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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철학 : 자살의 권리와 삶의 의무
자살의 철학 : 자살의 권리와 삶의 의무
  • 김석수 경북대
  • 승인 2003.08.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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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죽음의 가벼움

 

김석수 / 경북대·철학

인간은 시간 속에 살아가는 존재다. 시간이 인간 존재의 상황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소인 이상,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동안 시간에 속박된 자신의 존재를 해방시켜 자유의 세계를 마련하고자 수없이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해왔다. 이 다양한 활동들은 죽음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수용하는 체념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는 후자의 측면에서보다는 전자의 측면에서 살아가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그 동안 인간은 죽음이 자리하고 있는 이 지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세계를 구축하거나 아니면 과학적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탈출의 시도 뒤에는 그것이 안겨다주는 마력이 자본과 권력으로 둔갑해 우리를 또 다른 억압과 구속의 현장으로 내몰기도 했다. 시간의 강을 건너게 해준다는 신비의 마약은 독약이 돼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카뮈의 주장처럼 삶은 부조리며 인생은 헛수고라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맛봐야만 했다.

죽음에 도전하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이렇게 부조리와 허무에 휩싸이게 될 때, 이내 우리는 무력감에 빠져들게 되고, 급기야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끝나는 지점이 오기도 전에 인위적으로 시간과 이별을 선언하는 죽음을 선택한다. 한 마디로 삶의 무의미를 자살로 마감하는 것이다. 익히 알다시피 자살은 자기 자신을(sui)을 죽이는(c do) 행위로서 삶과의 결투 끝에 막다른 낭떠러지에서 마지막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자유는 모든 책임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자유인가. 우리는 이 자살과 관련해 다양한 가치판단을 한다. 몽테뉴나 몽테스키외 같은 사상가는 인간은 모두 자신의 생명에 대한 주인으로서 절대적 권리를 가진다는 입장에서 자살을 긍정했다면, 반대로 스피노자나 칸트는 각자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의미에서 자살을 부정했다. 사실 자살의 권리문제와 관련해 여기에 대해 합리적인 답변을 찾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물음은 과연 인간이 자신의 생명의 궁극적 주인인가라는 질문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살의 권리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을 합리적으로 제시할 수 없다고 해서 지금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는 자살 현상에 대해서 무관심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유를 행사하는 모든 권리에는 책임을 동반하는 의무가 뒤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권리를 무시하고 의무를 절대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의무를 무시하고 권리만을 절대시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오늘날 우리의 문화에는 자신이나 타자에 대한 의무보다 자신의 권리를 앞세우는 경향이 강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의 삶과 죽음의 사건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성행위가 너무 경박한 놀이로 전락하는 측면이 부각되고 있듯이, 생명을 마감하는 죽음의 행위도 너무 가볍게 처리되고 있다. 삶의 가벼움은 죽음의 가벼움을 낳고, 죽음의 가벼움은 삶의 가벼움을 낳기 마련이다. 뒤르켐의 주장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는 지나친 개별화와 과도한 경쟁으로 병적인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연간 80만명 가량이 자살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인구 10만명당 26명이 자살함으로써 자살율에서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다.

근자에도 다양한 계층에서 다양한 형태로 자살이 일어나고 있다. 미디어 다음(Daum)의 통계가 보여주듯이, 이들이 자살하게 되는 데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경제적 문제(27.7%)이며, 이 외에 가정불화(19.8%)나 실연 및 친구관계의 악화(10.9%), 성적 비관(7.9%) 등이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의 자살은 살아있는 자들의 삶을 고양시키기 위한 결단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삶의 무거움을 도피하는 죽음이다. 이런 죽음은 산 자들에게 고통을 더 가중시키는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도피적 죽음은 극복돼야 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자살한 당사자에게 책임이 물어져야 하며, 이차적으로는 그로 하여금 그런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회나 국가에 대해서 책임이 물어져야 한다. 죽음을 선택한 당사자의 행위로 비롯된 슬픔이 아무리 큰 것이라 하더라도 그 슬픔이 미화돼 그가 이 사회와 역사에 잘못한 행위가 덮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가려져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사회적 존재이고 역사적 존재인 이상 우리의 모든 죽음의 행위도 그에 걸맞은 죽음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죽음은 삶과 相生 관계가 돼야지 相死 관계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을 버리는 자유가 아니라 생명을 길러내는 자유를 추구해야 할 것이며, 도피적 죽음이 아니라 의로운 헌신적인 죽음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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