹은 기억들이 있다.

처음에 텃밭 가꾸는 게 서툴렀고, 잡초도 자꾸만 자라 만만치 않은 일이라 여겼지만, 그래도 인간의 정성을 알아보는지 몇 년을 일구니 땅도 열매를 맺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교수는 동료 교수들도 동참해 땅에서 삶의 소중한 지혜들을 얻었으면 하고 바란다.

강수돌 교수의  食衣住 

"사람이 나면 서울로 가라는 말이 있지만 제 가족은 과천에서 청주로, 다시 조치원으로 옮기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어요." 지금은 안식년이라 미국에 가있지만, 지난 7월까지만 해도 소농적 삶을 만끽했던 강수돌교수(고려대·경영학)의 시골생활은 책으로도 엮여 많이 알려졌다. 충북 조치원읍 신안리 서당골에 손수 지은 귀틀집에서 노모와 아내, 세 아들딸과 함께 4년을 살았다. 외딴 곳이라 아이들을 승용차로 등교시켜야 하고, 매일 아침 신문을 가지러 수백 미터를 걸어야만 하며, 일을 볼 때는 수세식이 아닌 '부춧돌식 뒷간'에서 해결하는 사실 생태적으로 사는 게 여러 모로 불편하다고 털어놓는 그다.

1997년 봄 고려대 조치원 캠퍼스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도시 전체가 시멘트와 아스팔트 덩어리인 과천은 살맛이 떨어져 '떠날 때가 됐다'고 느꼈던 그다. '의식주'보다는 '식의주'라는 지론을 펴는 강교수는 텃밭에서 채소를 기르는 과정도 재밌지만, 채소 먹는 기쁨이 너무 커, 손님이 왔을 때 자기가 직접 키운 채소를 내놓지 못하면 죄책감이 든다고 한다. 또한 텃밭에 음식물, 종이쓰레기를 거름으로 사용해 생태순환형 살림살이가 가능해지며, 나아가 흙과 친해진 마음은 자연과 이웃에게도 편견 없이 쉬이 친해지는 마음을 갖게 된다. 때문에 그는 건강한 소농적 삶을 혼자만 누리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어, 주변 사람 모두가 텃밭이나 주말농장 경험을 꼭 했으면 하고 바란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소농의 하루일과 오롯이 담겨

'나부터 교육혁명'(강수돌 지음, 그린비 刊)
이 책은 소농교수인 저자의 구체적 생활상과 이를 기반으로 한 교육철학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교수라는 직업과 소농인으로서의 삶이 어떻게 조화가능한지 하루일과의 흐름을 통해 속속들이 실상을 보여준다. 노모와 아내, 세 아이와 꾸려나가는 서당골에서의 삶은 무척 건강하고 신선해 보이지만, 사실 저자는 그런 삶에 어려움이 없지 않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땅 한 뙈기가 사람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역설하는 그의 논거들은 새해 새아침을 맞아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을 '작심' 시키는 데 충분한 힘을 품고 있다. 

간디의 소농공동체 제안

'간디의 물레'(김종철 지음, 녹색평론사 刊)
김종철 교수가 녹색사유의 초기 문제의식을 담은 책이다. 소농적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풍부하게 만나볼 수 있으며 간디가 구상했던 '소농적 공동체'의 구체적인 전망이 드러나 있다. 1장은 생태적 위기에 맞선 대안적 삶과 운동을 제시하며, 2장은 기술제일주의 시대의 부작용들을 비판한다. 3장은 인간존재를 우주 속의 한 알로 인식해 태어나고 죽는 과정을 생태학적 원리를 통해 고찰하고 있다. 저자는 복고주의나 금욕주의가 아닌 정신적 능력의 배양과 아래로부터의 운동에서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은 탄생한다고 강조한다.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적 각성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웰덴 베리 지음, 정승진 옮김, 양문 刊)'
미국의 실천적 지식인 웰덴 베리의 책으로 컴퓨터로 대표되는 산업사회의 부작용을 고발한 대표적인 책이다. 저자는 기술발전에 대한 낙관을 비판하면서 자연과 인간 공동체에 기반하지 않는 진보는 불합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지역공동체에 근거한 사회운동적 대안들을 강조하는데, 환경문제의 해결은 개인과 지역사회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현대 산업사회의 소비자로서 어떤 것들을 각성해야 하는지 성찰하면서, 저자의 지나친 비판적 시각에 대한 나름의 반론도 펼쳐볼 만하다. 

자주적·협동적 정신 배양해야

'소농-누가 지구를 지켜 왔는가'(쓰노 유킨도 지음, 성삼경 옮김, 녹색평론사 刊)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는 자연과 땅을 효과적으로 다루고 자원을 지속가능한 상태로 바꿔나가야 하는데, 이 책은 그러기 위해서는 '소농'이 유일한 대안임을 강조한다. 작은 땅에서 땅을 사랑하고, 이웃과 연대해 살아가는 소농은 거대자본에겐 기대할 수 없는 자주적 정신과 협동적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삶이 곤궁한 가운데 소농들의 당당한 삶의 태도와 지혜도 담아내고 있다. 기계화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으로 읽혀지는 근본주의적 주장들을 선뜻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현대인들이 곱씹어 볼만한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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