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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카울링(Maurice Cowling)과 영국의 ‘하이 폴리틱스(High Politics)’
모리스 카울링(Maurice Cowling)과 영국의 ‘하이 폴리틱스(High Politics)’
  • 교수신문
  • 승인 2019.08.0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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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학 및 정치철학이 현실 정치의 실현과는 관련도 없고 정치철학에 대한 깊은 몰두는 오히려 정치 활동을 저해할 수 있다.
2. 정치인들이 오로지 야심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인들은 정치적 야심과 신념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
3. 의회 바깥의 대중이 영국 의회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종속적인 위치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에 정치 엘리트들이 성공했다.

1832년의 선거법 개혁 이후로 영국 유권자가 수천 명에서 거의 모든 성인으로 확대되고 정당들이 조직, 인력, 당론 등의 측면에서 확장되고 다양화되는 등 영국 국민이 정부를 선출하는 시스템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하였으나, 영국인들의 주권 행사가 의회민주주의를 통해서 이루어져온 사실 만큼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정치 시스템은 효율적인 정부 운영을 위해 선거 기간에는 유권자의 표를 얻는 데에만 주력하였지만 선거가 끝난 후에 유권자들의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정치 참여를 절대로 장려하지 않았다. 1950년대에 영국의 양대 정당인 보수당과 노동당의 세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에도 일반 영국 성인의 양당 소속 당원 비율이 10% 미만에 머물렀다. 이 얼마 되지 않는 일반 당원 중 대부분은 당비를 내고 당 행사에 참여하여 저렴한 음료수 한 잔 마시는 것에 만족하였으며. 혹여 이 중 일부가 당의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려는 시도를 할 때에는 당 조직이 이를 가차없이 차단함으로써 소위 대중의 참견과 견제로부터 당 소속 의원들의 품위와 체통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였다. 18세기부터 하원 의원들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었던 단순다수제는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하원 선거에서 적용되고 있고, 영국 국민 전체에게 직접 뜻을 물어 정책을 결정하는 국민투표는 영국사에 걸쳐 1975년, 2011년 그리고 2016년 등 세 차례 밖에 실행되지 않았다. 이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 등은 영국식 민주주의가 ‘국민의 통치’가 아닌 ‘정치인의 통치’를 기반으로 한다는 데에서 그 특징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832년 선거법 개정을 주도한 찰스 그레이(Charles Grey, 2nd Earl Grey) 총리
1832년 선거법 개정을 주도한 찰스 그레이
(Charles Grey, 2nd Earl Grey) 총리

이러한 영국식 의회민주주의의 특성상 영국정치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 그 연구 대상이 영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집중되는 것이 20세기 중반까지 당연시되었다. 특히 ‘조지 3세 즉위 당시의 정치기구’라는 저서를 출간한 18세기 영국의 정치 연구자 루이스 네이미어(Lewis Namier)와 같은 정치사가들은 의회 의원 또는 영국의 정가(政街)인 화이트홀(Whitehall) 소속 고위 공무원 등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의 권력 장악 및 유지를 위한 활약을 중점적으로 다룬 정치사를 대학에서 가르쳤다. 이들은 영국의 젊은 엘리트들이 이러한 교육을 통해 제국 경영에 필요한 교훈들을 터득하기를 희망하였고, 이 같은 역사 교육을 받았던 청년들 역시 영국 정치 엘리트들의 권력 투쟁 이야기를 ‘정통 역사’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 엘리트 중심적인 정치사 접근 방식은 1950년대부터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과 같은 진보 성향의 사회사가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였다. 홉스봄은 1957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정치사의 하부구조(basis)는 “여론, 정당지지도 및 이와 비슷한 현상들의 유동성”에 있으므로 의회 및 정부 중심적 정치는 정치사의 “상부구조(superstructure)”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영국 사학계에서 사회사가 정치사를 대체하면서 에드워드 톰슨(Edward Thompson)를 필두로 한 사회사가들은 민중의 압력, 특히 노동 운동이 정치 변화에 미치는 중요성에 대해 더욱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해 튜더 시대 역사가인 제프리 엘튼(Geoffrey Elton)이 1970년에 출간한 저서에서 “정치행정의 역사는 ‘위대한 사람’들, 즉 소수의 지도자들의 역사이다. 왕을 다루던, 교황을 다루던, 정당을 다루던, 공산당 정치국을 다루던 간에 정치행정사는 특별한 이들의 특수화된 존재에 대한 기록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정치 엘리트 중심의 정치사는 상당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모리스 카울링(Maurice Cowling)
모리스 카울링(Maurice Cowling)

이처럼 1960년대의 영국 사학계에서 사회사가들이 본격적으로 득세하며 계급적 이념을 중심으로 영국의 정치를 분석하는 연구가 대세로 굳어가자 이러한 사회사적 독주를 막고 벼랑 끝에 몰린 정치인 중심의 정치사를 살려보겠다며 ‘최후의 발악’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 학자들이 1960년대 말에 등장하였다. 이들이 소위 케임브리지대학교 소속의 ‘피터하우스 학파(Peterhouse School)’를 이루었다고 칭해지는 모리스 카울링(Maurice Cowling), 앤드루 존스(Andrew Jones), 존 빈센트(John Vincent), 알레스테어 쿡(Alastair Cooke), 그리고 마이클 벤틀리(Michael Bentley) 등이다. 1967년부터 1975년까지 1867년-1940년의 기간을 다룬 다섯 권의 저서를 출간한 이 학자들은 사회사가들의 부상 전에 영국 정치 연구 방식의 핵심을 이루었던 소위 ‘하이 폴리틱스(High Politics),’ 즉 ‘수뇌부 중심의 정치사’의 부활을 도모한 보수 성향의 역사가들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들의 영수(領袖)로는 단연 이 다섯 권의 저서 중 세 권을 집필한 모리스 카울링이 꼽힌다.


1926년 런던에서 태어난 카울링은 케임브리지대학교 소속 지저스 칼리지(Jesus College)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육군 장교로 인도와 이집트 등에서 복무한 후에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1959년 총선에서 바세트로(Bassetlaw) 지역구의 보수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1961년에 모교의 근대사 교수로 임용된 카울링은 1963년에 피터하우스의 펠로우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에 자신의 보수적인 정치적 성향을 여실히 드러낸 저서 두 권을 출간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과 자유주의’에서 카울링은 밀이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세속적 종교를 사회에 강요하기를 원했고 이로 인해 국가가 엘리트주의적인 세속적 도덕성을 국민에게 강제로 주입하는 사실상의 전체주의적 사회를 추구했다고 주장하였고, ‘정치학의 본성과 한계’에서 카울링은 정치학 및 정치철학이 현실 정치의 실현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고 정치철학에 대한 너무 깊은 몰두는 오히려 정치 활동을 저해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이러한 카울링의 주장은 밀의 지지자들 및 자유주의 인텔리들의 분노를 샀고 그 이후로부터 카울링은 영국 보수 진영의 정신적 배후로 지목받으면서 진보 학자들의 표적 대상이 되었다.

루이스 네이미어(Lewis Namier)
루이스 네이미어(Lewis Namier)

그러나 옥스퍼드대학교의 저명한 사회사가인 조세 해리스(Jose Harris)의 표현대로 카울링이 소위 “영국정치사의 마왕”의 반열에 오르게 된 계기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1967년부터 1975년 사이에 출간한 세 권의 저서이었다. 이 중 가장 먼저 출간된 1967년의 ‘1867: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과 혁명: 제2차 선거법 개정’에서 카울링은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의 1866년 선거법 개정안보다 더 획기적이고 포괄적인 개정안 카드를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가 1867년에 들고 나온 이유에 대해 선거법 개정으로 인해 투표권을 새로 부여받을 도시 노동자들의 표심을 보수당으로 끌어모으고 동시에 지방에서의 보수당 귀족 세력을 보존함으로써 글래드스턴의 자유당을 무력화시키겠다는 당리당략적 계산이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이로써 카울링은 1867년의 선거법 개정이 민중의 압력에서 기인했다는 로이든 해리슨(Royden Harrison) 등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디즈레일리의 “정치체제에서의 위치”가 그의 개혁안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1971년에 출간된 ‘노동당의 영향, 1920-24’에서 카울링은 노동당이 자유당을 제치고 보수당의 대항마로 떠오른 시기의 영국 정치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저서에서 그는 당시 주요 정당들의 정치철학이나 정치인들의 정치적 신념 등을 심도 있게 분석하기보다 당 내부에서 벌어졌던 파벌분쟁 및 개별 정치인들 간의 갈등 등에 중점을 두고 검토하였다.

모리스 카울링(Maurice Cowling)
모리스 카울링(Maurice Cowling)

이를 토대로 내린 카울링의 결론은 솔즈베리(Salisbury) 후작,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 등 보수당 지도부가 당세 확장을 위하여 당시 자유당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를 지지하고 있던 중도파 유권자들을 포섭하고자 당시 부상하고 있던 노동당의 존재를 활용, 1916년부터 보수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있었던 로이드 조지를 1922년에 쳐내고 노동당이 천명한 사회주의를 적(敵)으로 규정함으로써 ‘사회 질서의 수호자’를 자청하는 보수당 중심으로 반사회주의 정치세력을 결집시켜 결국 자유당을 무력화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1975년에 출간된 ‘히틀러의 영향: 영국 정치와 영국 정책, 1933-1940’에서 카울링은 1930년대의 영국 외교 정책 역시 정당의 정략적 이해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고, 당시 보수당 정부 수뇌부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정책 목적은 노동당의 집권을 막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1939년 3월에 프라하를 점령한 상황에서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총리의 유화(appeasement) 정책이 유지될 경우 노동당에게 중도파 유권자들의 표심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핼리팩스(Halifax) 외무장관 등이 체임벌린을 설득하여 유화 정책을 포기시키고 폴란드에 대한 안전 보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게 했었다는 것이었다. 즉 당시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에 반대했던 보수당 인사들의 동기(動機)가 영국 내에서의 노동당의 세력 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정략적 계산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카울링의 주장이었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이같은 카울링의 영국정치사 ‘삼부작’은 예상대로 여러 사회사가들로부터 두 가지 맥락에서 맹공을 받았다. 공격의 1차 맥락은 카울링이 ‘하이 폴리틱스’ 세계의 배타성을 주장한다는 데에 대한 비난이었다. 로이든 해리슨은 정책결정자들의 세계가 “저속한 이들의 행위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교조적인 추정”에 카울링이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였고, 헨리 펠링(Henry Pelling)은 국민의 감정이 정치인들의 생각에 미치는 영향을 카울링이 과소평가한다고 지적하였다. 로버트 로즈 제임스(Robert Rhodes James)는 카울링이 ‘하이 폴리틱스’에 초점을 맞춘 것에 대해 일반 독자들이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우려하였고, 피터 스테드(Peter Stead)는 “하이 폴리틱스의 영역에서 규범이 정해진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우리의 역사 연구에서, 그리고 우리 현실 정치에서 너무 강하다”라고 불평하였다. 제임스 힌튼(James Hinton)은 계층 간의 투쟁을 무시한 카울링의 연구가 “정세를 변화시키는 ‘더 큰 역사적 힘’에 대해 무지하다”고 공격하였고,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조차 더 많은 “로우 폴리틱스(low politics)”가 들어갔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현하였다. 카울링에 대한 공격의 2차 맥락은 정책결정과정이 이데올로기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야심의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었다. A. J. P. 테일러(Taylor)는 “정치인들이 권력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정책을 결정한다”는 카울링의 주장이 네이미어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평론하였고, 로즈 제임스는 이러한 카울링의 접근방식이 “개인적 및 집단적 동기를 과도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진 던바빈(Jean Dunbabin)의 경우에는 카울링이 정치적 동기와 관련하여 “패배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므로 정치인들이 오로지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목적으로 정치 과정에 참여한다는 시각을 과도하게 밀어붙였다고 주장하였다.

히틀러의 영향 영국 정치와 영국 정책
히틀러의 영향 영국 정치와 영국 정책

카울링 자신이 ‘노동당의 영향’의 서문에서 “중요한” 의회 정치인들의 ‘하이 폴리틱스’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고 공언한 만큼 카울링의 접근 방식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들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스티븐 필딩(Steven Fielding)과 데이비드 크레이그(David Craig) 등이 주장한 것처럼 이러한 비판들은 카울링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우선 카울링이 소위 ‘중요한 정치인들’에 초점을 두었다는 말은 국가적 정책결정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정치인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는 뜻일 뿐 이들이 아닌 사람들이 영국 정치에 있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카울링 스스로 ‘노동당의 영향’에서 “일반 의원들의 의견, 당의 전반적 분위기, 공무원들의 생각, 유권자들의 우선순위, 신문들의 견해, 사회적 세력의 움직임” 등도 정책결정과정에 기여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정치지도자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사회사로 확장해나가는 데에 필수적인 관문으로 여긴 카울링의 입장에서 ‘노동당의 영향’은 독자들이 당시 정치지도자들의 심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쓰여진 것이었다.

카울링은 자신의 동료 ‘하이 폴리틱스’ 사가들과는 달리 정치인들의 ‘개인주의’라는 개념을 거부하였다. 그는 1867년의 선거법 개정의 경우 “의원 개개인이 당의 이해 관계 및 당에 대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에서 투표를 하였다면 훨씬 덜 극단적인 방안을 선택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으며, 한 개인이 영국의 정치 엘리트의 일원이 된 순간부터 그의 “추종자들의 희망과 야심의 보고(寶庫)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사고방식과 행동거지를 채택할 수 밖에 없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카울링은 정치 엘리트들이 개인의 야심에 따라 마음대로 활동을 하거나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판단하였고, 이에 따라 의회 바깥의 여론 또한 정치 엘리트들이 일정부분 고려했었음을 그의 삼부작 모두에서 인정하였다. 다만 카울링이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이슈는 과연 의회 내의 정치 엘리트들이 의회 바깥의 유권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의 문제였다. 카울링은 의회 내 정치인들이 의회 바깥의 유권자들을 상당히 “상스럽게” 여겼으며, 이에 따라 1867년에 노동자들이 요구한 바(성년남성투표권 부여)를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의회 내 정치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투표권 획득에 필요한 재산요건 완화)으로 “걸러내는 과정”을 적용시켰다고 보았다. 또한 카울링은 1920년대 노동 운동 지도자들이 의회 내 정치인들로부터 협상 대상자로 인정받고자 했다는 점을 들어 의회 바깥의 여론메이커들도 의회 내의 정치인들의 움직임에 따라 정치적 압력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 등 의회 내부의 상황에 대응하며 행동하였다고 관찰하였다. 결국 카울링은 “외부 대중의 움직임은 의회 내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영향을 받았고 의회 내의 활동 역시 외부 대중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았으므로” 정치라는 것은 서로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은 ‘닫힌 세상’들의 연속이 아닌, 상호 간에 침투와 여과가 존재할 수 있는 개별 그룹들의 조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과 혁명 제2차 선거법 개정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과 혁명 제2차 선거법 개정

카울링은 또한 그를 향한 비판과는 달리 모든 정치인들이 오로지 야심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치인들이 정치적 야심과 정치적 신념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정치인들의 행동에 있어 “정치적 ‘편의’와 정치적 ‘신념’이 자가당착적 관계에 있다는 편견에서 발생하는 오해를 바로잡기 위하여” ‘히틀러의 영향’을 집필하였다고 밝혔다. 카울링은 정치인들이 오로지 정치적 신념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순진무구한 입장이나 오로지 정치적 야심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냉소적인 주장 둘 다를 거부하고 정치인의 행동에 있어 이 두 가지 요소는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럼 카울링에게 있어 정치라는 것이 ‘로우 폴리틱스’와 ‘하이 폴리틱스’ 간의 교류의 과정이라면, 그가 당시 사회사가들로부터 지탄을 받으면서까지 굳이 ‘하이 폴리틱스’의 분석에 치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카울링은 의회 바깥의 대중이 영국 의회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종속적인 위치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에 정치 엘리트들이 성공했다고 보았다. 이 성공의 요인으로 정치 엘리트에 대한 대중의 “공경”을 지목한 다른 정치사가들과는 달리 카울링은 ‘정치적 수사(修辭)’의 효과적인 전개, 즉 “정치인들이 이용한 언어, 정치인들이 형성한 이미지, 정치인들이 남긴 신화”등을 통하여 정치 엘리트들은 대중의 생각을 형성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카울링에게 있어 ‘하이 폴리틱스’는 결국 “수사와 술책”의 이슈로 귀결되었고, 여기서 수사는 “유권자에게 새로운 정치적 이정표를 부여하는 데에” 쓰이고 술책은 “적합한 정치인들이 이런 수사를 유권자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쓰였던 것이었다. <끝>

원태준 포항공과대학교 인문사회학부 교수
원태준 포항공과대학교 인문사회학부 교수

 

케임브리지대학교와 런던정경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및 EU정치행정학으로 석사학위를, 런던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전공은 20세기 영국정치외교사로 영국사학회 총무이사를 역임하였다. 대표논문으로는 Britain’s Retreat East of Suez and the Conundrum of Korea 1968-1974”, 통합의 대안인 또 다른 통합’: 영국, 영연방과 대서양자유무역지역(AFTA)의 딜레마, 1961-1969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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