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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열전9 - 윈스턴리
박홍규의 아나키스트열전9 - 윈스턴리
  • 교수신문
  • 승인 2019.12.0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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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리를 아시나요?
제러드 윈스턴리(Gerrard Winstanley, 1609~1676)를 아시는가? 세계사나 유럽사는 물론 영국사 책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그를 아시느냐고 묻는 게 실례일지 모르겠다. 내가 찾아본 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나오는 영국사 책은 나종일과 송규범이 함께 쓴 <영국의 역사>뿐이다. 그러나 천 쪽이 훨씬 넘는 그 책에는 윈스턴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딱 두 문장만 나온다. 즉 평등을 주장한 수평파에 대한 설명 뒤에 “그들은 진정한 수평파(True Levellers)라고도 불린 이른바 밭갈이파(Diggers)와는 구별되었다. 제러드 윈스턴리를 지도자로 하는 밭갈이파는 장원제도와 지주제를 전면 폐지하고 토지를 공동 경작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들은 일종의 농업공산주의를 목표로 했던 것이다.”(376-7쪽) 이어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에 대한 긴 설명이 나온다. 

영국에서 나온 책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로 윈스턴리를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대단한 권위를 인정받는 옥스퍼드판 영국사도 마찬가지다. 유일한 예외는 레슬리 모턴(Leslie Morton, 1903~1987)의 <영국 인민의 역사>(A Peoples’s History of England, 1938)인데 그 책은 영국 최초로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쓴 영국통사인 만큼 윈스턴리를 상당히 상세하게 설명한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하워드 진은 미국에서 그 책을 잇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모턴의 그 책은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E. P. 톰슨이나 에릭 홉스봄과 같은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의 책이 많이 소개되었지만 그들은 영국통사를 쓴 적이 없고 대체로 18세기 이후의 근대사를 썼다.       

이런 사정은 윈스턴리가 17세기 영국에서 한 때의 극단적인 반역을 꾀한 범죄자로 처벌되어 금방 잊혔다가 2세기가 더 지난 1895년에 와서 독일의 사회주의자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 1932)이 그의 가방을 영국박물관에서 발견하고서 그를 사회주의의 선구자로 본 곡절로 충분히 이해된다. 윈스턴리의 전집은 1940년대에 와서야 간행되었고, 그의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70년대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19세기말의 ‘발견’ 이전에 윈스턴리와 그가 이끈 디거스운동(위에서 보았듯이 나종일 등은 이를 ‘밭갈이파’로 번역하지만, 디거스는 보통 17세기 영국의 농민반란을 뜻하므로 디거스라고 표기하겠다)은 의회민주주의 발전에 장애가 된 급진주의자들의 히스테릭한 난동 정도로 폄훼되어 자유주의자는 물론이고 마르크스나 엥겔스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윈스턴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후배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멋대로 바꾸었다는 의미에서 수정주의자라고 욕한 베른슈타인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데 그가 윈스턴리를 발견했다고 해도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특히 ‘반공’이 지배적인 한국에서 그러했다.  

존 로크
존 로크

윈스턴리는 우리가 아는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고, 로크(John Locke, 1632~1704)보다는 한 세대 앞 사람이다. 일개 포목상에 불과했던 윈스턴리가 홉스나 로크를 직접 알기커녕 그들의 책을 읽었다는 정보도 없다. 디거스는 물론이고 수평파의 인민주권사상도 거부하고 가장 좋은 통치형태가 절대군주제라고 주장한 홉스는 영국에서 장기의회가 결성되자 프랑스로 도피 생활을 떠나기도 했다. 반면 로크는 의회제도를 다수의 의지에 따라 활동해야 하는 국가의 가장 우수한 제도라고 주장했으나, 그가 ‘다수’로 본 것은 부르주아지와 귀족일 뿐, 본질적으로 시민대중과 단절된 의회의 다수를 뜻했다. 홉스나 로크에 대해서는 엄청난 문헌이 쏟아져 나오는 반면 윈스턴리는 여전히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75년 미국에서 케빈 브라운로우 감독의 영화 <윈스턴리>사 제작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상영되지 못했다.  

 

 

‘디거스의 노래 : 뒤엎어진 세상’   
디거스는 1649년에서 1650년 사이, 영국의 ‘성 조지’라 불리는 작은 언덕에 농사를 지으러 모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19세기에 그들의 삶을 다음과 같은 노래로 만든 것을 20세기 아나키스트 록밴드인 첨바왐바(Chumbawamba)가 불러 유명해졌다. 

1649년 
성 조지 언덕 
디거스라는 남루한 집단이 
인민의 의지를 보이려 나타나 
지주에게 도전하고
법에 도전했어 
디거스는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 
자신들의 땅을 반환하라고 요구했어 
 
그들은 말했어. 우리는 평화로웠고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려 
공동의 땅에 일하러 왔어 
황무지를 갈려 왔어 
이 갈라진 땅을 
우리는 완전한 하나로 만들 거야 
땅이 모든 사람을 위한 공통의 보물창고가 되도록 
 
우리는 경멸해 
재산이라는 죄악을
사적으로 갖기 위해 땅을  
사고 팔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어 
도둑질과 살인으로 
그들은 땅을 취했어 
그들의 명령에 이제 사방에서 장벽이 세워지고 있어 
 
그들은 법을 만들어 
우리를 꽁꽁 묶어두려고 
성직자들은 천국으로 우리를 유혹해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저주해 
그들이 섬기는 신 
부자만 배불리는 탐욕의 신을 
우리는 경배하지 않을 거야
반면에 가난한 이들은 굶주리고 있어 
 
우리는 일해, 우리는 함께 먹어 
우리에겐 어떤 무기도 필요 없어 
우리는 주인들에게 절하지 않을 거야 
지주에게 지대를 내지도 않을 거야 
우리는 자유인이야 
우리는 비록 가난하지만 
영광을 위해 모두 일어섰어 
 
이제 일어서라 
재산가들의  
명령이 떨어졌어 
그들이 용역과 군대를 보냈어 
디거스의 요구를 묵살하고 
디거스의 오두막을 무너뜨리고 
디거스의 곡식을 파괴하고 
그들은 흩어졌고 오직 비전만이 남았어 
 
너희 가난한 이들은 용기를 가져라 
너희 부자들은 조심해라 
땅은 공통의 보고로 만들어졌어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만물은 공유이며 
모든 사람은 하나야 
우리는 평화로웠어 
그들을 해치우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첨바왐바ⓒSchorle/wikipedia | CC BY-SA 3.0
첨바왐바ⓒSchorle/wikipedia | CC BY-SA 3.0

 

영국혁명
노래의 처음에 나오는 1649년은 당시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된 해였다. 그 때 디거스는 영국의 시민전쟁이란 왕과 대토지소유자들에 맞서 싸운 것이니 왕이 처형된 마당에 토지는 마땅히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땅을 갈고 씨 뿌릴 준비를 하며 디거스는 대토지소유에 반대하고 재산공유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지배집단은 디거스를 용납하지 않았다. 

17세기 초 영국혁명은 왕과 의회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즉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스튜어트왕조의 초대왕인 제임스1세가 등장하고부터였다. 왕은 그 앞의 왕등처럼 자신이 그 자리를 신으로부터 받았다(이를 왕권신수설이라고 한다)고 주장했지만, 의회는 왕권도 법으로 제약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탓이었다. 1625년에 즉위한 찰스 1세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1642년에 내전이 터졌다. 

의회 의원들은 '젠트리'라고 불리는 지주, 명문가, 부유한 상인들이 중심이었지만, 국왕군과 맞선 의회군의 주역은 그들만이 아니라 자영농, 소작농, 소상공인 등 많은 평민들이 주축이 되었다. 물론 국왕군도 평민을 동원했지만, 의회군의 평민은 많은 수가 자발적으로 입대했다는 점이 달랐다. 평범한 젠트리 출신의 퓨리턴주의자인 푸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유명한 '철기군'(鐵騎軍)이 대표적이었다. 그 군대는 “무찌를 수도 흩뜨릴 수도” 없다는 이유에서 붙은 별명이었다. 철기군은 뒤에 신형군(New Model Army)으로 확대되었다. 크롬웰은 17세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풍운아로 평가되어 왔다. 그에 비견되는 사람은 18세기 프랑스의 나폴레옹이었다. 

의회군이 국왕군을 이기자 평민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졌다. 의회파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친 왕 찰스 1세를 붙잡아 런던에 구금했다. 젠트리들은 "재산이 있는 자가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평민들은 달리 생각했다. 그들은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수평파'라고 불렸다. 신분과 재산을 평등하게 나누고 함께 참여하는 공화국, 그것이 수평파의 이상이었다. 그래서 '성인 남성 모두의 보통선거권', 종교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요구했고, 채무를 이유로 한 구금에 반대했으며, 토지 독점에 반대했다. 이러한 요구에 젠트리들은 놀랐다. 

1649년 1월 30일, "신이 내린 권한을 인민을 억압하고 살해하는 데 오용한" 찰스 1세가 의회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 뒤 크롬웰이 공화정의 독재 권력을 잡아가면서 수평파와 싸울 즈음인 1649년 5월, '디거스'가 나타났다. 그들은 런던 남서쪽 교외의 월튼 온 템즈 부근에 있는 성 조지 언덕에서 모범적인 공동체 생활을 했다. 버려진 황무지에 콩을 심고, 경작을 하기 시작한 그들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았고, 토지세를 내는 것도 거부했다. 그들은 사유재산을 부정했다. 특히 토지의 사적 소유란 "공동의 땅을 빼앗아 울타리 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토지의 사적 소유에서 모든 전쟁과 도둑질과 폭력이 비롯된다고 믿었다. 

윈스턴리 영화 한 장면ⓒmorningstaronline
윈스턴리 영화 한 장면ⓒmorningstaronline

윈스턴리가 이끈 디거스는 영국의 토지가 인민의 것이므로 공산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 정복왕(William I, 1028?~1087)이 “영국인으로부터 천부적 권리를 뺏고, 영국인들이 어쩔 수 없이 그의 부하가 되도록 강요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1642년부터의 내전은 인민이 정복자를 재정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디거스는 6세기만에 맞은 정치적 재정복의 완성은 사회혁명이 없이 불가능하고, 그렇지 않으면 군주정의 본질을 그대로 남긴다고 비판했다. 

디거스의 활동은 공화정 정부를 놀라게 했고 지역 지주들의 반감을 샀다. 법적인 탄압은 물론이고 고용된 패거리(요즘말로 용역)와 군대까지 나서 아이나 어른에게나 폭력을 행사하고 집을 불사르고 경작물을 파괴했다. 모욕당하고, 체포되고, 감금당하면서 디거스는 결국 1650년 3월 말경 폭력으로 해산됐다. 디거스가 황무지를 일구어 만든 땅에 자기 가축을 몰아넣고 폭도들을 동원해 집을 부수고 여성과 아이들까지 내몬 사람은 지주이자 성직자였다. 1650년 4월 1일, 윈스턴리와 14명의 디거스는 불법 집회, 침입, 공안방해를 이유로 기소됐다. 윈스턴리는 항의했다. "태어남과 동시에 내게 주어진 땅을 이용할 자유를 빼앗은 자들이 도둑인가, 아니면 그 땅에 살며 생계를 잇기 위해 그것을 경작한 내가 도둑인가?" 그러나 디거스는 쫓겨났고, 비슷한 시기 수평파 세력도 크롬웰이 보낸 기병에게 패해 지도부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리고 9년 뒤에 왕정복고가 이뤄져 1660년 찰스 2세기 등장하고 내란에서 의회파를 이기게 한 신형군도 해산 당했다. 과거에 몰수당한 토지가 국왕과 주교들에게 반환되고, 자유주의와 급진주의도 사라진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그 뒤에도 계속 재현되었고, 수평파의 주장은 1688년의 명예혁명 시기에 로크를 통해 다시 자유주의로 부각되었다. 한편 디거스의 주장은 19세기에 와서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다시 나타났다. 

 

윈스턴리의 아나키즘 
디거스를 이끈 윈스턴리가 쓴 팸플릿인 ‘새로운 정의의 법’(1648)에서 “함께 일하라, 함께 빵을 먹어라”라고 주장하면서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는 특별한 재산은 인민에게 모든 고통을 가져다주었다고 비판했다. 즉 재산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훔치게 만들었고, 훔친 사람들을 처형하는 법을 만들었으며, 사람들에게 악마의 행동을 하도록 유혹하고 그런 일을 했다고 사람들을 죽인다고 했다. 이어 ‘잉글랜드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 선언’(1649)에서는 “땅은 신분과 관련 없이 모든 사람의 공통 생계를 위해 창조되었”으니 “대지와 그 수확을 서로 사고파는 것은 가증스러운 짓이고, 애초 전쟁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하고 “예나 지금이나 살인하고 훔치는 무력의 힘이 정부를 세웠고 그 정부를 지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수평파의 진보된 기준’(1649)에서는 “경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일단 지주인 자는 출세하여 판사, 지배자, 장관이 된다.”고도 비판했다.  

그리고 ‘의회와 군대를 위한 새해선물’(1650)에서는 진정한 종교와 순수함 정복자들의 힘으로 보통 사람들에게서 빼앗아간 땅을 되돌려놓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억압받는 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왕권이 법을 세우고 정부의 통치가 이를 지키는데 법은 정의인 척 하지만 억압하는 무력을 온 힘으로 지탱하는 것이고 그 자식인 재산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법은 누구에게는 울타리를 쳐서 토지를 갖게 하고 누구는 토지 밖으로 내몰아 일부 사람에게는 토지를 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토지를 부인하는데 이는 정의의 법에 반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부분의 법률은 빈민을 부자의 노예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고 그럼으로써 억압을 유지하며 재산을 엄중하게 수호한다고 비판했다.  

윈스턴리 목판화<br>ⓒwigandiggersfestival<br>
윈스턴리 목판화
ⓒwigandiggersfestival

 

윈스턴리는 1652년에 쓴 <자유의 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누구도 부자일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노동에 의해서나 또는 그를 돕는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인해서 부유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람이 이웃에게서 어떤 도움도 얻지 못한다면 결코 일 년에 수백 수천의 재산을 모을 수 없다. 타인이 그가 일하도록 도왔다면 그 재산은 그 사람의 것일 뿐 아니라 그 이웃의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노동뿐만이 아닌 타인들의 노동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부자들은 편하게 살고, 타인의 노동으로 먹고 입는다. 이는 그들의 수치이지 고결함이 아니다. 받는 것 보다는 주는 것이 더 축복받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들은 노동한 사람들의 수고로부터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받기만 하는 것이고, 부자들이 주는 것이란 자기의 노동이 아닌 타인의 노동을 양보하는 것이다.”  

이처럼 디거스는 사유재산, 특히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 소유를 모든 전쟁, 유혈, 도둑질과 인민을 비참하게 만들고 노예화시키는 법률의 원인으로 보았다. 사유재산의 부정은 평화주의로 직결되었다. 윈스턴리는 “전쟁이 부자를 더 부자로,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들며 권력의 동맹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꿰뚫어 보았다. 

디거스의 사유재산 없애기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들이 받는 숱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디거스 자신들은 폭력 사용을 거부했다. 디거스는 공유지와 황무지를 경작하는 것이 허용되기만 한다면, 영국의 모든 빈민들이 자신들의 실험을 따를 것이라 믿었다. 자신들이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면 전 영국 사회에 스며들 것이고 전 유럽도 그러할 것이고, 결국에는 부자들과 권력자들도 자신들에게 합류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폭력이 아닌 자신들의 ‘실험’과 ‘보기’로서 그렇게 될 것이라 믿었다. 

윈스턴리는 아나키즘 이론의 개척자인 동시에 선구적 실천가였다. 그들의 공동체가 와해된 후 윈스턴리는 생사가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졌으나 그의 이론은 영국 프로테스탄트의 전통을 이루었으며 뒤에 톰 페인과 윌리엄 고드윈의 저작 속에서 본격적인 아나키즘 이론으로 꽃을 피웠다. 나아가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기독교적 전통과 결합된 소박한 평등주의 공동체운동인 로버트 오원이나 페이비언협회 등과 같은 영국 특유의 점진적 사회주의 실험의 효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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