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11-12 14:07 (화)
[북소리] 시간 앞에서 다시 좌절하다
[북소리] 시간 앞에서 다시 좌절하다
  • 교수신문
  • 승인 2019.09.05 17: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저 | 이상원 역 | 황소자리 |
지평님(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삶을 사랑하고, 삶에 충실했으며, 어떻게 해야 자기 앞에 주어진 삶에 부끄럽지 않을지 평생을 두고 성찰했던 사내. 명민함을 타고 났지만 인간이므로 맞닥뜨리는 한계와 나약함은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불가해한 난제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시간이었다. 스물여섯 살, 시간의 무자비함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던 젊은 과학자는 남다른 시도를 했다. 자신이 사용하는 시간을 철저하게 기록해 분석하는 ‘시간 통계’ 노트를 작성하기로 결심했다.

시작은 평범했다. 20세기 초 야심 찬 젊은이들이 그랬듯 그 역시 영웅적인 성과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우리 삶의 충일한 행복은 특출난 존재가 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기보다 세상 속에 묻혀 조용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완성하는 쪽에 있다는 것을…. 그의 비범함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애초 학문 연구는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과 시간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이 꼼꼼하게 작성한 시간 노트 분석을 통해 일찌감치 알아챈 것이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잘 먹고 푹 자는 데 그는 하루 12시간을 썼다. 나머지 시간은 어떻게 썼을까? 연구를 하다 지치면 산책하고, 돌아와 논문을 쓰다 단테와 셰익스피어를 읽고, 다시 동료에게 편지를 쓰거나 뜨개질을 하는 식으로 시간을 활용했다. 얼핏 평범한 듯 보이지만 그에게는 나쁜 시간이나 빈 시간, 허송세월하는 시간이 없었다. 그는 자신 앞에 주어진 시간을 단 1분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 언젠가 한 동료가 왜 그 귀찮은 작업을 계속하느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이 방법이 내게는 너무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서 이제 나는 시간통계표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되었다네.” 말하자면 그에게 시간은 눈에 보이는 물질과 같았다. 이렇게 시간을 인식하면서 그에게는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더 넘쳐났다. 

1972년 8월 31일, 소련의 과학자인 알렉산드르 알섹산드로비치 류비셰프가 82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원고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70여 권의 학술서적과 단행본 100권 분량에 달하는 연구논문, 그보다 방대한 양의 학술자료와 꼼꼼하게 수제본한 수천 권의 소책자들이었다. 더욱이 속속 밝혀지는 류비셰프의 학문적 성취, 철학과 역사 등을 전방위로 넘나들며 해박한 논리를 펼쳐낸 독창적 이론에 학계와 지식인들은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후 개최된 토론회에서 사람들은 이 독특한 인물을 한 마디로 규정하지 못해 절절 맸다. 누군가는 그를 생물학자라고 했고, 누군가는 곤충학자 혹은 역사학자라고 했다. 칸트에 필적하는 철학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진화론과 유전학 연구를 분석한 일단의 학자들은 류비셰프야말로 이 시대의 혁명가라고 단정지었다.

나는 이 기이한 인물의 생애를 1990년대 초에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라는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중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은 어느 학자가 한국어로 중역해 소개한 것이었다.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류비셰프의 이야기를 정식 계약한 책으로 다시 출간하고 싶었다. 2003년 가을, 지인에게 이 책의 저자인 다닐 A. 그라닌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1919년생인 다닐 그라닌은 과학자이자 저술가, 교육자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970년대에 출간한 자신의 책을 기억하고 연락을 해준 한국의 편집자가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란 듯했다. 우리가 5년 단위로 갱신하는 일반 계약서를 내밀었을 때, 그라닌은 이 책의 한국어 판권을 영원히 황소자리 출판사에 양도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황소자리의 첫 책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에 얽힌 이야기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라닌 선생을 만나서 류비셰프에 얽힌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러다 몇 달 전 이 책의 개정판을 내기 위해 그이와 다시 접촉을 시도했다. 아뿔사! 재작년 여름, 9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류비셰프의 삶을 그토록 동경했지만, 나는 여전히 시간 앞에서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