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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열전 24-올더스 헉슬리】"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망하고 아나키즘 사회가 와야 한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열전 24-올더스 헉슬리】"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망하고 아나키즘 사회가 와야 한다"
  • 교수신문
  • 승인 2020.03.3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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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슬리의 유토피아,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부근에 있는 인도양의 섬
동서양의 조화로운 화합을 통해 개인의 잠재능력이 실현되는 유토피아
올더스 헉슬리

한국의 헉슬리

한국에서는 올더스 헉슬리에 대한 연구서를 보기 힘들다. 내가 읽은 유일한 책은 백 쪽도 안 되는 살림지식총서의 하나인데, 그 책을 쓴 김효원은 《멋진 신세계》에서 헉슬리가 “예술가, 특히 문학가가 새로운 세계질서의 주동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작가정신을 이 작품 속에 투영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철학자가 통치자여야 한다고 주장한 플라톤과 비교하여 나는 깜짝 놀랐다.(32쪽) 문학가가 통치자가 되는 세상을 헉슬리는 추구했고 그것이 멋진 신세계라는 것인가? 《멋진 신세계》가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가령 플라톤이 4계급을 주장한 것처럼 헉슬리는 5계급을 주장했다. 2500년이 지났으니 한 계급을 더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플라톤이 4계급을 좋게 말했다면 헉슬리는 5계급을 나쁘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시인추방을 환영한 플라톤과 달리 헉슬리는 시인 필멸의 신세계를 저주했다. 
최근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텔레비전에서 예능의 하나로 요란스럽게 이야기될 정도이니 그 기기묘묘한 SF를 여기서 재탕할 필요는 없겠다. 과학만능을 비판하는 그 소설이 한국에서는 과학만능의 전체주의 계급사회를 멋진 신세계로 오해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 예능이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그 정도로 오해할 수준의 독자가 이 글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상당수의 한국인은 과학만능주의는 물론 전체주의 계급사회도 긍정한다고 보이지만 그런 사람들도 이 글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군대처럼 안정된 공공질서를 위해 감정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한국에는 많으니 헉슬리가 악몽처럼 그린 세계를 정말 《멋진 신세계》로 착각할 사람들도 많지만 역시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아이를 거의 낳지 않고, 낳는다고 해도 인공수정으로 낳고, 성교와 생식이 분리되며, 혼인이나 가족도 없이, 성가신 인간관계도 없이 캐주얼하게 또는 쿨하게 타인과 그냥 만났다가 헤어지면 되는 《멋진 신세계》는 지금 한국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인생이 결정되고 그 결정대로 살다가 죽는 《멋진 신세계》도 이미 한국에서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교육이 타율과 강제 속에서 이루어지고, 책과 꽃을 미워하게 만드는 《멋진 신세계》도 한국의 각종 학교에서 그대로 실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소마 같은 마약은 아니라도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술을 마신다는 점도 소마와 같은 정신마비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헬조선이라는 유행어가 보여주는 인간성 상실, 정신분열, 비관적 비전이야말로 《멋진 신세계》의 악몽이 아닌가? 대중화, 평준화, 신속화, 능률화, 조직화, 제도화, 집단화, 계급화, 획일화, 형해화라는 《멋진 신세계》의 특징이 한국만큼 뚜렷하게 나타나는 나라가 또 있을까?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죽이고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는 기술발전에 의한 신종 오락물의 범람이 한국만큼 심한 나라가 또 있을까? 밖으로는 도덕군자같이 행세하면서도 안으로는 아무런 정조관념 없이 마구잡이로 성관계를 맺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을까? 한국에서야말로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가 아닌가? 1958년에 쓴 《다시 찾아가 본 멋진 신세계》에서 헉슬리는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의 등장과 인구 과잉에 따른 경제적 불안정을 예언하고, 대량생산과 분배로 인한 기업과 정부의 비대화와 과잉조직화 그리고 정신병의 확산을 경고했는데, 그런 예언과 경고도 한국에서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점이 아닐까? 

헉슬리의 삶과 작품

헉슬리는 1894년에 태어나 1963년에 죽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진화론자 토머스 헉슬리로 그가 저명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점이 어디에서나 강조되어 장황하게 설명되지만, 손자 헉슬리가 할아버지에게 반항한 점도 중시해야 한다. 영국의 전형적인 엘리트 교육코스인 이튼과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그는 오웰이 재학 중이었던 이튼에서 1년간 프랑스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는 공장과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버트런드 러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클라이브 벨을 포함한 블룸즈베리 그룹 사람들을 만났고, 인도를 방문한 뒤에 힌두교와 불교에 공감하여 쓴 《길을 따라서》(1925)과 당대 사회를 풍자한 소설 《대위법》(1928)을 발표했다. 이어 《멋진 신세계》(1932)와 같은 문명비판 소설과 《가자에서 눈이 멀어》(1936)와 같은 평화주의 소설을 냈고, 히틀러 정권에 반대하고 러셀 등과 함께 평화운동에 참여했다. 1937년 이후에는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 남부로 이주하여 목장을 경영하면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헉슬리의 작품은 일본에서는 1930년대부터 번역되었으나 한국에서는 1958년에 《대위법》,  1959년에 《멋진 신세계》가 각각 처음으로 번역된 듯한데, 최근에는 《대위법》보다 《멋진 신세계》가 압도적으로 소개되었다.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갈색 표지의 세계문학전집 중 하나로 나온 《대위법》(번역명은 《연애대위법》인데 ‘연애’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책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일 뿐인데도 계속 그렇게 번역되는 점이 참으로 이상하다)은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세태의 부조리를 풍자한 작품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상은 혼란에 빠져 있다. 전체주의가 대두하고 자본주의의 폐해는 더욱 심해져 빈부격차는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사람들은 불륜의 섹스와 쾌락 그리고 출세에 몰두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순수한 인간성과 자연을 찬미하는 자연주의자 램피언으로 그는 기계, 과학, 이성, 종교에 반대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멋진 신세계》의 주제를 미리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멋진 신세계》와 함께 헉슬리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는 《원숭이와 본질》(1948)은 2108년, 핵전쟁이었던 제3차 세계대전으로 뉴질랜드를 제외한 전 세계가 피폭되어 1세기 넘게 고립된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20세기 말은 원숭이들이 인류를 지배한다. 원숭이 지배자들은 인간을 최후 심판(멸종)하기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쓴다. 지성인 포로들이 생화학 무기를 퍼뜨리는 역할을 한다. 원숭이들에게 완벽하게 조종당한 두 아인슈타인이 마스터 스위치를 누르는 것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진다. 헉슬리는 이를 ‘20세기 과학의 자살’이라고 부른다. 이 소설을 모델로 하여 피에르 불이 1963년 발표한 소설 《혹성탈출》이 나왔다. 

헉슬리의 작품 중에는 재벌가문을 중심으로 인간 욕망의 허무를 그린 또 하나의 풍자소설인 《수많은 여름이 지나간 뒤》(1939)에도 욕망에 휩싸인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소로와 같은 프롭터라는 이상주의자가 나온다. 그는 현대문명의 위기를 간파하고 지배자가 없는 평등한 사회에서 자급자족하는 경제생활을 추구하면서 빈민구제 사업이나 중소기업 육성과 같은 비전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헉슬리가 가장 애착을 가졌다는 《시간은 멈추어야 한다》(1944)와 같이 우리말로 번역되지 못했다.  

헉슬리가 좋아하는 종교인들의 명언을 모은 《만년 철학》(1945)은 노장사상과 불교 및 선사상, 인도의 우파니샤드와 베다성전 및 요가 명상가들, 이슬람교의 수피, 세례자 요한과 필로 같은 기독교 신비주의자, 중세의 에크하르트 같은 가톨릭 신비주의자, 개신교의 덴크와 프랭크, 퀘이커교도인 존 스미스 등의 사상을 섭렵하면서 헉슬리 자신의 사상을 보여주는 책이다. 헉슬리는 프로이트와 같은 서양 심리학보다 인디언들의 초월주의적 체험에 근거하는 심리학을 보여주는 《인식의 문》(1954) 같은 책도 썼다. 

블룸즈베리 그룹 사람들

헉슬리의 아나키즘

앞에서 언급한 김효원은 헉슬리가 아나키스트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헉슬리가 1932년에 낸 《멋진 신세계》을 1947년에 재간하면서, 자신이 그 소설을 다시 쓴다면 세 번째의 선택안을 부여하고 싶다고 하면서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이 말한 상호협조의 정치, 헨리 조지가 말한 분산적 성격의 경제, 인간을 적응시키고 예속시키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고 안식일처럼 이용되는 과학과 기술, 내재적 도교나 그리스도, 초월적 신, 브라만에 대한 통합적 지식이 되는, 인간의 최종 목적에 대한 의식적이고 지적인 추구인 종교, 고등 공리주의로서의 생활철학의 공동체라고 한다. 

헉슬리의 좋은 사회에 대한 오랜 사색의 묘사이자 그의 ‘철학적 아나키즘’을 실제로 완전하게 실현하는 비전을 보여준 《섬》(1962, 번역명은 ‘금지된 섬’)은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 이후 최초로 완전하게 구현된 아나키즘 유토피아 소설이고, 그것을 잇는 아나키즘 유토피아 소설인 어슐러 르 귄의 《갖지 못한 사람들》(1975)의 모델이 된 작품이었다. 헉슬리는 그 작품을 사회사상에 대한 중대한 기여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우리가 노력하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일종의 실용적인 꿈이라고 했다.  

헉슬리의 유토피아는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 부근에 있는 인도양의 섬으로 동서양의 조화로운 화합을 통해 개인의 잠재능력이 실현되는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1840년대에 그곳의 죽어가는 왕에게 초대받은 어느 스코틀랜드 의사가 최면술로 왕을 낫게 하면서 두 사람이 팔라 섬을 개혁하게 된다. 서양 과학과 합리주의, 그리고 동양의 종교와 문화의 최고를 사용하여 그곳의 농업을 발전시킨다. 

그 뒤 1세기가 지나 어느 독재자의 부관과 석유회사원을 지낸 주인공 윌 화나비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육체적 쾌락에 젖다가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표류하여 그곳에 도착한다. 그는 혼혈인 의사 로버트 맥페일을 만나고 그의 며느리인 심리학자 수질라와 가까워지면서 타인과 완전한 일체가 되는 불교적 깨달음을 얻는다. 서구의 문화와 가정 및 교육이 피터 팬 같이 저능한 인간이나 스탈린과 레닌 같은 권력지향적 인간을 낳는다고 생각한 윌은 모두 매일 두 시간씩 농업노동을 하고, 그 결과 풍부한 식량이 있으므로 경쟁이 없이 자치정부의 연합으로 사는 필라를 유토피아로 본다. 특히 그곳의 교육은 각자의 개성에 따른 재능을 개발하고 선전 등에 넘어가지 않는 자유인을 키우는 것이다. 이는 독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자유정신뿐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곳은 아직도 군주와 정부 및 의회를 가진 나라이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경제적으로, 지리적으로, 직업적으로 만들어진 여러 단위가 자치를 하면서 연합체를 형성하고 있고, 모든 경제활동이 상호부조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전통적 가족의 가부장제는 불교적 윤리와 원시 공동체의 코뮤니즘에 의해 극복된다. 그곳에는 군대가 없다. 그곳의 경제와 기술은 언제나 인간에게 적합하도록 선택되기 때문에 산업화가 필요 없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라는 노동의 구분도 없다. 생활과 마음의 과학을 교육하고 연구하는 생물학, 생태학, 심리학이 물리 화학 대신에 강조된다. 

나아가 상호입양클럽(Mutual Adoption Clubs)들은 개인들을 15 내지 25 부부의 확대가족과 그들의 친척으로 통합하고, 성관계는 단순히 자유롭고 무죄인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랑의 요가인 마하야나 불교의 기초를 형성한다. 따라서 성교는 계몽과 배려의 한 형태이고, 그것은 학교 교육과정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는 《멋진 신세계》의 소마가 무한한 공감과 즐거움을 낳는 의식적인 목사(Moksa)약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1932년과 2020년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부터 헉슬리는 미국의 루이스 멈퍼드와 함께 새로운 전후 아나키스트의 대표로 불렸다. 그들을 잇는 아나키스트들이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영국의 알렉스 컴포트와 미국의 머레이 북친이었다. 그러나 헉슬리는 아나키스트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문명사적으로도 여전히 참조할 점이 많은 아나키스트 작가이자 사상가이다. 특히 그의 사상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쓴 것은 1932년, 즉 88년 전이었다. 그 뒤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그리고 사회주의 붕괴와 세계화를 경험했다. 헉슬리는 사회주의는 물론 자본주의도 망하고 아나키즘 사회가 와야 한다고 썼지만, 사회주의만 망하고 자본주의는 세계화라는 미명 하에 전 세계를 석권해 헉슬리와 달리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라는 미명으로 ‘멋진 신세계’를 구가하고 있다. 1980년대 말에 사회주의가 망하자 마르크스나 그 제자들은 엉터리라고 저주를 받았다. 당시 역사가 끝났다고 하면서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이라고 찬양한 자들도 나왔지만, 신자유주의가 극단적인 양극화를 초래하자 몇 년 전부터 다시 마르크스를 찾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적어도 한반도와는 무관한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한반도에는 여전히 지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도 강고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대로로 말이다. 헉슬리는 당시 세계가 어떤 주의든 간에, 인간이 정체성과 개성, 자유를 잃어버리고, 모두 거짓되고 인위적인 행복감으로 대체된 기술세계라고 묘사했다. 헉슬리는 그 책을 낸 직후 자신의 소설이 현실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소설로 썼듯이 경제는 대량 소비 및 높은 자본 집중과 결합된 대량 생산에 점점 더 기반을 두어 중산층을 파괴하고 빈부갈등을 증폭시켰다. 공산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 모두에서 ‘권력 엘리트’는 (대규모 자본주의 기업에 의한) 마케팅이나 (공산주의 국가에 의한) 선전에 의해 조건화된 노예들로 가득한 저수지를 점점 더 통제했다. 간단히 말해서 헉슬리는 ‘심각하게 비정상적인 사회와 관련된’ 점에서만 정상적인, 보이지 않는 새로운 노예 제도를 확인했다. 

헉슬리의 대안은 자유로운 개인이 자치하는 사회를 자연과 조화롭게 확보하면서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기본적인 모순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산자와 소비자는 실제로 대규모의 전면 통제와 중앙 집중식의 국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노예가 되었다. 이론적으로는 노동 생산성이 높아지면 기업가와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여가와 사색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생산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영성을 ‘작업장에서’ 남용하는 대신, ‘영적 자본’을 바탕으로 새로운 종류의 ‘아나키스트’ 기업가 정신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1930년대를 향해 서구는 공포에 질려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상승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헉슬리는 서양식 전체주의의 출현을 예견했다. 즉, 사람들이 영원히 젊고 건강하며 행복하게 소외되는 세계인 쾌락주의, 성적 관용, 물질적 소유의 즐거움을 장려하는 세계였다. 몇 년 후, 이미 노인이 된 이 불안한 아나키스트 개척자는 새로운 ‘장난감’인 환각제를 실험하곤 했다. 이러한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은 1960년대 미국과 세계의 다른 지역을 뒤흔든 문화 혁명에 기여했다. 당시에 환각적 경험에 대해 많은 것이 쓰였다. 그러나 헉슬리처럼 과학자의 분석적 거리, 철학자의 휴머니즘, 예술가의 감성, 대담한 정신과 의사의 신비한 개방성을 그들의 글에서 결합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60년대에 서양에서 일반화된 환각제는 2020년 지금, 대부분의 서양 영화에서 담배처럼 피울 수 있는 것이 되었다. 한국에서 상영되는 서양영화에 담배는 모자이크처리가 되지만 환각제를 피우는 장면은 그대로 방영된다. 그만큼 환각제는 우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탓일까? 북한에서야 그런 영화들이 상영될 리도 없으니 정말 무관할지 모르지만, 남한은 다르다. 앞으로 환각제 사회가 곧 닥칠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이 말한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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