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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철학교수의 논문중심 연구행위 비판
한 철학교수의 논문중심 연구행위 비판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12.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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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 : 논문중심 연구, 이대로 좋은가

논문식 글쓰기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많은 교수들이 학회지에 글을 게재하려다보니 학회지가 요구하는 형식적 글쓰기에 중독돼간다는 자기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최근 이병창 동아대 교수가 이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홈페이지에 털어놨다. 신흥 상업적 학문권력이 형성된다고 비판한 그의 글은 특히 논문중심의 공부가 전형화되면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성찰점을 제공한다. 하지만 너무 비관적 현실인식에 기초해 있어, 자칫 문제를 단순화시켜 해결의 실마리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든다. 과연 돈과 명예, 양심의 문제가 걸린 오늘날 학문생산방식의 문제는 무엇인지 화두로 제시한다. <편집자주>

철학계에서, 아니 학계에서 ‘학문권력’을 비판하는 일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 11월 11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 홈페이지(www.hanphil.or.kr)에 올라온 이병창 동아대 교수(철학)의 비장한 글이다.(아래에 전문 수록)

여기서 이 교수는 학술진흥재단, 주류학회, 대학이라는 삼각공모체제 속에 편입된 학자들이 연구비를 노린 부실한 논문, 중복논문을 양산하고 있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학진을 앞세웠지만 비판의 칼날은 돈과 학자적 양심을 맞바꾼 ‘일부’ 학자들을 겨눴다. 이 글은 논문중심적 연구에 대한 내부고발로 우선 눈길을 끈다. 왜 이런 비판이 나왔을까.

문제의 발단은 이렇다. 이 교수는 최근 영화를 연구한 논문을 한국철학회지인 ‘철학’에 기고했다가 게재불가 판정을 받은 경험이 있다. 한철연 홈페이지 분과게시판에는 심사위원 3명의 심사소견서와 이 교수의 반론이 올라와 있다.

심사위원1은 이 교수의 논문 ‘영화의 자유간접화법과 들뢰즈의 생성의 철학’이 “철학 관련 논문이라기보다는 문학이나 영화학 관련 논문”이고 “비문과 형식상 하자도 많아 내용을 떠나서 ‘게재 불가’ 판정”이라고 지적했지만 나머지 위원들은 몇군데 수정하면 “독창적이고 완성도 높다”라고 평해 시각차가 크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형식상 하자가 어떻게 탈락의 이유인가, 그 정도는 ‘철학’지에도 수두룩하다”라고 항의했다. 또한 심사위원의 부적격성, 감정섞인 평가가 반영되는 심사제도의 문제 등을 지적했다. 그의 반론에는 충분히 공감가는 부분이 있다. 이 교수가 자평하듯 그 어렵다는 들뢰즈의 ‘영화’를 소화한 내용면이 심사과정에서 ‘형식’보다 아랫자리에서 검토됐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사건에 경험적 근거를 둔 이 교수의 학문권력 비판의 요지는 이렇다. 이른바 스테레오타입화된 심사제도의 빈틈을 노려 연구비를 타내기 위한 일회용 논문이 번지고 있다는 것. “주류전공의 인기주제, 석박사논문의 보편적 주제”로 학자들이 몰려가며 심지어 “지난해 채택된 다른 연구자의 논문제목을 자구만 수정하는 경우”도 있다며 개탄한다. 반대로 “학제적 주제, 연구자가 참신하다고 생각하는 주제, 변방의 주제”는 ‘학진 생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라며 비꼰다.

그 다음 화살은 학진의 논리를 재생산하고 있는 주류학회와 대학으로 향한다. 등재지가 되기 위한 학회지들이 학진의 심사논리를 차곡차곡 내면화하고, 등재지에 실린 논문을 주요업적으로 인정하는 대학의 교수평가제가 가세해 학진-학회-대학의 삼각편대가 학계의 하늘에 놋쇠지붕을 형성한다고 말이다. 진짜 문제는 비판적이고 생동하는 철학정신을 잃고 연구책임교수의 주변을 서성이는 후속세대들이라고 결론지으면서.

이 교수의 글은 요즘 수요를 압도한 논문 공급선의 확장에서 불안한 낌새를 엿보던 이들에게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감이 있다. 하지만 경험치와 추론에 기댄 면도 없지 않다. 과연 연구비를 겨냥한 논문이 부실공사인지, 학제적 연구가 정말 부족한지 등의 부분에선 오해의 여지가 있다. 이 교수가 인터넷에 올린 심사논란도 보는 이에 따라서는 내실있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연구비의 분배에 포커스를 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학계의 불성실하고 말꼬리잡기식 토론문화가 ‘돈’을 매개로 해서 본격적으로 따져진 듯한 인상이다.

연구자들은 요즘 ‘학문권력’이 기본적으로 상업권력이고, 더욱 끈덕지고 양면적인 연계망을 갖기 때문에, 과거 80년대식 비판만으로는 어렵다는 시각이다. 이 교수가 공들여 시각화한 권력지도는 따라서 문제를 단순화한 것일 수도 있다.

게시판에 독후감을 올린 문성원 부산대 교수(철학)는 “제도권 밖에서 대중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다, 그게 생동적 철학의 방향”이라고 밝힌다.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런 원칙론일 때 질문 자체가 숭고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공론화를 통한 학자적 양심의 지속적 환기와, 연구결과에 대한 평가문화를 동시에 가져가는 데서 해결을 모색해야 할 듯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이병창 교수의 글 전문

학문적 권력을 해체하자

학문적 권력- 학진 연구비를 얻기 위한 지침서을 얻고 싶은 분들
            께
            우리 철학의 흐름의 맥을 짚어보면 그 뛰는 게 어딘가 이상하
            다. 철학은 사회에서는 소외되고 대학에서는 밀려나가지만, 이상
            하게도 학문적으로는 흥성하고 있다. 그 어느 시기보다도 많은
            논문들이 쏟아지고, 그것도 하나같이 고답적인 영역을 다루는 글
            들이다. 이런 글들은 주로 주요 학회지를 통해 유포되는데, 대
            체 이런 부조화는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 열병적 징후의 원
            인은 무엇일까? 철학이란 원래 비현실적인 것이니 당연한 결과일
            까? 그나마 철학의 고립된 영역 내부에서라도 흥성하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아니면 그것은 일종의 암적 발달일까? 그래
            서 언젠가는 학계 전체를 파멸시키고 말까?
            물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그동안(80년 초 대학
            팽창기 이후) 철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수도 증가했고, 이들이
            대학에 자리 잡고 어느 정도 성숙해서 많은 연구를 쏟아낸 결과
            가 아닌가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믿기에는 무언
            가 섬뜻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논문들의 주
            제를 살펴보면 어딘지 상업적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주제
            를 그 자체로서 보면 순수하고 고매하기 짝이 없지만,  필자의
            눈에는 상업적으로 보이는 것은 바로 그것이 사실은 연구비용 논
            문의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연구비용 연구논문이라니? 처음 들어본 사람들을 위해 약간 설명
            을 덧붙이고자 한다. 최근 주로 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을 통해
            서 많은 연구비가 제공되고 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한번 받
            으면 수억이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연구비도 있다. 이런 연구비
            를 얻기 위해 작성되는 논문들을 연구비용 논문이라 말할 수 있
            다. 그런데 이런 연구비용 논문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이 특
            징은 술자리에서 연구비를 받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물어
            보는 후배 교수에게 선배 교수가 가르쳐 주는 비법에서 잘 드러
            난다.
            선배교수가 가장 먼저 던지는 충고는 각 학문 분야에서 주류에
            속하는 세부전공을 택하라는 것이다. 심사평가자들의 대부분이
            자기 전공이 주요하다 생각하는데, 수적 비율로 보아 심사평가자
            들의 대부분은 주류에서 나오므로, 주류 전공을 택하는 것이 절
            대적으로 주요하다고 한다. 물론 학진이 이를 예방하기 위해 전
            공별로 세분화하여 심사한다. 그래서 그나마 비주류 가운데 대학
            에 전공으로 특화된 경우에는 받을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그것
            도 전공화 되지 않은 경우라면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선배교수는 석사학위나 박사학위의 논문제목이야 말로 연구
            비를 얻기에 가장 좋은 주제라 역설한다. 왜냐하면 이런 주제들
            은 누구나 다 주요하다고 공감하는 주제이고(학생들조차 그 주요
            성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그 세부전공에서 가장 기초적
            인 것이기에 그 학문 내부의 다른 세부전공의 심사자가 심사에
            참여하더라도 그 세부전공에서 주요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으므
            로, 모든 심사 평가자가 선뜻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
            러므로 고민할 것 없이 대학원생들에게 물어보면 주제가 바로 나
            온다고 한다.
            선배교수들이 가장 자주 던지는 충고는 이미 연구비를 받은 논
            문 주제를 베끼라는 것이다. 완전히 똑같으면 안 되지만, 예를
            들어 나머지는 그대로 두고 연구라 할 것을 분석이라는 말로 바
            꾸면 되는데, 그것도 귀찮으면 눈감고 이미 받은 주제의 조사 하
            나만 바꾸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논문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전에 심사평가자가 아니라 새로운 심사평가자가 평가
            하는 것이므로, 그전의 심사평가자들이 주요하다고 판단했다면
            이 새 심사평가자들도  마찬가지로 주요하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아주 높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연구비를 받기 위해 절대로 피해야 할 것은 학계에서 변방에 속
            하는 전공이나 연구자 자신이 참신하다고 생각하는 주제, 아니
            면 학제 간 연구 주제라 한다. 이런 주제들은 본인이 아무리 주
            요하다고 역설한다 하더라도, 다른 심사 평가자들이 보면 불필요
            하거나 기이하거나 주변적인 주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런 농담 아닌 농담 속에 담긴 연구비용 연구논문의 특징을  최
            근 각종 학회지에 발표되는 논문들은 상당수가 잘 드러내 보인
            다.(물론 여기서 통계적인 조사 등을 해 보아야 확실하겠지만,
            필자가 그럴 생각은 없다. 누가 연구비를 준다면 몰라도.) 그러
            기 때문에 실제로 주류 전공이 가장 많은 연구비를 타고 있으
            며, 많은 논문들이 중첩된 주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야말로
            석 박사 학위 논문에 적절한 주제들이 선택되고 있는 것으로 보
            이다.
            필자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연구비가 불공평하게 또는 부적절
            하게 분배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부
            제에 붙였듯이 후배들에게 학진 연구비를 타는 지침을 가르쳐 주
            려는 것도 아니다. 필자는 사실 그런데는 관심이 없다. 필자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학진 연구비를 매개로 해서 오늘날
            학문적 권력의 체제가 성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학진이 학문적 권력의 중심기관이 되어 버렸고 어느새 우리 자신
            이 이를 우상화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학진은 학문
            은 진흥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학문의 출현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학진은 학술진흥재단이 아니라 학술방해재단이다.
            필자는 얼마 전 이런 학진의 연구비와는 담을 쌓고 한번도 신청
            조차 한 적이 없다는 학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분은 정말
            로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대부분 학자들에게 학진에서   나오는
            연구비를 얻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거기에
            맞추어 연구를 하다보면 어느새 학진적 학자(연구비적 학자라는
            개념이 더 좋을까?)로 키워지게 된다.  일단 연구비를 받으면 사
            실 학진에서 그 결과를 심사한다거나 심지어 결과가 부적합하다
            고 해서 연구비를 몰수한다는 것은 거의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
            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이런 연구논문들은 그저 연구비를 받으
            려고 주제를 잡은 것이기에, 본인 자신이 그런 주제를 연구한다
            는 것은 따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부분 논문 제출 마지막
            한 달 만에 그 논문을 다 작성하고 만다. 사실 그래도 크게 어렵
            지 않다. 대체로 석 박사 학위의 논문 주제이므로 그 분야에 전
            공을 10년 이상한 사람이라면 눈감고도 쓸 수 있는 주제이다. 필
            자는 이런 학진적 학자가 연구에 진력하지 않고서도 연구비를 계
            속 탈 수 있는 메카니즘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학자라고 죽어라
            고 공부만 해야 하는가?
            문제는 어디 있는가? 학진적 학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일단 주
            요 학회지(학진에 의해 전국지라 규정된다)에 몇 년간 걸쳐 몇
            개의 논문을 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논문집에는 몇 십 개
            의 논문이 실려도 다 소용이 없다. 그게 이제 문제인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겨났나?
            80년대 말쯤 각 학계의 주류 학회는 노령화되고 고루화 되어서
            거의 괴멸 일보직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학진의 성장에 발맞추어
            서 주요 학회가 부활하고 말았다. 이제는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그 가장 주요한 이유는 주류학회가 장악한 이른바 전
            국지에 논문을 싣기 위한 것이다. 학진에서 연구비로 받은 논
            문, 그것을 타기위한 논문 등 때문에 주요학회의 학회지는 들어
            가는 입구가 좁다. 그에 반해서 80년대 말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
            로 새롭게 성장하던 신흥학회 지방학회는 일대 타격을 받을 수밖
            에 없었다. 그 중 몇 개는(예를 들어 한국철학사상연구회처럼)
            간신히 전국학회로서 지정받아 기존의 주류학회의 대열에 합류
            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탈락하고 말았으며, 심지어 그럴 엄두
            조차 못 내었던 학회들이 많았다. 그 모든 것들은 근 10년 만에
            소멸하고 말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무도 거기에 논문을 실으
            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학문의 서울중심화가 심화되
            었고, 주류학회가 패권을 장악해 버렸다.
            주류학회는 이제 쏟아지는 논문들을 평가하기 위해 엄격한 형식
            적 절차를 만들었다. 물론 심사자가 누군지 알려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심사한다. 그리고 심지어 심사자
            선정 자체도 추첨식으로 전개한다. 이정도 심사절차라면 공정한
            것이 아닌가. 사실 아무도 그 형식적 불공정성을 지적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학진의 심사과정을 닮은 이 심사과정 자체는 결국
            학진의 논리를 재생산한다. 심사에서 우선적인 주제는 당연히 학
            진적 주제 즉 연구비용 주제일 수밖에 없다. 그 논리는 다시 되
            풀이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하리라 믿는다. 학진과 동일한
            메커니즘 때문이다. 그래서 주요학회의 전국지에서도 비주류의
            전공, 경계를 넘는 주제, 참신한 주제는 배제될 수밖에 없다. 더
            구나 심사과정은 학진도 그렇듯이 그 실질적 내용보다는 형식화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논문의 형식성이 주요 판단기준이 된다.
            언어의 명징성, 논리의 정연함, 전거의 충실함 등등 결국 형식주
            의가 실질적 내용을 추방해 버리고 지배적 기준이 되어 버린다.
            마침내 이렇게 해서 학문권력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 중심에
            는 학진이 있다. 학진은 연구기금을 기초로 각 학문 영역을 장악
            한다. 각 학문 영역은 학진의 체게에 맞추어 개편되었다. 주류학
            회와 학진의 공모체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학진 연구비만
            타지 않으면 되지 뭐하고 있던 소위 학자들도 이 공모체제에 내
            몰리도록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대학에서 교수들의 업적을 평가
            하면서 학진이 체계화한 주류학회의 전국지에 발표된 논문만을
            인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제 주류학회의 전국지에
            발표는 학자의 생명을 좌우하는 핵심적 문제가 되어 버렸다. 그
            러므로 대학, 주류학회, 학진이라는 삼각적 학문권력이 성립했
            고, 이제 어어 하면서 따라가던 학자들조차 이 체제에 묶여서 발
            버둥치게 되어 버렸다.
            이제 필자는 학진을 중심으로하는 권력체제 대학과 주류학회와
            학진의 삼각공모체제를 해체하기를 요구하고 싶다. 그런데 어디
            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이 삼각공모체제가 너무나도 비대해
            서 감히 건드릴 수 없게 변모되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필자가
            속한, 바로 이글을 올리는 한국철학사상 연구회(이하 한철연)를
            보자. 학진에서 연구비를 받기 위해 전국지로 인정되기 위해 한
            철연은 잡지 철학평론지 '시대와 철학'을 개편해서 철학논문집
            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철연은 이를 매개로 해서
            수많은 연구기금을 받아왔고, 따라서 한철연도 주류학회의 반열
            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철연이 이렇게 성장하는 가운데 한철연
            의 정신은 죽어 버린 것이 아닐까? 시대를 개념적으로 포착한다
            는 것은 그 형식상 논문의 범위를 벗어난다. 학진이 요구하는 논
            문적 형식을 수용함으로써 이제 시대를 개념화한다는 한철연의
            정신은 소멸되어 버렸다. 그래서 필자는 오랫동안 한철연을 해체
            해야 하지 않는가? 한철연 자체가 이제 하나의 주류학회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우려해 왔다. 그러나 그럴 때 마다 한철연 회
            원들의 삶을 고려 해볼 때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 판단하여 아예
            입을 닫고 지내왔다. 80년대 한철연을 지탱했던 것은 이른바 학
            계의 기존 체제 밖에서 지원금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
            를 들어 사전번역이라든가 출판수익금이 그런 것들이다. 이제 이
            런 지원금이 사라진 마당에 학진의 연구기금까지 끊어진다면 생
            존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는가? 정신이란 나중에 회복하더라도 일
            단 살려 놓고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해서 지금껏 타협해 왔다.
            그러나 어느새 이제는 이런 흐름을 되돌릴 수 없이 한철연도 깊
            이 빠져 버렸다. 그러니 이 글을 쓰는 필자로서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절망적이라 할까?
            

제 목 : 학문적 권력 2: 후진들의 노예화

학문적 권력 2 ;학문후속세대의 노예화
            이왕 터트리는 마당에 학문적 권력의 문제를 철저하게 짚어 나가
            면서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다. 이미 앞에서 필자는 학술진흥
            재단(학진)과 주류학회 그리고 대학 사이의 삼각공모체제를 폭로
            한 적이 있다. 이런 공모체제가 철학의 암적 발달을 추진하는 중
            심이다.
            그런데 학문적 권력과 연관하여 또 한 가지 반드시 짚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바로 이런 학문적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는 학문후속
            세대의 문제이다. 여기서 학문후속세대라 함은 석 박사 과정 중
            의 대학원생으로부터 연구원이나 강사에 이르는 광범위한 사람들
            을 지칭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학진의 연구비를 받는데 중심이
            된 대학교수들의 연구에 공동 연구원이나 혹은 보조 연구원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학문후속세대(이하 후진이라 약칭하고자 한다) 들에게 학진의 지
            원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처럼 내리는 정말로 고마운 지원이
            다. 대체로 생활비 정도는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므로,  이것을
            지원받는 일이년 동안은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들이다. 필자는 지
            원받은 후진들의 얼굴에 피어나는 웃음의 꽃을 보고 진심으로 그
            들을 축하해 주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 어두
            운 그림자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저렇게 또 하
            나 탁월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철학자가 노예로 전락하는 거는 아
            닐까 하는 의구심이다.  애써 지워버리고 그들을 축하해야 한다
            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어두운 그림자 같은 이 의구심은 먹구
            름 같은 목에 걸린 식은 밥덩어리 같은 분노의 심정으로 가슴을
            치오르는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를 이제 말하겠다. 후진에게 주어지
            는 그 지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한번 보자. 거의 대부분은
            대학교수가 그 연구의 중심을 차지하는데 공동 및 보조 연구위원
            으로 참여하는 경우이다. (물론 후진들이 직접 자신의 연구주제
            를 제시하고 독자적으로 지원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 경
            우는 적어도 이 글에서는 예외가 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
            지는가? 우선 연구책임을 맡은 대학교수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이들은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이나 가까운 강사들을 위해 압박
            감을 느낀다. 그들에게 연구비를 마련해주어야 하며, 그렇지 않
            을 경우 심지어 대학원의 강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다. 학생들이나 강사들은 연구비를 지원 받는 교수들에게 몰
            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연구비를 지원받으려
            는 안타까운 노력이 시작된다.
            그거야 개인적 문제가 아닌가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전반적으로 본다면 이런 후진을 위한 연구지원 조차 학문체제
            에서 일정한 구조적 결과를 발생시켰다. 이미 앞에서 학진 주류
            학회 대학의 공모체제에 의해 학문에서 주류의 입장이 강화되었
            다 했는데, 주류가 학진의 연구지원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것
            은 대학원에서 그대로 반영된다. 그 결과 대학원에서 비주류 전
            공의 급속한 괴멸이 일어났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주요한 것
            은 후진에 대한 학진의 지원의 결과로 지방대학 사립대학의 대학
            원은 급속하게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학진의 공모체제 하
            에서 주류의 입장의 강화는 서울에 위치한 서울대 및 유수 사립
            대학 중심의 집중적 지원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사
            실 학문 후속세대 지원사업을 대학원중심대학을 만들기 위한 국
            가의 정책이었다. 교육부는 이를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
            런데 문제가 이 정도라면 굳이 필자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의 분노는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학진의 지원방식이 후진들
            의 영혼에 거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주어지
            는 거의 대부분의 연구주제는 후진들이 본래 관심 가져 왔던 주
            제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교수가 관심 가졌던 것에 불과하다. 그
            러므로 후진들은 자기가 받은 연구주제를 연구하는데 진심으로
            열심이 할 수 없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후진들은 지원받은 주제
            를 불가피한 최소한의 노력으로 연구할 뿐이다.  열심히 전력을
            기울이더라도 이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역이다.  필자는 여기서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 개념을 떠올린다. 노동은 자신의 유적 본
            질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수단을 위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
            았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후진들의 정말 당혹한 입장을 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후진들에게 이런 연구가 소외 정도로 그치면 그나마 낫
            다. 때로는 노예적 굴종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서 필
            자가 무슨 인신적 노예를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지원
            을 받기 위해서는 책임교수를 끼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런 일
            이 발생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우려하지만, 우리 철학계에서
            야 모든 교수들이 인격적이므로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
            신한다.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오히려 영혼의 굴종이다.
            사실 80년대 대학원생 및 젊은 후진들이야 말로 철학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세대이다. 그들은 서투르고 거칠기는 하지만 철학이
            새로운 정신과 영혼으로 불타올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철학
            이 개념의 유희가 아니라 현실을 파악해야 하며, 소수인의 몽상
            이 아니라 대중적 삶의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소
            위 형식적 사고가 지배하는 논문적 형식을 타파하고 시대를 개념
            적으로 파악하려는 산문적 형태를 도입하려 했다. 그들은 현실
            과 투쟁하는 다른 분야의 학자들, 사상가들, 혁명가들과 연대를
            맺어 철학에 생동적 힘을 불어넣으려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기
            존의 주류 철학계 내부의 완고한 힘에 대립했고 투쟁했다. 정신
            적이며 물질적 독립성이 젊은 후진들의 생명이었다. 이것은 80년
            대 이후 철학계에서 가장 불온한 움직임이었다. 이 수상한 움직
            임에 주류 철학계는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이제 후진들은 연구비지원을 받기 위해, 주류철학계로 편
            입되지 않으면 안된다. 주류의 입장을 대변하는 책임교수의 연구
            주제를 답습해야 하며, 학진의 형식적 심사기준을 통과하기 위
            해 논문을 형식화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을 받아주는 연구책임자
            를 찾기 위해 주류 학회의 주변을 서성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80년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젊은 후진들의 반란은 간단
            히 제압되었다.
            반란이 진압된 지금 철학계의 하늘은 청명하다. 그러나 그 청명
            한 하늘은 암적 발달의 증상으로 독소를 지닌  푸름이기 하다.
            모든 것은 이제 완벽하게 시스템화 되었다. 학진과 주류학회 그
            리고 대학, 더구나 후진까지, 완벽하게 체계화된 이 체제가 발달
            시킨 것이 바로 주요 학회지에 번지는 열병 같은 논문열이다.
            이 형식화된 논문, 무언가 그럴 듯하지만 공허한 논문들이 바로
            그 산물이다. 이 공모체제가 파괴한 것은 무엇인가? 현실을 개념
            화하려는 생동적 철학 정신이다. 그리고 이 같은 정신이 사라진
            철학은 대중들로부터 소외되고 결국은 대학에서까지 사라지도록
            되어있다. 그러니 철학의 암적 발달이라 말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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