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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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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송우 부경대
  • 승인 2003.09.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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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려간 세월, 성찰의 시인들

남송우 / 부경대, 국문학

소위 시의 시대라고 하던 1980년대를 거쳐오면서 전위적인 자리에 있던 시인들의 시세계는 지금 어느 지점에 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 시인의 개인사적 측면의 변화를 엿볼 수 있으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시사적 흐름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도 옹고집하며 부여잡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옹고집 속에서도 변모한 것들은 무엇인가를 읽어내는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양성우와 백무산 시인은 흥미로운 대상이다. 이들이 이번에 선보인 '물고기 한 마리'(문학동네 刊)와 '초심'(실천문학사 刊)은 시인 개인의 시적 여정의 변화와 함께 소위 전위적 시인들의 시적 자리가 어디에 와있는지를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양성우 시인은 우리에게 민중시인, 참여시인, 리얼리즘 시인으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耳順을 맞으며 선을 보인 이번 시집에서는 현실에 대한 예각적 시선보다는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본질적 성찰이 돋보인다. 특히 지나온 삶에 대한 성찰의 내용은 깊고 넓다. 사람노릇하며 사는 삶('그의 모습')의 구가, 삶의 길은 모두 굽고 가파르다('도솔암')는 인식, '아무도 산 위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삶의 깨달음, 이승을 먼저 떠난 자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낙화유수'), 거친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가도 중심을 잃지 않고 사는 법('산너머 산')의 확인, 하루를 살더라도 넘어지지 않고('하루를 살지라도') 살아가려는 정신의 깊이를 만난다. 그리고 이러한 시편들이 산, 계곡, 절, 항구, 길 등을 통해 발상되고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의 맛을 더욱 느끼게 한다. 그의 서정의 깊이는 결국 "온갖 잎들은 신의 얼굴이고 초록은 언제나 신의 마음"('한여름날의 숲')이라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 쉼 없는 현실의 변화와 시인 개인의 연륜이 빚은 결과다.
백무산의 이번 시집에서 그의 초기시에서 보여줬던 노동자를 중심한 세계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나온 세월의 변화처럼 그의 시의 양상도 많이 달라졌다.
눈오는 날 아침, 눈을 바라보며 "천지 사방으로 내리는 눈송이들을 누가 설하는 무량법문인가"('초심')라고 질문하는 사유방식이나, 겨울 느티나무를 향해 "끝모를 허공에 생을 다 놓아버리는 / 그 마음 깊이를 알 수 있을까"('느티나무')라고 반문하는 자세에서 그의 관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갈등보다는 자연을 통한 삶의 본질적 질문에 더 가까이 가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시인의 사유변화는 쓸려간 세월 때문이다. 천지만물은 허물어진다는 걸('마음 한 그루') 시인이 알고 있기에 흐르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온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시간의식은 흐르고, 변하고, 무상해 보이기만 하는 것들 속에서 주체적인 "나를 만나러"('삼짇날 아침') 안간힘 한다. 그것 중의 하나가 마음밭에 나무를 심는 일이다('마음에 심는 나무').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을 잡는 것, 나아가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시인이 꿈꾸는 시적 공간의 하나다.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상실되고 흐려진 순수한 본질의 세계에 대한 회복에의 열망이다. 이런 측면에서 양성우, 백무산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흐르는 세월 속에서 부여잡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변하지 않는 것 속에서 변하는 것을 엿보며, 변하는 것 속에서 변하지 않는 삶의 진정성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장르가 서정시다. 서정시는 그만큼 시간감각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여름과 가을 사이를 건너야 하는 계절이다. 이 간극은 우리가 적응하기 힘든 계절적 리듬 중의 하나다. 늦더위가 일상적 리듬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계절일수록 자연에 내재한 우주적 리듬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우주적 리듬은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리듬을 가진다. 그래서 변하는 계절의 길목에서, 변하지 않는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한 사유의 매개로 서정시들이 자리한다. 두 권의 시집이 여름과 가을 사이를 건너는 마음의 징검다리가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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