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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7 - 존 스튜어트 밀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7 - 존 스튜어트 밀
  • 교수신문
  • 승인 2020.02.1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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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이 아나키스트라고?
자유론(초판본)
자유론(초판본)

한국에는 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로 소위 자유주의자들이다. 그 중에는 소위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이상한 것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소위 시장주의적 자유주의자, 즉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이다. 그것을 자유민주주의라고도 하고, 그것이 우리 헌법에서 정한 국가 원리라고 하지만, 헌법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없고, 우리 헌법이 정하는 민주주의는 반드시 시장주의나 자본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개인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정말 개인주의자인지 의심스러운 사람들도 많다. 

우리나라 말 중에 무슨 주의나 주의자라고 하는 경우만큼 혼란스럽고 제멋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특히 민주주의니 자유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경우에 혼란은 가장 극심하고, 심지어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멋대로 악용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의사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말이어야 하거늘 의사단절을 위해, 나아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니 참으로 말이 무서운 세상이다. 특히 무슨 무슨 주의라는 게 대부분 그렇다. 그러니 참으로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밀은 자유주의 사상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자이기도 했다. “인류가 계속 발전한다면 지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연합의 형태는 평등의 관점에서 노동자들의 연합, 공동으로 그들이 운영하는 자본을 소유하고, 스스로 선출 가능하고 제거 가능한 관리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라고 한 그는 카를 마르크스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밀의 자유주의는 그가 1859년에 쓴 《자유론》에 집약되어 있다. 그런데 그 책의 핵심은 어떤 자유보다도 중요한 자유가 ‘사상의 자유’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많은 자유가 규정되어 있지만, 사상의 자유가 없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고 사상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사상의 자유가 반드시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밀을 좋아하고 그의 《자유론》에 찬성해서 그 책을 번역하거나 소개하는 자유주의자라면 그 책의 취지에 맞게 당연히 국가보안법 같이 사상의 자유를 제약하는 악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 같지만, 외국에서는 당연한 그런 논리가 한국에서는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도리어 한국에서 자유주의자란 국가보안법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유론》은 대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중고등학교에서도 세계의 고전이니 하면서 널리 읽히는데 그것을 아무리 읽어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수준에 그친다면 그 독서는 참으로 한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밀의 《자유론》이 자유에 대한 책으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고전이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다. 또 아나키즘이 무엇보다도 자유를 중시하는 것임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밀을 아나키스트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밀의 자유론을 누구보다도 중시하는 아나키스트는 현대 아나키스트의 대표인 놈 촘스키다. 놈 촘스키는 밀만이 아니라 아담 스미스나 버틀런드 러셀도 좋아하고 그래서 그들을 아나키스트의 범주에 넣는다. 그러나 이는 아담 스미스나 밀을 시장주의자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일 것이다. 촘스키 이전에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도 밀을 아나키스트로 보았다. 밀의 《자유론》을 소설로 쓴 작품이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2009년에 《자유론》 번역을 내면서 그를 아나키스트라고 했다. 한국에서 밀을 아나키스트로 본 것은 내가 처음일 것이다. 

아나키스트 밀의 삶

밀은 《자유론》 처음에 독일의 훔볼트가 “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이고도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한 말을 인용했다. “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한다는 것은 각자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자유론》의 처음에 인용한 이유는 자유란 개성을 살리기 위해 필요하다고 밀이 생각한 탓이다. 자유란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개성을 발휘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도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내가 받은 교육은 개성의 존중이 아니라 개성의 무시, 아니 개성의 죽임이었다. 국가가 정한 하나의 교과서로 그 암기만을 요구하고, 그 암기의 시험인 대학입시로 인생을 결정하는 철두철미한 개성의 압살 위에 세워진 집단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교육이었다. 그 뒤에 덮친 군대는 그야말로 한국인을 전체주의 인간으로 더욱 연마하여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는 마지막 훈련과정이었다. 우리는 그런 전체주의 가정을 이루고 전체주의 회사에서 근무하며 전체주의 언론과 문화에 젖어 전체주의 사회와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가 죽는다. 여기서 개성적인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밀은 1806년에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과 해리엇 밀(Harriet Mill, 1782-1854)의 장남으로 런던 부근에서 태어났다. 밀은 어떤 학교에도 다니지 않고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다. 이는 소위 영재교육의 전형으로 유명하지만, 그것은 밀 아버지의 사상적 확신에서 나온 것이고, 또 그 아버지가 극단적인 가난 속에서도 오로지 아버지 자신이 행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교육의 대부분이 고전 읽기와 질의응답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천재·영재교육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이 갖는 문제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회교육이나 실천교육을 결여한다는 점이고, 어쩌면 ‘인조인간’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으나, 밀의 교육이 주입식 암기의 영재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독서하면서 요약과 비판을 하고, 아버지와의 질의응답을 통하여 이해력을 더욱 깊이 하는 방식이었던 만큼 인조교육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도리어 개성 교육이라는 점에서는 진취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해리엇 테일러 밀
해리엇 테일러 밀

1851년, 여성주의 철학자였던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 Mill, 1807~1858)와 결혼한 밀은 그녀의 영향으로 인해 그때까지 신봉한 민주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무지와 잔인함을 우려한 탓이었다. 따라서 《자유론》에서 그렇게도 강력하게 주장한 대중 여론의 횡포를 경계하면서도, 밀은 사회주의가 오는 때를 열망했다. 밀은 재산의 자유를 상당히 제한하고, 노동자의 기업 소유와 경영, 공동생산조합, 그리고 취득세와 상속세를 비롯한 조세에 의한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주장한 자치사회주의자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나 국유화에 반대하여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와는 구별된다는 점에서 아나키즘에 상당히 가깝다. 그는 시장경쟁이 비효율과 착취에 대한 필수적인 방지책이라고 믿었지만 자본주의 기업은 노동자와 경영자 그리고 소유자의 이익을 분리한다는 점에서 유해하다고 보았다. 특히 노동자는 경영자의 권위주의에 종속되고, 기업 이윤으로부터 얻는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 노동자의 자주관리와 기업소유자인 노동자에게 경영자가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치 영역의 자치인 지방자치를 경제 영역에서 주장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끝없는 생산 증대의 추구가 자원의 한정과 모순되어 이득을 감소시키는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것이므로 생산과 인구의 증가는 정지되는 반면 문화적이고 기술적인 쇄신이 계속되어 보다 수준 높은 여가의 활용이 가능한 사회가 오리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남녀가 지성과 교양,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더욱 높은 즐거움을 위해 헌신하고, 계급적 적대감이 없는 사상과 삶을 추구하여, 서로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되 자신이나 남들에게 결코 무비판적이지 않은 사회를 추구했다. 개인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시장경제의 장점을 유지하는 사회가 그의 아나키즘적 유토피아였다.    

1865년 밀은 하원의원으로 여성참정권, 비례대표제, 노동자계급의 선거권 등을 주장했으나 실현하지는 못했고, 1868년 선거에서 낙선한 뒤 1873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죽었다. 

밀의 아나키즘

밀은 《자유론》에서 개성이 인류 복지에 필수적 요소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그는 독일의 아나키스트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1767~1835)가 “인간의 목표는 완전하고 일관된 전체를 향한 그의 능력의 가장 높고 가장 조화로운 발전”이고 개성의 두 가지 요건은 자유와 상황의 다양성이라고 한 말을 인용했다. 나아가 그는 ‘뛰어난 미국인’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조시아 워런이 ‘개인의 주권’이라고 한 말도 인용했다. 

리버테리안이자 개인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밀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대중의 무지를 두려워했고 사회주의가 지닐 수 있는 다수의 전제에 공포를 느꼈다. 그는 제1인터내셔널로 인해 바쿠닌을 오해했고, 그의 사회주의를 일반적인 혁명적 파괴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자 중에서 그는 그 체계에서 불평등의 정도를 유지한 생시몽과 푸리에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럼에도 그는 자유방임주의의 완전한 신자가 아니었고 더 공정한 부의 분배를 원했다. 그는 그의 유명한 다음 공식에서 공동체적 개성이라는 아나키즘 목표에 매우 가까워졌다.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우리가 고찰해야 할 미래의 사회적 문제는 최대한의 개인행동의 자유를 지구의 원재료의 일반적 소유와 결합된 노동의 이익에서 모두를 평등하게 참여시키는 것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밀의 철학은 개인과 사회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는 효용, 진실, 개성에 근거한 자유를 방어했다. 그는 정부와 다수와 여론의 전제에 반대했고, 리버테리언 사상의 위대한 고전 중 하나인 《자유론》에서 언론과 사상의 무한한 자유를 주장했다.  

고드윈처럼 그는, 진실은 언제나 오류에 대해 승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데에 최선은 자유로운 탐구라고 주장했다. 아무도 실수를 하지 않으며, 그들이 진압하고 있는 견해가 진실임을 확신할 수 없다. 진실은 반대 의견의 충돌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우리의 견해를 변호하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진실에 대한 살아있는 이해”를 확보할 수 있다. 밀은 사람들이 권위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하고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고 믿은 아나키스트와 같은 입장이었다. 

밀은 “그 이름을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것을 박탈하고자 시도하거나, 그것을 얻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선을 추구하는 자유”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근거에서 그는 양심, 생각과 느낌, 취향과 추구,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옹호했다. 밀은 개인적 관점에서 자유를 소극적으로 사람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심지어 그는 “모든 구속은 악이다.” 라고 말하며, 대부분의 아나키스트 이상으로 사람들을 순응시키려고 노력하는 여론과 사회적 압력, 즉 정치적 권위보다 더욱 억압적일 수 있는 하나의 전제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는 개성과 다양성을 그 자체로 존중했으며, 편심과 색다른 ‘삶의 실험’을 격려했다. 

밀은 자기 행동과 타인행동과의 구별을 통해, 개인이나 집단의 ‘자기 보호’가 누군가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 유일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명백한 해를 입히거나 고통을 부여할 때만 방해를 받아야하고, 그들 자신의 이익은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 모두는 혼자 두어질 권리가 있으며, “자기에 대해,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개인은 주권자”로 보아 인간을 자립하고 합리적인 논쟁에 대응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유익한 목적을 이유로 한다고 해도 손에 더 연약한 도구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왜소하게 만드는 국가“에 반대했다. 

밀은 종종 거의 아나키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훔볼트처럼 자유주의 진영에 남아있다. 그는 여성의 참정권을 옹호하고 소수의 목소리를 비례 대표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도한 규제와 중앙 집중화에 반대한 그는 정부의 역할을 계약의 규제와 공공사업의 제공 정도로 제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대의정부를 주장하면서 유식자들이 무식자들보다 더 많은 투표권을 갖는 복수투표제를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루소를 따라 “전제는 야만인을 취급하는 정부의 합법적 양태”이므로 식민지 지배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지적 엘리트의 지도 역할에 대한 밀의 신념은 그를 아나키스트로 보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는 사상, 표현, 개성의 자유를 수호한 점에서 위대한 아나키스트이지만, ‘지적인 아나키’보다 지적 권위의 필요를 강조한 점에서 아나키스트로 보기 어렵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현명한 지도자라는 엘리트에 의해 자발적으로 인도되는 것을 행복한 사회로 그렸다. 장기적으로 밀의 엘리트주의는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보다 더 우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의 법적 도덕주의에 대한 비판과 국가 가부장주의에 대한 비판은 범세계적으로 여론의 지지를 받아 왔고, 검열이나 동성애나 이혼과 같은 분야의 법 개정을 촉구한 근본 지침이 되어 왔다. 사회의 도덕적 획일성을 유지하려는 법적 강제에 대한 그의 확고한 반대와 그런 시도로부터 시민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하는 그의 생각은 현대의 어떤 진보적인 사고나 정책보다 앞서 있어서 아나키즘적 자유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21세기 한국에서 여전히 긴요한 과제들인 국가로부터의 개인의 자유, 과도한 중앙 집권으로부터의 지방자치, 국가주의적 교육으로부터의 교육 자치 등의 주장은 밀이 제시한 자유의 원리로부터 추구되지 않을 수 없다.   

허버트 스펜서

밀과 함께 19세기말에 일본과 중국, 그리고 조선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였으나, 스펜서 사상의 일부에 불과한 ‘적자생존’만이 강조된 측면이 있다. 스펜서는 밀처럼 개인의 자유의 관점에서 기존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유방임, 경제적 경쟁, 자발적 협력, 노동 분업이 자율성과 전반적인 복지를 보장하는 사회를 전망했다. 

스펜서는 기존 사회가 ‘반(反)군사, 반(反)산업의 유형’이라고 보면서, 진정한 자유는 자발적인 협력과 경쟁을 기반으로 한 산업 사회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강제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군사 사회를 재창조하기를 원했다. 만약 그들의 길을 가면 궁극적인 결과는 고대 페루의 고착된 압제적 사회와 같을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

스펜서는 개인을 국가에 대항시켰지만, 국가의 철폐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크로포트킨이 말했듯이 그는 철학 체계에서 나와야할 정부에 관한 모든 결론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스펜서의 개인주의는 《정부의 적절한 차원》(1842)에서 훔볼트나 밀과 같이 국가의 의무는 국민을 서로 보호하는 데만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외부의 적대세력과 내부의 침략세력 모두에 대한 보안과 계약 집행을 위해 시민들에게 지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 외에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아야 한다. 국가의 기능은 ‘인간의 자연권을 방어하는 것, 즉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약자에 대한 공격을 막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다. 

스펜서는 국가를 침략을 방지하고 정의를 집행하는 ‘소극적 규제 기관’으로서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프루동과 달리 스펜서는 적절한 제한 내에서 정부의 행동은 단순히 합법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하고, 개인과 신체 또는 개인들의 계급에 대한 국가의 구속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보다 더 효율적으로 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펜서는 그의 생애 후반에 국가가 도덕법을 증진시키는 데 보다 긍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평등한 자유의 법칙’은 ‘모든 사람이 타인의 동등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펜서는 완전한 아나키즘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와도 달랐다. 그는 국가의 과도한 권력을 주장하여 엄청난 비판을 받았지만 중산층의 지역 급진주의라는 배경에 충실했다. 그는 노동계급의 요구가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이라는 더 나쁜 퇴보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노동에 대한 동등한 수익을 가져 오려는 시도는 공산주의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아나키즘과 무자비한 삶과 같은 무자비한 투쟁으로 돌아갈 것이다.” 스펜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현대의 아나키자본주의가 지닐 개인주의, 경제적 자유방임,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을 예상했다. 소유적 개인주의는 그의 정치적 사상의 마지막 전제다. 

스펜서는 그의 훌륭한 리버테리안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현대 아나키즘이 아니라 초기 산업자본주의 대변자로 남았다.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서 칼 마르크스의 눈부신 흉상 맞은편에 스펜서의 무덤이 무시되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것은 역사의 작은 아이러니 일 수도 있지만, 그의 리버테리언 비전은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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