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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금기④-이성의 세계에서 추방된 주제들
학계의 금기④-이성의 세계에서 추방된 주제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11.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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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리스크를 두려워하는 학자들...論外의 현상들에 눈돌리자

▲죽음은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라는 이유로 근대적 학문의 관심권을 벗어났다. 그림은 H. 보쉬의 '죽음과 수전노'(Death and Miser, 1490) ©
학문의 세계에서 이념 제약은 많이 약해졌다.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일은 모험이지만, 역사 사실을 추적하는 자유는 보장되고 있다. 근래 친일연구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물론 금줄에 꽁꽁 묶인 주제들이 없진 않다. 대표적인 것이 지배집단의 인맥을 건드리는 연구다. 문화계에 본격적인 유치진 연구가 나오지 않는 이유란 뻔하다.

그러나 이념적 금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제약들이 더 심각하다. 합리적 이성의 세계에서 제쳐진 감성과 초월의 주제들 말이다. 가령 죽음이나 영성, 섹슈얼리티 등은 쉽사리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못되고 대중문화적, 문학적 해결방식을 택하고 있다. 남녀간의 연애감정, 공포체험, 신비주의적 신념도 그렇고, 라이프스타일에 깃들인 감수성의 기원들에 대한 연구도 초보적 단계에 머물고 있다. 접근금지의 정언명령은 없지만, 어떤 언어와 방법으로 요리할 것인지 분명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학계에 소수파지만 이런 고민을 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그에 비해  크고 급한 문제들이 산적해있는데 왜 굳이 '사소한' 것들을 다뤄야 하는지 의문을 표하는 학자들도 있다. 김경현 고려대 교수(서양사)는 "그런 접근법 또한 서구모방적 유행현상 아니냐"는 입장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염두에 둔 김 교수는 "아직 학계의 연륜과 토론문화가 얕아 부차적인 테마를 끌어안기엔 시기가 이르다"라고 덧붙인다.

이런 지적이 일리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큰 주제와 작은 주제, 시급한 주제와 그렇지 않은 주제는 과연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라는 새로운 질문을 부른다. 가령 '죽음'이나 '사랑' 같은 것은 모든 사람이 겪는 통과의례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사랑을 원한다.

예를 들어 자신의 아들이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았는데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하자. 그럴 때 부모가 할 일은 그 아이에게 죽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대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에게 그럴 만한 충분한 죽음에 대한 교양이 있을까. 아마 참고할만한 책도 흔치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민속학자 김열규 계명대 교수의 동양적·한국적 죽음론이 출판되고, 생명윤리 분야에서 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서구사회의 그 방대한 사유의 집적물에 비하면 출발도 못한 단계다.

하지만 근대학문의 시각체계는 죽음연구의 필요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것으로 문제를 초점화시켜나가는 원근법 구도를 벗어난 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주제는 '금기'라기보다는 '숙명' 같은 것이다. 마치 수학문제에 주어지는 공식처럼 인식된다. '앨러건트 유니버스'(승산 刊)를 저술한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은 물리학의 중요한 균열을 이렇게 언급한다.

"매끄러운 공간 기하의 개념은 일반상대성 이론의 중심 원리인데, 그것은 양자 세계의 아주 짧은 거리 수준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요동에 의해 깨지고 만다"라고. 그가 말하고 싶은 건 물리학의 학문적 리스크다. 대부분의 물리학 이론이 "모든 다른 조건들이 동일하다면"이란 단서를 붙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인문학에 존재하는 리스크인 셈이다. "죽음을 삶의 대척점에 놓인 것으로 파악하는 현대인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죽음을 삶의 품안에서 인식한 조상들의 세계관에서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김열규 교수의 지적은 이 지점에서 새겨들을 만하다.

우리 주변엔 죽음 말고도 숙고의 대상이 돼야할 여러가지 주제들이 있다. 사랑, 고통, 습관, 슬픔 등 일상적으로 느끼고 쓰이는 주제들이다. '고통'을 예로 들어보자. 그 동안 학문에서 폭력을 성찰한 경우는 있어도 고통 그 자체를 주목한 경우는 없다. 왜일까. 폭력은 비록 비정상적일지리도 이성의 작용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지만 고통은 '신체적 현상'에 속하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 들어 신체가 정신을 규정한다는 식의 역전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급진적 소수의 목소리다.

미국의 사회학·인류학 교수들이 공저한 '사회적 고통'(그린비 刊)은 고통이 왜 연구돼야 하는가를 충분히 시사한다. 필자 중의 한명인 비나 다스 교수는 "고통에 대한 논의가 많을수록 정작 고통을 당한 당사자들은 침묵을 지키게 된다"는 데 주목하면서 "고통이 측정 가능한 현상으로 간주돼 사회적 경험으로부터 분리되고 의료·복지 등 제도적 관리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아서 클라인만 교수는 "고통받는 희생자들의 영상이 '인포테인먼트'라는 이름으로 상업화돼 마케팅이나 경쟁과정에 포함돼 버린다"라고 지적한다. 이는 우리가 알고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성찰할 기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늘 나오는 이야기지만, 학계의 엘리트 중심주의 때문에 많은 현상들이 학문의 그물망을 빠져나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보통사람들 이야기다. 인터넷에서 활발히 창작되는 보통사람들의 소설은 문학비평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옥탑방 고양이'를 비롯, 많은 드라마와 영화원작은 비전문 작가에 의해 인터넷에서 생산되며 그 비율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인터넷 현상에 대한 분석서들은 많지만 이중 3할은 분석틀 논의이고, 5할은 계도적 비평이며, 실제 현상에 대한 심도있는 접근은 2할도 못되는 느낌이다.

철학도 위대한 철학자들에 대한 연대기적 주석연구들이 참으로 많다. 종교학적으로 말하면 교리체계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뤄지는 반면, 일반인들의 신앙은 다뤄지지 않는다. 대표적인 게 사회적 신념체계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없다는 것. 영국의 한 인류학자는 한국을 방문하고 이런 인상적은 코멘트를 했다. "한국인들은 무당에 대해 많이 의존하지만, 무당의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고 심지어 그들을 천대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런 이율배반성은 사회현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학문의 세계에 그대로 연장된다. 종교학과 민속학에 맡겨진 무속에 대한 연구는 사회문화적 접근을 필요로 한다. 우리 사회의 기층문화, 멘탈리티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까닭이다.

또 하나 거론해야 할 것이 性 문제다. 현재 가정 내의 성폭력 문제, 청소년이나 젊은 여성의 성의식, 성교육 현황은 활발히 '조사'되고 있다. 그리고 성과 관련한 사회의 억압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측면들도 끊임없이 '성토'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노인들의 성문제'라든지, 은밀한 소수자로 존재하고 있는 트랜스섹슈얼, 바이섹슈얼의 문제는 다루지 못하고 있다.

최근 스와핑 문제가 불거져나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소 희극적이었다. 반대하는 쪽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주장하고 찬성하는 쪽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냐고 반문한다. 전자는 성의식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후자는 전통적 성문화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대립은 성 정체성의 분열에 대한 심각한 생각을 아무도 안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경험적 연구를 통해 계속 보충될 문제다. 

특정 학문분야에 치중된 연구도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관련된 것을 다루는 학문 분야는 경제학이 유일하다. 하지만 경제학적 돈 담론은 경제법칙에 종속되는 딱딱한 내용들 뿐이다. 최근 번역돼 나온 '화폐심리학'(미첼 아질레 지음, 학지사 刊)이라는 책은 돈을 사회심리적으로 조망한 독특한 책이다.

이 책은 어떤 사람이 빚을 지고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는지, 또 월급이 많고 적다는 게 어느 정도 행복에 기여하는지, 돈이 과연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많은 돈을 가질수록 인간은 더 행복한지 등이 조목조목 짚어진다. 물론 설문조사와 심리학적 가설들을 엄밀히 적용해서 해석하고 있다. 소설가 박태원 식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자본주의 시대의 考現學이다.

장석만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언젠가 '감수성의 역사와 체계'를 주제로 책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감수성은 라이프스타일에 깃들인다. 그는 현재를 구성하는 다양한 문화적 습속들이 언제부터 그런 형식과 개념을 지니게 됐는지 연구함으로써 자아의 실체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계몽이성의 실패는 우리 삶의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 감성적 영역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미답지에 도전하는 의욕이 서서히 형성되는 만큼, 그것을 확실하게 다루는 방법론적 차원의 고민까지 함께 가야할 것 같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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