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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혁명을 생각한다
민주주의 혁명을 생각한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11.15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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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명철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가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4년 만에 완간했다. 이에 교수신문은 주명철 교수에게 직접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의 집필 계기와 과정 속 뒷 이야기, 소회 등을 청해 듣는다. 편집자 주

주명철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주명철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10월 마지막 주에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의 마지막 두 권을 발간했다. 정년퇴임한 2015년 말부터 만 4년만의 일이지만, 사실 준비 기간부터 따지면 10년의 작업이었다. 그 뒷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서양사 학계의 원로이신 이광주 선생님은 내 첫 저서인 ‘바스티유의 금서’(문학과지성사, 1990)를 읽고 좋게 평해주신 뒤부터 내게 글을 쓰는 의욕을 불러 일으켜 주셨다. 이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혁명사를 번역본으로 읽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며 내게 프랑스 혁명사를 써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셨다. 이 선생님의 말씀과 큰 출판사 대표가 대작을 마음껏 써도 출간할 의사가 있다고 해준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그 때부터 작품의 얼개를 구상하고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2010년 언저리였다. 첫 권부터 좀 극적인 제목을 달아서 써보았는데, 그것이 ‘루이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였다. 결국 이 원고는 여문책 출판사에서 발간한 제8권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작업에 문제점을 발견했다. 사료를 읽고 정리하고 글을 쓰는 벅찬 일을 체계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앞에서 한 얘기를 잊어버리고 다시 할 가능성이 있었고, 제목을 정하고 내용을 배치하는 일만 가지고도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에, 대작을 쓰기는커녕 첫 권부터 후회만 하고 좌절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시간 순으로 정리하여 작은 책을 먼저 썼다. 나는 역사교사모임의 조한경 선생에게 학생들과 함께 원고를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름이나 장소가 낯설긴 해도 대체로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답을 듣고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소나무, 2013)을 내놓았다. 그렇게 해서 내가 쓸 수 있는 프랑스 혁명사의 내용과 순서를 정하기 쉬워졌다.

230년 전에 시작한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나는 우리나라의 독자가 아는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했고, 결국 나 자신이 혁명을 겉핥기식으로 알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개설서가 아무리 두꺼워도 중요한 인물이 어느 사건이 일어날 때 했던 말, 그것도 긴 연설에서 일부만 전하고, 중요한 법과 사회 구성원들의 반발에 대해 단편적으로 설명하고 지나간다. 프랑스의 학생들은 중고등학교에서 역사시간에 다양하게 이야기를 듣고 읽으면서 친숙하지만, 현대 한국인은 개설서 한 권으로 거기서 추린 이야기만 단편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서양사에 뿌리내린 식민사관도 문제였다. 내가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중고등 세계사 교과서에서 느낀 문제는 무엇보다도 일본의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 교과서의 주요 개념을 한자로 표기한 뒤 일본 교과서와 비교하면 당장 알 수 있는 문제다.

그래서 목표가 확실해졌다. 1차 사료에 충실하면서 프랑스 혁명기 사람들의 언행을 보여주는 내용, 그리고 일본에서 가져온 용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바로 잡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구체제의 모순”에서 찾는 사관의 문제부터 바로 잡아야 했다. 새 체제를 만드는 혁명가들이 과거와 결별하면서 ‘구체제’를 발명했다, 그것도 모순투성이로. 그러나 ‘구체제’를 몽땅 버려야 하는가? 혁명가들이 구체제의 산물이었는데? 계몽주의 사상도 구체제의 산물이었고, 절대왕권에 대한 비판도 구체제에서 시작했는데?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이 거부한 구체제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을 낳은 구체제를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1권의 주요 내용이 구체제를 다각도로 이해하자는 취지를 담은 이유다. 그리고 삼부회라 알려진 전국신분회는 국민의회로 변신한 뒤 법적 혁명을 일으켰으니 그 과정에서 혁명의 출발점을 정할 수 있겠다. 특히 3신분 대표의 구성 원칙과 의결방식이 관건이었다. 제3신분 대표를 성직자·귀족의 대표만큼 뽑도록 허락했지만, 신분별 투표를 고집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수(數)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0부작의 내용을 일일이 짚기 어렵기 때문에 문제의식만 짚자면, 10부작을 관통하는 열쇠 말은 ‘민주주의’다.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혁명을 가르치기 시작할 때부터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화두가 중요했다. 그러나 아주 역동적인 혁명을 어떻게 하나의 개념에 묶어둘 수 있을까? 더욱이 하나의 개념을 앞세운다면 계급과 관련한 개념도 중요하지만, 더욱 포괄적인 개념을 찾을 수 없을까? 솔직히 말해서, 처음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도 1789년부터 일어난 혁명이 프랑스 민주주의 발전의 첫 단계였다고 확신하면서, 그러한 관점에서 특히 제헌의회부터 국민공회의 활동을 소개하려고 애썼다. 법을 제정할 때의 사회적 분위기, 의원들의 주장과 반박을 최대한 반영하였다. 그래서 독자가 기대하던 내용과 달리 의원들의 연설을 들으면서 지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날 국회의원들이 위원회에서 하는 언행과 대 정부질문, 그리고 장외활동에서 보여주는 품위가 아주 흥미롭기 때문에, 나와 같은 취향의 독자를 기대하면서 썼다. 

18세기 말, 혁명기의 프랑스 민주주의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유권자를 능동·수동 시민으로 구별하다가, 상퀼로트가 정치무대에서 발언권을 얻으면서 능동·수동의 구별은 없어졌다. 그렇게 시민의 수가 늘어났지만, 투표율은 낮았다. 더욱이 여성이 비록 호칭상 ‘여성시민’(citoyenne)이라 불렸지만, 실은 시민(citoyen)의 아내와 딸에 머물렀으니 민주주의가 갈 길이 얼마나 멀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의원들은 열심히 일했다. 제헌의원들에게 사명감이 없었다면 어떻게 1,000년의 뿌리를 가진 구체제(앙시엥 레짐)를 타파하는 ‘입헌군주제 헌법’을 만들 수 있었을까? 1789년 8월 하순의 ‘인권선언’부터 1791년 9월 중순의 왕의 헌법준수 맹세까지 2년 동안 제헌의원들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들 가운데 아주 수준 높은 연설로 인권을 설파한 사람들은 혁명이 급진화하는 과정에서 탄압을 받는 대상으로 전락하는 일도 있었다. 급격한 변화와 장기적 변화의 변증법인 혁명은 이처럼 3, 4년에 걸쳐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를 실험하다가 곧바로 공화제를 채택하면서 한 때 동지였던 사람들까지 억압하는 공포정으로 넘어가 민주주의를 질식시켰지만, 독재적인 수단을 행사하는 방법도 민주주의적인 방법이었음은 역설이라 할 수 밖에 없다.

10부작을 발간하는 동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도 큰 변화를 겪었고, 지금은 ‘촛불혁명’에 대한 수구세력의 저항이 극에 달했다. 2015년 말에 첫 두 권을 내놓을 때만 해도, 대학생들이 겨울에도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을 지키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가 근대화했다고 주장하고 5.16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정교분리·산업화·합리화·민주주의를 모두 이루었을 때 근대화했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과연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였던가? 군국주의 일본이 산업화했다고 근대화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군국주의 일본이 다른 나라를 근대화할 자격이 있으며, 설사 일본 덕에 산업시설을 갖추고 산업일꾼이 생겼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근대화했던가? 민주주의를 실현한 사람들이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었던가? 3.1민주혁명, 4.19혁명, 5.18민주항쟁과 6월항쟁의 주역들이 독재자였던 적이 있었나? ‘촛불혁명’은 어떠한가? 나는 10부작을 한 권씩 발간할 때마다 한국의 민주주의의 위기와 극복과정이 프랑스 혁명과 겹치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각 권의 첫 머리에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해 정리했다. 역사가는 과거를 재구성하는 일과 함께 자기가 사는 시공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9권에서는 ‘식민사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구체제를 몽땅 거부할 수 없듯이, 일본학자들이 번역하고 만든 학술용어 덕택에 우리의 학문이 발전했음을 통째로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서둘러 만들다가 본질에서 벗어난 결과를 낳은 용어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바꿔야 한다. 대표적인 술어 두 가지만 얘기하겠다. 성직자민사기본법(聖職者民事基本法)과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가 엉뚱한 창조임을 지적한다. 앞의 용어에 대해서는 지금 일본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쓰는 사례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 가져온 용어를 바꾸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일본에서 이 낱말을 처음 번역하는 사람이 얼마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고 애썼는지 헤아려 보았다. ‘헌법’을 기본법이라고 해야 하는 심정은 절박했으리라. 혁명 전 프랑스에는 왕국의 기본법(lois fondamentales)이 있었다. 그런데 헌법(Constitution)을 헌법이라 부르지 않고 기본법이라니. 사료를 읽지 않고 서둘러 번역하는 사람은 1791년에 헌법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1790년에 Constitution civile du clerge라는 ‘헌법’이 나오니, 이것이 절대로 헌법일 수 없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사전에서 헌법과 다른 정의를 찾았다. 우리의 원로 학자는 일본어로 혁명사를 읽다가 그것을 ‘발견’했다. 남이 창조한 낱말을 발견만 하면 쓸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공안위원회도 마찬가지다. 번역자는 사료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사전과 영미권의 번역을 참고하다가 ‘공안’을 추론할 수 있는 ‘Public Safety’를 찾았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나는 9권에서 관련 사료를 제시하면서 이 번역을 ‘구국위원회’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자세히 밝혔다. 영어 번역도 미흡하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일본인이 Safety를 보면서 ‘구원’을 추론하지 못했음이 아쉽다. 영어권과 일본의 번역자는 사료를 읽고, 위원회를 설치하는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번역을 하지 않고 ‘발견’만 한 우리의 번역자와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공안위원회학파’가 있음이 안타깝다. 그들이 고집스럽게 학파의 명맥을 이어가는 한 불필요한 정신력만 낭비하게 될 것이 뻔하다. 10부작을 통해서 부족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변곡점이라 할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까지 다루면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함께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반대자들을 민주주의 정신으로 대하고 있는 현 정부를 보고, 그럴수록 야만의 언어로 조롱하고 저주하면서 본성을 드러내는 반대자들을 보면서, ‘촛불혁명’이 일어나기 전 상황의 연장선을 상상하고 몸서리를 친다. 다행히 우리는 ‘촛불혁명’으로 품위 있는 시대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새로운 한류라 할 ‘촛불혁명’을 연착륙시켜야 하는 시점에서 10부작을 무사히 마쳐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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