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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기적 독해의 횡포와 경직된 교조주의의 위험성
인상기적 독해의 횡포와 경직된 교조주의의 위험성
  • 선우현 청주교대
  • 승인 2003.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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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 설헌영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286호)에 대한 반론

선우현 / 청주교대·철학

 

부족한 필자의 책에 대해 이처럼 본격 서평을 해주신 설헌영 교수(이하 평자)에게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특히 비판적 지적 사항들은, 앞으로 채워 나갈 내용이 적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필자에게 상기시켜 줬다는 점에서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가 시도하고 있는 '대안적 사회철학의 모색' 작업의 한계가 그러한 지적 사항들로 인해 초래된 것이라고 평자가 주장하는 것이라면, 필자로서는 그러한 비판을 수용할 의사가 전혀 없다. 평자의 비평은 印象記적 독해에 기인한 자의적인 해석과 독단적인 문제제기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성실한 읽기와 진지한 고찰 없는 폄하성 평가
먼저 평자는 인간중심철학을 원용해 새롭게 유토피아론을 구성해보려는 시도와 관련, 필자가 인간중심철학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해 나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중심철학에 대한 몰이해와 학문외적 선입견에 기인한 것으로서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필자 역시 인간중심철학이 완결된 철학체계라고 보지 않으며 보완하고 해결해야할 문제점이 적지 않다고 본다. 그럼에도 한반도의 현실을 염두에 두고 기존의 맑스주의 철학의 한계를 극복해 새롭게 재편한 자생적 철학체계란 점에서 충분히 학문적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처음 소개되는 철학적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제시하고 있는 대목을 지적해, 마치 엄밀한 논증이 결여됐다고 모는 것은 너무 막 나간 것이다. 비판적 분석과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특정 이론의 내용을 함부로 전달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철학도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령, 민주주의 원칙과 사랑의 원칙이 결합된 인간중심의 사회모델은 소박한 기대에 불과하다는 평자의 폄하성 주장 역시 해당 철학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검토 후에 제기돼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조금 해명해 보면, 이 모델은 이제껏 사회가 주로 '민주주의 원칙(정의 원칙)'에 의해 작동돼 왔다면, 앞으로는 '사랑의 원칙(차이의 존중 및 배려 원칙)'과 결합돼 사회가 운영되는 방식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제기된 것이다.

또한 '3대 개조사업'의 경우, 이것은 노동 패러다임에 기초한 맑스철학의 일원론의 한계를 넘어서 '노동(자연개조사업)/상호작용(사회적 관계 개조사업)/능동적 의식(인간개조사업)'이라는 삼원론의 관점에서 사회를 해명하고 변혁해 나가려는 실천 프로그램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는 하버마스가 '노동/상호작용'의 이원론적 구도를 통해 노동 일원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그 문제의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하버마스 철학의 비판적 수용과 관련된 지적인데, 이 역시 평자의 성실치 못한 독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런 한에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평자는, 필자가 기대고 있는 하버마스 철학은 '합의 절차'를 통해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반박하면서, 그러한 중대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철학을 대안적 사회철학의 모색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대체로 맞는 지적이다. 그러기에 필자 역시 그러한 난점을 극복 내지 보완하기 위해, '의사소통적 상호이해를 통한 합의'의 보완적 모델로서 '권력관계에 기초한 투쟁' 모델을 수용해 양자를 결합해 보려는 시도를 이 책의 다른 장(푸코의 권력/지식론)에서 수행하고 있다. 아울러 하버마스 이론의 또 다른 중요한 문제인 '체계 내의 구조적 모순'의 해명과 극복 방안과 관련해, 맑스의 철학에 기대어 그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시도 또한 이 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평자는 이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맑스에 대한 추수가 낳은 교조주의
평자의 불성실하다 못해 자의적인 곡해는, 필자가 사용하지도 않은 어구들의 교묘한 결합을 통해 마치 저자가 한국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상호 모순적인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지적하는 대목에서 그 극치를 이룬다. 필자는 탈근대적 문화의 징후들이 '부분적으로' 우리사회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으로는' 근대성이 결여된 상태임을 시종일관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평자는, 필자가 한편으론 "근대성의 과잉으로 인한 탈근대성"이 "자주" 목격된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근대성이 구현되지 못한 이유가 근대적 주체의 미형성에 있다고 주장하는 등 서로 모순된 진술을 하고 있는 것처럼 지적 한 후, 이는 한국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인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자의적인 해석이 결과한 독단적 횡포가 아닐 수 없으며, 그 점에서 평자는 비평에 앞서 타인의 저서를 보다 진지하고 성실하게 읽어내는 자세부터 갖춰야 할 것 같다.

맑스와 맑스주의를 혼동하고 있다는 지적 역시 적확한 것이 못된다. 맑스주의와 달리, 맑스 자신은 사회주의의 구현 방식을 계급폭력과 계급독재의 방식에서만 찾지 않았다는 평자의 주장은 이미 상식화된 이야기다. 그럼에도 필자가 마치 맑스주의와 맑스를 구분하지 않고 그를 폭력주의자로 해석하고 있는 양 몰고가는 평자의 의도에는 '현실 사회주의 붕괴는 맑스주의의 탓이지 맑스 본인의 잘못은 아니라는 맑스에 대한 맹목적 추수주의적 신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 역시 맑스 철학의 이론적·실천적 유효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평자와 달리, 맑스주의의 오류와 한계의 궁극적 원천은 맑스 자신에게 있다고 본다. 그런 한에서 맑스의 무오류성을 강변하고 그의 철학에 기대 역사유물론의 재구성(하버마스)과 인간중심철학(황장엽)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평자의 태도는, 필자가 보기에 신채호의 '공자의 조선'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야말로 '경직된 교조주의적 태도'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익지 않은 내용의 책에 대해 관심을 갖고 비평 해준 점은 고맙지만, 제기된 비판적 지적들은 필자가 겸허하게 수용하기에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으며 필자의 작업에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합리성이론으로서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사회비판과 정치적 실천', '우리시대의 북한철학'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하버마스', '정의와 다원적 평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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