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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28]즐거움을 주는 모든 행동은 자연스럽고 옳아야 한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28]즐거움을 주는 모든 행동은 자연스럽고 옳아야 한다
  • 교수신문
  • 승인 2020.05.0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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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후작

선과 악의 기존 정의를 뛰어넘어 
자신의 윤리적 코드를 만들고자 노력
쾌락의 경험은 우리가 자신의 본성과 
자연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신호
사드의 초상화

계몽주의로 촉발된 자유로운 탐구 정신은 18세기 후반에 기존의 사회적 및 도덕적 법에 대해 점점 더 대담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대담한 사상가는 사드(Donatien Alphonse Francois de Sade, 1740~1814)였다. 아폴리네르는 그를 ‘지금까지 존재한 가장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선언했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드의 삶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문학적 공헌은 높이 평가했다. 

사드는 물론 사디즘으로 기억되며, 그것은 비정상적인 쾌락과 관련된다. 그러나 사드를 괴물로 보는 것은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권위적이고 청교도적인 도덕주의자들의 상상이다. 멋진 카사노바로 그린 사드의 상상 초상화는 그의 악명만큼이나 부정확하다. 

명문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나 평생 종교에 대한 증오심을 부여한 예수회 교육을 마친 뒤 각종 계급을 획득하며 7년 전쟁에 참전한 그는 그 뒤에 반전주의자가 되었다. 명문가 딸과 결혼했으나 매춘부 학대 등의 각종 사건으로 13년간 투옥되었다가 1790년에 풀려났다. 그 뒤 이혼과 빈곤 속에서 그는 공화국을 지지하며 대표자들이 제기한 모든 법이 일반 대중들에 의해 직접 투표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등 정치에 관여했다. 1791년에는 《프랑스 국왕에게 보내는 파리 시민의 호소》를 써서 루이 16세에게 ‘자연법칙에 따라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자들에 의해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을 존중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1793년에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로 다시 투옥되는 등 감옥을 계속 드나들다가 1814년에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소위 사디즘적 묘사로 항상 문제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2012년 9월 19일 음란성을 이유로 판매금지 가처분을 받았으나, 훗날 다시 복간되었다. 그가 쓴 《미덕의 불운》은 2011년, 열린책들에서 세계문학 159번으로 나왔고, 같은 해에 《악덕의 번영》이 동서문화사에서 나왔다. 

사드는 블레이크와 니체처럼 선과 악의 기존 정의를 뛰어넘어 자신의 윤리적 코드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철학자들처럼 그는 쾌락의 경험은 우리가 전체적으로 자신의 본성과 자연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주장하면서 자연을 따르려고 애썼다. ‘즐거움을 주는 모든 행동은 자연스럽고 옳아야 한다’, ‘자연의 자극에 가장 자신을 버리는 사람은 가장 행복할 것’이라고 본 사드는 한결같은 쾌락주의자였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무신론, 자유주의, 유물론, 아나키즘의 선구자임을 보여준다. 전투적인 무신론자, 철학적 유물론자였으며, 교회의 횡포와 기독교 교리의 억압적 성격에 철저히 반대한 그는 기독교의 신은 보복으로 위협하며, 너무 부도덕하고 근거 없다고 비판하면서 신 대신 자연을 우주의 창조자로 보았다. 

사드가 쓴 미덕의 불운 표지

정치적으로 사드는 유럽 문명의 근본적인 선입견에 도전했다. 그는 정치란 ‘인간이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동료를 속이는 것’을 가르치는 ‘거짓과 야망에서 태어난 과학’이라고 본다. 모든 책에서 그는 사회가 재산에 기반을 둔 두 가지 적대적인 계층으로 나뉘어 있다고 보고, 재산을 ‘빈민을 상대로 한 부자들의 범죄’로 정의하여 프루동을 연상하게 한다. 

사드는 법관이 부유층에게 유리한 정의를 내릴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법은 입법자들의 이익일 뿐이다’라고 했으며 국가 간의 전쟁은 고용된 사람들이 폭군들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학살하는 것이 단순히 허가된 살인이라고 보았다. ‘검은 잘못되어 있는 자의 무기, 무지와 어리석음의 가장 일반적인 자원이다’라고도 했다.

그는 계급이 많고 부정의한 기존의 사회 대신, 몇 가지 대안을 제안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남해의 타모에 시에 있는 유토피아를 묘사했다. 자메 왕은 젊은 시절 유럽을 방문하여 가장 큰 불행의 원인은 사유재산, 계급 구분, 종교, 가족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국가 통제하에 모든 사람을 제조하고 고용함으로써 이러한 병폐를 피하기로 선택한다. 모두가 동일한 상품과 위안을 가지고 있으며, 감옥이나 사형제도도 없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등장과 함께 프랑스 국가의 강화,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테러를 목격한 이후에 그는 사회에서 국가의 유익한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악덕의 번영》에서 그는 정부와 법률의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 아나키 상태가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두 이탈리아인 간의 대화에서 사회적 계약은 거부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의지만을 주지만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법의 구속을 거부한다. 

“우리 스스로 법이 쓸모없고 위험하다는 것을 한 번만 우리 자신에게 납득시키자. 그 유일한 목적은 범죄를 증가시키거나 그들이 필요로 하는 비밀 때문에 처벌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법과 종교가 없었다면 인간의 지식이 지금쯤 성취했을 영광과 웅장함의 정도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제약이 진보를 지연시킨 방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며, 그것이 그들이 인간에게 행한 유일한 봉사다.” 
그는 그 열정이 법보다 인류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강한 열정에 의해 활기를 띠지 않는 개인은 그저 평범한 존재일 뿐이다. “아나키의 여러 세기를 당신이 좋아하는 어느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법치주의의 세기와 비교한다면, 당신은 법이 침묵할 때 비로소 가장 위대한 행동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없애야 한다. 만약 인간이 자연상태로 돌아간다면, 그는 법의 ‘말도 안 되는 멍에’ 하에서 가능한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할 것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스스로 정의를 얻기 위한 본능과 필요한 힘을 주었기 때문에 정의를 얻기 위한 법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다. 자연이 모든 마음에 각인시키는 보편적 법칙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열정을 거부하도록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억압받는 자들은 스스로 복수할 권리를 갖게 될 것이고, 압제자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법의 부당함보다 이웃의 열정을 두려워할 이유가 훨씬 적다.’ 그러므로 아나키 상태는 전제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가장 좋다. 폭군들은 결코 아나키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이 법의 그늘에서 몸을 일으키거나 그것으로부터 권위를 얻는 것을 볼 뿐이다. 그러므로 법의 지배는 악랄하고 아나키 상태보다 열등하다.

프랑스 혁명과 혁명가의 공포 이전에 귀족들의 과도함을 목격한 그는 인간에 대한 지배 욕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을 사회적 대혼란을 일으키기보다는 성행위로 쐐기를 박기를 원했다. 고문과 살인, 방화에 대한 그의 환상에서 사드를 따르기란 극히 어렵지만 적어도 그는 그러한 욕망의 존재를 인식할 용기와 솔직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을 승화시키려고 했다. 페미니스트 시몬 드 보부아르와 소설가 알랭 로베 그릴렛은 모두 사드가 묘사한 성적 잔인함의 카타르시스 기능을 긍정적으로 인정했다. 

그는 또한 재산권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혁명적인 사상가였다. 그는 진정한 투쟁은 부르주아 계급뿐만 아니라 왕관, 귀족, 성직자로 구성된 인민과 지배계급 사이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최초의 이성적 사회주의자’로 불렸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열정의 자유로운 놀이에 바탕을 둔 조화로운 사회 프로젝트에서 푸리에를 예상하게 했다. 빌헬름 라이히처럼 그는 또한 억압된 성생활이 대규모의 전제적 행동을 초래할 수 있으며 진정한 민주주의는 성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지식은 그의 자유주의 철학의 기초를 형성한다. 정부든 감옥이든 타인에 대한 무제한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지배하고 고문할 것이라는 걸 알고, 그는 그들에게 그러한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욕구는 놀이에서 가장 잘 충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지속적인 열정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사실, 19세기 초에 어떤 작가도 전통 종교와 전통 도덕의 양립 가능성이 자유라는 개념과 더 뚜렷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지 못했다.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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