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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잃어버린 시간과 늦게 도착한 유산
[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잃어버린 시간과 늦게 도착한 유산
  • 교수신문
  • 승인 2020.02.0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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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음악』 |저자 폴 오스터 |역자 황보석 |열린책들 |페이지 352

『우연의 음악』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빚, 선물, 도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 남자가 오래전에 소식이 끊긴 아버지로부터 뒤늦게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는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뒤늦게’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6개월이 지난 뒤에야 그가 이 사실을 전달받기 때문이다. 유언의 집행을 맡은 변호사가 그의 연락처를 알아낸 것은 이미 그의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 다음이었다. 아내가 그를 떠났고, 그는 어린 딸을 미네소타에 사는 누이에게 맡겼다. (소방관이라는 직업상, 그가 네 살배기를 혼자 돌보는 것은 무리였다.) 아버지의 유산이 제때 도착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들이다. 

하지만 ‘우연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이 책의 표면적인 주제일 뿐이다. 내쉬-이것(내쉬)이 그의 이름이다-의 처지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될수록, 우리는 그의 불운이 우연하게 그를 덮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의 존재 조건 안에 내재해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큰 빚을 졌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도 그 빚을 갚고 있다. 애초에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이렇게 고생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유산은 6개월이 아니라 30년 늦게 도착한 셈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한다. 그리고 이 유산을 아무렇게나 써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는 빚을 갚고 새 차를 산 다음, 자동차 트렁크에 전 재산을 싣고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음악을 들으면서,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의 뒤로 끝없이 풍경이 흘러가고, 음악과 함께 시간의 토막들이 사라진다. 그러면서 돈도 조금씩 줄어든다. 음악을 듣는 행위는 순수한 시간낭비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시간으로 바꾸어 순수하게 낭비한다.  

일 년을 이렇게 길 위에서 흘려보내고 나서, 돈이 거의 떨어져 갈 무렵, 내쉬는 포지라는 이름의 도박사를 만난다. 포지는 큰돈이 걸린 도박판에 초대를 받았지만, 거기에 갈만한 밑천을 모으지 못했다. 포지의 계획에 끌린 내쉬는 돈을 따면 반씩 나눈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도박자금을 대주기로 한다. 

소설은 여기서부터 신비롭고 우화적인(또는 ‘카프카적인’) 분위기를 띤다. 시간과 돈의 등가성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주제가 분명해지는 것도 이 지점부터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복권에 당첨되어 벼락부자가 된 뚱뚱이와 홀쭉이의 저택이다. 회계사였던 뚱뚱이는 그 뒤로도 계속 돈을 굴려서 더욱더 부자가 되었다. 그는 거만하고 말이 많은 유형이다. 골동품 수집이 취미인 그는 손님들에게 자신의 보물들을 자랑하면서 그 각각을 얼마 주고 샀는지 잊지 않고 언급한다. 한편 검안사였던 홀쭉이는 겸손하고 조용한 인상을 주지만, 알고 보면 더 음침하고 무자비하다. 그의 취미는 거대한 미니어처 도시를 만드는 것인데, 그는 작은 나무 인형을 깎아서 자기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 넣고 이 도시에 가둔다. 오스터가 여기서 자본가의 여러 유형을, 혹은 그들의 여러 속성을 풍자하고 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들의 탐욕과 지배욕,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더 갖고 싶어 하며, 어떤 것도 거저 주는 법이 없는 악착스러움과, 그들 자신은 불로소득을 얻었으면서도 타인에게는 노동과 질서를 강요하는 뻔뻔함을 말이다. 내쉬와 포지는 바로 이 사람들과 도박을 벌이며, 그 결과 돈과 자동차를 잃고, 자유마저 잃는다. 그들은 1만 달러의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을 때까지 그곳에 갇혀 노역을 하게 된다.

독서의 즐거움을 망치지 않도록 나는 줄거리에 대한 소개를 이 정도에서 끝내려고 한다. 다만 이 책의 주제(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언급하고 싶다. 이 소설은 시간의 수수께끼를 다루고 있다. 시간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단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시간을 살아갈 권리’를 얻을 수 없다. 이 시간은 누군가에 의해-아버지에 의해-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시간을 증여하는 존재다. 고대 로마에서 아버지가 인지하지 않은 아이는 노예가 되었다. 다시 말해 제 몫의 시간을 전혀 갖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타인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물론 아이들에게 시간을 증여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아이들은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하고, 빚을 갚으면서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우연의 음악』의 주제는 이렇듯 실존적이면서 정치적이다. 나온 지 30년이나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우리 시대의 이야기인 것처럼 읽을 수 있다. 

인류학자 김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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