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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열전12 - 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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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20.01.03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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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를 향한 비폭력적저항… 우리나라 시인이 사랑한 셸리
피텔루 대학살
피텔루 대학살
왼쪽부터 함석헌(출처: ⓒ함석헌 기념사업회), 메리셸리, 퍼시바시 셸리
왼쪽부터 함석헌(출처: ⓒ함석헌 기념사업회), 메리셸리, 퍼시바시 셸리

우리나라 시인들이 사랑한 셸리의 <서풍>
셸리의 <서풍>은 함석헌을 비롯하여 김춘수, 나태주, 이기철, 송재학과 같은 많은 시인들이 좋아하고 자신들의 시에서 원용한 시다. 한편의 외국시가 이렇게까지 사랑받는 사례가 또 있을까. 누구나 아는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겠는가?”라는 마지막 구절이 특히 유명하다. 겨울로 상징되는 식민과 분단, 냉전과 독재 속에서 신음하던 민중에게 봄으로 상징되는 해방의 희망과 기쁨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함석헌이 즐겨 그 구절을 되뇌었을 것임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함석헌은 1924년 일본 유학 시절, 경제학 수업 시간에 마르크스주의자인 일본인 교수에게 그 시의 마지막 구절에 대해 듣고 잊지 못하다가, 그 몇 년 뒤 셸리 시집을 사보고 1937년 <성서조선>에 번역해 실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함석헌은 그 교수가 “정말 공산주의를 선전하잔 목적에서 한 것이라면 내 경우에서는 전연 반대의 결과를 낸 셈이니 교육해서 된다 할 수도 없다”라고도 회상했다.  
셸리 만년의 10여년(1812-1822) 동안 영국에서는 노동자 파업이 극심했다. 1812년에 흔히 기계파괴운동으로 번역되는 러다이트(Luddites) 운동을 시작으로 「서풍」을 쓰기 직전인 1818년 맨체스터에서 시작된 파업은 1819년 8월 피터 평원에서 선거권 확대를 요구한 6만 명 노동자의 집회에서 11명이 죽고 412명이 크게 다친 피털루(Peterloo, 나폴레옹에게 승리한 워털루 전투를 비꼰 말) 대학살로 이어졌다. 
따라서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겠는가?”에서 겨울은 자본과 권력의 폭압을 의미했고 봄은 노동자 해방을 상징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 시의 서풍이란 무엇보다도 억압자의 횡포를 파괴하는 무서운 겨울바람이자 고통을 당하는 피억압자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랑의 봄바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시는 카를 마르크스나 윌리엄 모리스를 비롯하여 많은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 특히 아나키스트들의 찬양을 받았다. 1819년에 셸리가 그 시를 쓴 이유도 그 해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벌어진 노동자 대학살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함석헌은 그 마지막 구절과 함께 “너 거센 정신이여, 내 정신이 되어라!”라는 구절을 두고 셸리가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셸리는 무신론자였다. 함석헌은 <서풍>이 셸리의 인생처럼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도 했다. 함석헌은 셸리가 서풍을 ‘예언자의 나팔’로 맹렬하게 불다가 지중해를 흔들어 새 시대의 앞길을 연다고 하며 자기를 일으켜 달라고 노래한 것이 “나를 몇 번이나 엎어진 데서 일으켜 주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함석헌은 셸리를 반항의 인간으로 이해하면서 “영국의 역사는 반항의 역사”이고 “하늘나라의 말은 아마 영어일 것”이라고 하듯이 “영어는 정신나라의 국어”라고도 했다. 
위 시를 썼을 때 셸리는 노동자를 억압하는 자본가들의 영국을 저주하며 영국에서 추방당하다시피하여 그곳을 떠나 이탈리아를 방랑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영국을 지배하는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여 살았고 시를 쓴 것이었지, 영국이나 영어 자체를 사랑해서 그런 시를 쓴 것이 분명 아니었다. 유럽의 낡은 전통이었던 지중해를 저주하고 영국, 그것도 대영제국, 영어제국을 새로운 시대로 맞아야 한다고 나팔을 분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셸리는 그런 대영제국, 영어제국이 표상하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거부한 사람이었고 <서풍>은 그런 거부의 시라고 보는 것이 옳다. 사회주의자들의 사랑을 받은 셸리는 사회주의자만이 아니라 성해방주의자나 채식주의자 등 여러 측면의 해방자로서의 위치를 가지며, 그 누구보다도 셸리를 중심으로 근대 서양의 반체제사상사가 전개되어 왔다. 
김춘수, 나태주, 이기철, 송재학 등의 시에서 서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이 셸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관련 문헌이 빈약하여 잘 알 수 없으나, 위에서 내가 설명한 셸리나 그의 시와는 상당히 다를 것 같다. 가령 나테주는 “오늘을 사는 나/ 어려움에 휩싸인 나/ 불안함에 앞날이 보이지 않는 나”에게 셸리의 서풍은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봄을 약속한다고 노래한다. 한편 김춘수의 서풍은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바람이다. 송재학의 서풍은 정혜사터에 세워진 13층 석탑을 흠뻑 맞으며 바라보는데 분 바람으로, 이기철의 서풍은 이별처럼 슬프고 아름다운 바람으로 노래된다.

셸리의 삶
함석헌은 자기가 셸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라고 했다. 셸리가 29세에 죽은 이유도 그런 정신 때문일 것이다. 그는 1792년에 영국의 소위 금수저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그의 고향에서 반노예 활동에 관여했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1790년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반노예무역 법안을 제정하기 위해 노력했을 정도로 진보적이었다는 점과 관련되었다. 그의 지도로 노예무역이 폐지된 해인 1807년에 그의 선거구 주민들은 특히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셸리의 가까운 가족 친구가 반 노예제의 선봉에 섰다.
셀리는 소위 명문교라는 이튼과 옥스퍼드를 다녔지만 이튼에서는 운동과 우정을 거부하는 외톨이로 ‘미친 셸리’라는 별명을 얻었고, 대학에서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그 뒤 그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금수저 명문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대학 시절에 쓴 「무신론의 필요성」에서는 신을 “앙심 깊고 가혹한 전능의 마귀‘라고 했다. 그는 <인권>의 저자인 토머스 페인과 <여권의 옹호>의 저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그리고 그의 남편인 윌리엄 고드윈을 존경했다.   
셸리는 19세에 16세 소녀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지만 5년 뒤 아내는 임신한 채로 자살했고, 아내의 자살 한 달 뒤 다시 16세 소녀와 결혼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부터 그 다른 소녀를 사랑했고 두 아들까지 둔 것이었다. 그때 셸리는 두 여인과 함께 셋이서 같이 살자고 말하기도 했으나 아내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살했다. 
둘째 아내가 된 소녀는 고드윈의 딸인 메리로 우리에게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 유명하다. 셸리가 1813년에 그녀를 만났을 때 그는 21세, 그녀는 13세였고, 3년 뒤 그들은 결혼했다. 셸리는 사랑 없는 동거는 부도덕이라는 신념 때문에 첫 아내를 버렸지만, 그 자신 부도덕한 인간으로 몰려 법원에 의해 자녀들에 대한 친권마저 박탈당했다. 셸리를 좋아한 함석헌은 셸리의 그런 삶을 ‘참된 셸리’가 태어나기 위한 고난이라고 보고, 그 결정적 계기를 본처의 죽음이라고 했지만 글쎄, 그것이 슬픈 일이기는 했지만 섭리적 고난 운운할 것까지는 아니지 않을까. 도리어 그는 가장 가부장적이고 위선적이며 제한적인 사회에서 성적 해방의 초기 챔피언이었고, 자신의 아내 메리 셸리를 포함한 여성 작가들을 지원했다. 
함석헌이 말하는 ‘참된 셸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셸리는 고드윈의 영향을 받아 1813년에 쓴 <여왕 메브>부터 현실을 비판했고, 1822년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그런 작품을 많이 썼다. 그의 작품을 출판하다가는 신성 모독 등의 이유로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한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출판계나 문단에서 외면을 받았고, 그래서 평생을 무명으로 지냈다. 특히 당대의 가정에서 셸리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이는 같은 낭만파 시인인 바이런이 모든 계급의 독자를 거느린 것과 대조적인 점이었다. 그만큼 그의 정치적 급진주의가 당대의 사람들에게 불편했다. 그러나 그의 시 대부분은 지하 출판을 통해 읽혀졌고, 구두 암송을 통해 공유되어 더 많은 청중에게 다가 갔다. 
셸리는 평생 사회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가령 1819년에 쓴 <개혁에 대한 철학적 견해>에서 셸리는 국채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지에 대해 분명하게 밝혔다. 그 당시 그것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큰 규모였다.  1815년에 이자는 37,500,000 파운드에 달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셸리는 공통의 합의에 맞서 싸웠고 은행가와 국가의 금융기관을 비난했다. 셸리 자신은 지주귀족 출신이었지만, 그들의 존재가 권력에 기초하고 그들을 '심각한 변칙'이라고 명명한 그는 그 계급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노동이 '생명의 전체 재료'를 창조 한 사람들에게 두 배의 부담을 안겨주는 다양한 형태의 귀족인 새로운 부유층의 부상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그들이 함께 하나의 계급인 '부자'를 형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또한 긴축과 전쟁 사이의 명확한 연관을 보았다. 국가부채는 미국 혁명가들과 프랑스 혁명가들에 대항한 “두 차례의 살인 전쟁에서 주로 계약되었다.” 빌린 돈은 노동계급의 삶을 더 좋게 만드는 데 소비될 수 있었다. 셸리는 영국의 대다수 사람들이 의식주가 형편없고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보았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실업률이 치솟고 전장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거리에서 구걸을 했다. “특권의 창백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계급의 조건은 오로지 가난에 허덕였고 “증가된 힘은 오로지 부자의 힘”일 뿐이라고 셸리는 썼다. 
셸리는 1812년부터 채식주의자로 살았고, 평생 비폭력주의자였다. 그는 또한 가톨릭 신자들이 영국 의회에서 벌인 연좌데모를 지지했지만 영국과의 통합법 폐지가 가톨릭 해방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아일랜드의 독립을 지지했다. 그는 부의 일부를 형제에게만 양도했지만 그의 누이들을 위해 부유한 토지 소유 계급의 일원으로서 상속 재산을 포기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셸리의 아나키즘
영국 비판이라는 셸리의 태도는 당시의 왕 조지 3세와 그의 여러 자식들을 맹렬히 비난하는 다음의 시 「1819년 영국」에 잘 나타난다. 그야말로 헬영국의 노래다.   

늙고 미치고 눈멀고 멸시받으며 죽어가는 왕.  
진흙 샘에서 나온 진흙처럼
따분한 핏줄의 찌꺼기로 
대중의 조롱 속에 흘러가는 왕자들. 
힘없는 나라에 거머리 같이 달라붙어
보지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지배자들.
피에 굶주린 그들은 때리지 않아도 곧 바닥에 떨어진다.  
버려진 들판에서 굶주리며 칼에 찔려 죽어가는 인민. 
자유를 죽이며 먹이를 구하는 군대가
휘두르는 칼은 모두가 양날의 칼. 
유혹하고 학살하는 황금빛 검붉은 법전.
그리스도도 신도 없는 종교-봉인된 성경.
의회-폐지 안 된 시대의 악독한 사생아,
모두가 무덤, 거기서 영광의 환영이 나와
우리의 폭풍의 나날을 비추리라. 

같은 해에 쓴 <영국인들에게>를 읽어보자.

영국인이여 왜 그대를 학대하는
왕을 위해 쟁기질을 하는가? 
왜 열심히 수고해 옷감을 짜
그대의 압제자들이 비싼 옷을 입게 하는가?

왜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대의 땀을 뺏고-아니, 그대의 피를 빠는
불쾌한 게으름뱅이들을 위해 
먹이고 입히고 아끼는가? 

(…)

그대가 뿌린 씨앗을 다른 놈이 걷어간다.
그대가 찾은 부를 다른 놈이 가진다.
그대가 짠 옷을 다른 놈이 입는다.
그대가 버린 무기를 다른 놈이 지닌다.

씨를 뿌리되 그 어떤 폭군도 갖지 못하게 하라.
부를 찾되 그 어떤 사기꾼도 갖지 못하게 하라.
옷을 짜되 그 어떤 게으름뱅이도 입지 못하게 하라.
무기를 버리되 그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녀라.

(…)

쟁기와 삽과 괭이와 방직기로
그대의 무덤을 따라가 무덤을 지어라
그리고 그대의 수의를 짜라, 그 잘난
영국이 그대의 무덤이 될 때까지! 

셸리는 「맵 여왕(Queen Mab)」에서 “복종은/모든 창조적 재능과 미덕, 자유, 진리의 독으로/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인간의 몸을/기계화된 자동장치로 만든다“고 노래했다. 그 후 셸리는 그의 혁명적 성격이 더욱 뚜렷이 부각된 장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나 「아나키의 가면」,  「영국의 남자들」과 같은 작품들을 썼다. 「아나키의 가면」에서 셸리는 대중의 숫자가 많기 때문에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다고 노래했다.

잠에서 깬 사자처럼 일어나라 
정복되지 않을 압도적인 무리로
잠들었을 때 그대들에게 씌워진
속박을 이슬처럼 땅에 털어내라
그대들은 많고 그들은 적다.

“고귀한 영혼의 인간은/ 통치하지도, 복종하지도 않는다”고 노래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 3막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증오스러운 가면은 벗겨졌다. 인간은
홀(忽)도 없고 자유로우며, 제약에서 벗어나
평등하고, 계급이나 파벌도 없고 국가도 없으며,
경외감, 숭배감, 지위로부터 면제되어 자신의
왕이 되고, 정의롭고, 친절하며, 현명하게 된다.

함석헌이 논의한 바는 없지만, 셸리는 본능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폭력에 반대했다. 셸리는 「권리선언」이라는 짧은 글에서 아무리 부당한 법이라고 해도 개인적으로 저항해 공공의 평화를 방해할 권리는 없지만, 그 폐지를 위해 이성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아일랜드 인민에게 고함」에서 아일랜드 민중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면서도 폭력에는 반대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도 그는 그 의도를 찬양하면서도 폭력화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그래서 셸리는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이상적인 존재라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셸리가 비폭력주의자임을 확인하면서도 인민에 대한 무한한 신뢰보다도 뛰어난 위인들에 의한 변화를 추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19세기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고, 금수저 엘리트 출신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다.     

셸리의 영향과 평가
시인 셸리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여기서 적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특히 로버트 브라우닝이나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를 비롯하여 라파엘전파의 시인들이나 에드가 알란 포, 오스카 와일드, 토마스 하디, 조지 버나드 쇼, 톨스토이, 버틀런드 러셀, 예이츠, 업톤 싱클레어, 이사도라 던컨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발터 베냐민, 베르톨트 브레히트,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같은 좌파에게도 셸리에 매료되었다.   
셸리의 정치사회사상은 차티스트를 비롯하여 수많은 정치사회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의 경제와 도덕 이론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칼 마르크스는 셸리를 ‘본질적으로 혁명가’이고 ‘항상 사회주의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80년대에 엘레노어 마르크스와 대화하면서 1840년대를 언급하면서  모두가 셸리를 어떻게 알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셸리의 <맵 여왕>은 ‘차트리스트’ 성경이라고 불렸다.
셸리의 비폭력 저항에 대한 초기 저술은 톨스토이와 소로,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을 비롯한 비폭력 저항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간디는 셸리의 <아나키의 가면>을 종종 인용했다. 그는 그 마지막 구절인 “만약 폭군들이 감히 그러겠다면 / 그대들이 있는 그곳에 말을 타고 달려와, / 후려치고, 찌르고, 불구로 만들고, 자르라 하라”뿐만 아니라, 권유의 말인 “침착하고 결연하게 그대들은 서 있다”를 낭송했다. 무엇보다도 셸리는 인간의 평등이 자연 상태라고 믿었다. 그는 시대보다 앞서 갔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평등한 계급 사회에서 일하고 있으며 여전히 인종주의, 착취, 성차별 속에서 살고 있다. 특히 빈부격차는 지난 50년 동안 그 어느 때 보다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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