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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 『인문과학의 수사학』(엘런 메길 외 지음, 박우수 외 옮김, 고려대출판부 刊)
흐름 : 『인문과학의 수사학』(엘런 메길 외 지음, 박우수 외 옮김, 고려대출판부 刊)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10.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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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변하는 학자들의 표정...학문적 수사전략 모색

1987년, 미국의 잘 나가는 학자 존 넬슨 아이오와대 교수(정치학), 앨런 메길 아이오와대 교수(경제학), 도날드 맥클로스키 버지니아대 교수(역사학)가 한 자리에 머리를 맞댔다. 당시 급부상하던 수사학에 대한 관심을 풀어보는 학술행사를 기획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인문과학에 작동하는 수사학의 공통된 논리는 무엇이고 이것은 어떻게 유형화할 수 있을까―주제는 다소 거창하게 잡혔다.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심리학, 신학, 문학, 철학, 수학, 역사학, 여성학 등 20개가 넘는 학문분야에서 한 명씩 섭외해서 글을 맡겼다. 다소 생소한 주제라 선행연구도 별로 없고, 청탁 받은 사람들은 뭘 얘기할까 골머리를 앓았다.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과 국내 수사학 전공자들이 함께 옮긴 '인문과학의 수사학'은 이날 학술대회의 결과물이다. 6백쪽의 두툼한 볼륨으로 나온 이 책은 15년이란 시차가 있지만 여러모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개별 학문이 그 속에 어떤 '웅변'을 감추고 있는지, 그 내밀성의 논리를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우선 관심이 간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담벼락을 친 분과학문들이 수사라는 걸 매개로 할 때 의외의 가족유사성을 드러낸다는 '친밀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먼저 전제돼야 할 것은 이 책의 부제가 '인문과학에서의 언어와 논증'이듯이 여기서 말해지는 수사학이 '실패한 과학'이나 '저급한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다소 실용주의적인 미국학자들이 바라본 학문세계에서의 효율적인 논증방법을 의미한다는 걸 말해둬야겠다. 전통적 의미의 수사학은 아닌 것.

미 위스콘신대 수사학 기획총서의 일부

총 22개로 나뉜 장에서 발표자들이 문제를 풀어내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먼저 자신의 학문 내부의 논리적 증명 구조가 알고 보니 과학적이지 않다거나,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근거에 기대고 있다는 식의 글이 많다. '인류학'에서 레나토 로살도는 "인종학에 대한 담론들은 다양한 수사적 양식과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객관성을 획득"한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이어지는 미시아 란다우의 글도 같은 성격이다. 인간의 진화에 관한 추론과 이론이 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의 성격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좋으면 그만큼 설득력도 강해진다는" 것. 필립 데이비스와 루빈 허쉬는 수학에서의 증명의 문제가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다고 일러준다. 고딕城 같은 추상 도식일지라도 그것이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한 형식으로 만들어지면서(강의나 저술) 형식적인 것과 비형식적인 것, 계산과 우연한 설명들, 그리고 설득력 있는 증명과 상상력이나 직관에 호소하는 것들이 '하나'로 혼합된다는 것이다.

"완전한 수학적 증명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축소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완전한 증명이란 계획된 청중, 즉 저자와 비슷한 사고방식과 숙련을 갖춘 전문가 집단을 설득하기에 충분할 정도만큼만 상세하게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94쪽). 세계를 놀라게 할 수학법칙이 발견돼 논문으로 출판돼도 읽을 사람은 1백명도 안될 것이라는 주장을 볼 때 수긍이 간다.

존 캠밸은 근대생물학의 기원이자, '종의 기원'의 저자인 찰스 다윈이 대단한 수사가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종의 기원'이 신학적 태도, 상식에 대한 호소, 적절하고 독창적인 은유로 가득차 있다고 지적한다. 재미있는 건 당시 다윈이 콩트의 '실증철학'에 대한 서평을 읽다가 "각각의 과학은 마지막 실증적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신화나 형이상학의 단계를 거친다는 콩트의 주장에서 자신의 방법에 확신을 가졌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경제학 분야를 맡은 아르조 클래머는 경제학의 수사학을 드러내기 위해 건축의 유비를 활용하고 있다. 그가 재직중인 조지워싱턴대의 경제학과는 사회과학棟 건물의 맨 꼭대기다. 클래머는 이것이 사회과학의 여왕인 경제학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 아래층은 사회학자와 인류학자가 차지하고, 그 아래는 정치학자가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학자들은 일종의 현대사나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보인다"라는 비아냥도 덧붙인다. 중문과는 어디에 있을까. 가엾은 중문과는 그 건물 지하에 있다고 클래머는 말한다. 그러나 곧 여왕은 발가벗겨지는데, 경제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환상이 "경제행위자들은 합리적"이라는 가정이다. 이것이 왜 모순일까. 경제학이 갖고 있는 합리적 모델은 수량으로 환원되지 않는 불확실한 현상에 대해서는 침묵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경제학과에 처음 들어가면 외국어를 배우는 느낌"이라는 학생들의 불만은, 그들이 유사성을 추구하며 경제의 실제적 모습을 구하는데 반해, 교수들은 경제학의 관습에 따른 경제학 논증을 구성하는 기술에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오늘날 꼭대기에 고립된 경제학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잘라 보여준다.

7개 유형의 '탐구의 수사학' 제시

사회과학 일반의 수사학을 다룬 마이클 샤피로의 글은, '학자들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정치인들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수사학의 반대편에서 이를 무장해제시키는 수사학적 언술과 장치들을 고안해야 한다고 실천론을 제기한다. 이는 "논쟁적이고 도발적인 실습"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으며, 비판담론을 도울 수 있어 사회과학의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수사를 매개한 비판행위와 학문행위의 넘나듦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뒤이어 나오는 진 엘스타인의 글은, 여성학과 여권주의 정치담론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분석한 결과 그 둘은 상당히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엘스타인은 여성학과 여성주의 정치담론이 서로 별거해야할 때를 고민해야 하는 성찰의 시간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각 학문의 고유한 글쓰기 속에 교묘하게 은폐된 수사들을 발견하는 기쁨, 그리고 각 학문을 규정하던 '얼굴'로서의 신화들을 해체하는 도발성이 이 책의 장점이다. 3명의 편집자들은 학문을 설득력 있는 담론으로 만들어주는 '학문적 수사'에 대한 연구, 학문을 개별적으로 고립시키는 '학문의 수사성'에 대한 해체작업을 합쳐 '탐구의 수사학'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존 넬슨은 책의 마지막에서 이런 '탐구의 수사학'을 논리학, 시학, 수사비유론, 화제론, 변증법, 해석학, 윤리학, 정치학을 통해서 일곱 가지로 예증해 보이는데 이 부분까지 읽어야 어느 정도 정리된 독후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학문의 수사학적 전략에 동의한 저자들의 글쓰기가 과연 이론에 충실한 실천인가는 의문이다. 너무 까다로운 서술이나 독자적인 주장으로 설득력을 잃는 글도 보이는 까닭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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