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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비평: 빔 반데키부스 ‘블러쉬’를 보고
무용비평: 빔 반데키부스 ‘블러쉬’를 보고
  • 장인주 서울대
  • 승인 2003.10.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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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나올 수 없는 열정의 무대, 그리고...

장인주 / 서울대, 무용미학

벨기에 출신 최첨단 아방가르드 작가 빔 반데키부스가 ‘블러쉬’(Blush)로 첫 내한공연을 가졌다. 유럽의 최근 공연예술 경향을 제시한 이번 무대는 2002년 초연 이후 60회의 공연을 거치며, 다듬어진 연출을 통해 시종일관 열정과 긴장의 도가니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발산해왔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은 전에도 많이 있었지만, 반데키부스가 이끄는 울티마 베즈 무용단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가장 원초적이고, 자극적이며 육감을 동원한 예민한 지적이었다.


에우리디케 역을 맡은 연극배우와 나머지 무용수들이 관객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은 관객 스스로가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반추케 한다. 다섯 쌍의 남녀 출연자들은 작품 속으로 완전히 몰입해 광적으로 서로에게 경계와 두려움을 표한다. 사랑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며, 기쁨과 슬픔이 동반되며, 죽음으로 이끄는 통로일 뿐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동안 관객들은 지옥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고, 직접적인 표현의 연속장면을 보며 자연스레 자문한다.


‘코를 골며 깊이 잠든 남자와의 섹스도 사랑의 행위인가. 개구리를 갈아먹은 여인의 몸속에서 개구리의 인자는 살아남아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돼지먹이를 받아먹는 절름발이 에우리디케는 욕망의 분신에 불과했던가’


수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동물과의 추억이 많은 반데키부스는 이전에 발표한 다른 작품에서처럼 동물의 이미지, 동물의 움직임을 작품 속에 녹여내고 있다. 때문에 에우리디케의 입속에 살고 있던 개구리는 오르페우스를 상징하며, 돼지들의 이미지는 지옥의 인간을 묘사한다.


한편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야수들의 거친 동작과 흡사하다. 원시인을 연상케 하는 장대 올라타기 솜씨와 남녀가 뒤엉켜 펼치는 한 판의 듀엣은 몸싸움을 보는 듯하다. 날렵하고 강인한 에너지의 여자무용수들은 잘 훈련받은 여전사와도 같다. 그 중에서도 베트남계 프랑스 여자무용수 티마이 엔귀엔의 동물적인 눈빛과 발의 착지는 표범의 것처럼 날렵하고 예리하다.


관객과의 교감을 가장 중시하는 반데키부스의 안무철학에 따라 관객이 한시도 한눈팔지 못하게 하는 숨 가쁜 진행은 데이비드 유진 에드워즈의 흐느적거리는 록음악으로 잠시 숨 돌릴 틈을 찾으며 출연자들이 관객에게 다가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DNA를 얻기 위해 관객의 머리카락을 뽑아가고, 다른 관객에게는 ‘돈을 주면 노래나 춤을 보여주겠다’고 유혹한다. 에우리디케를 잃은 오르페우스의 허망함을 상징하는 담요를 객석으로 던지는가 하면, 에우리디케가 먹던 돼지먹이를 한 통 가득 객석으로 던지기도 한다. 단순히 욕구를 채우기 위해 짐승의 형상으로 추하게 변한 에우리디케를 찡그린 눈으로 지켜보는 관객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 순간 과자로 먹이세례를 퍼부은 것이다. 배우의 용감한 시도이고, 관객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대우다. 이렇듯 반데키부스의 관객과의 대화는 객석을 숨 가쁘게 오가며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무너뜨리는데 그 묘미가 있다.


긴박한 움직임들은 스크린에 비춰지는 돌고래수족관의 수중장면과 함께 서정적으로 전환된다. 무대 위의 무용수들이 번갈아가며 물속으로 뛰어들 듯 스크린 속으로 몸을 던지면, 영상 속엔 포말이 일고 무용수의 물속 유영 모습이 관객들을 맞이한다. 현실과 꿈, 지옥과 천국, 희망과 절망, 사랑과 죽음을 오가며 펼치는 황홀한 무대는 초현실 세계를 표현한다.


독일의 피나 바우쉬가 추구한 ‘탄츠 테아터’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여러 컨템퍼러리 댄스 안무가들의 ‘떼아뜨르 당쎄’와 같은 장르에 비교되는 반데키부스의 예술세계는 연극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기에 한 갈래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시도는 ‘댄스 시어터’라고 한 마디로 규정하기엔 부적합할 정도로 탈장르, 탈이미지, 탈환경을 추구하고 있다. 놀라운 테크닉으로 무대를 뒤엎는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필요한 매체를 총동원하는 거침없는 반데키부스의 연출은 충격과 서정미를 혼합한 퇴폐적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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