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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발언 : 유서의 정치학
최후의 발언 : 유서의 정치학
  • 이명원 문학평론
  • 승인 2003.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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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텍스트-유서

이명원 / 문학평론가

자기의 모든 흔적을 말끔히 지우거나 정리함으로써, 자살을 결심한 사람은 그가 살아왔던 유감스런 삶의 전모와 결별하고자 한다. 자살자는 조급하다. 세상이 그를 버리기 전에, 그가 먼저 세상에 유감을 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의 신원을 파악할 수 없게 완벽한 알몸으로 낯선 곳에서의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에게는 사는 일 자체가 대체로 무의미했으며, 그의 사후 가해질 세인들의 입방아조차 귀찮아한다는 식의 냉소적 태도의 자살도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살자들은 그가 떠난 후에도 요지부동으로 남겨져 있을 세상에 대해 끈질기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다. 그 최후의 글쓰기 형식을 일컬어 우리는 유서라 부른다. 유서는 이제는 고인이 된 자살자의 '고백적 발화'의 종착점이자, 그의 죽음을 추동한 세계에 대한 '정치적 물음표'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성급하게 갈겨썼거나, 반대로 기이한 안정감으로 쓰여진 모든 유서들은, 그렇게 자살자의 안과 밖을 향해, 자기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유일한 '해석 주체'가 자신임을 처절하게 웅변한다. 그 유서들은 죽음을 향한 스스로의 결단을 순전히 자기화함으로써, 입방아의 형태로 난무할 타인들의 사후 해석을 봉쇄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서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자살을 감행하는 본인조차도, 그 죽음이 '근본적으로' 무엇에 의해 추동됐는 지를 모르는 경우도 자주 있다. 동기 없는 자살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자가 유서에서 거론하는 고백이 자살의 유일한 동기는 아니다.

'자살'이라는 책에서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인 마르탱 모네스티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자살하는 사람이 남긴 최후의 메시지를 살펴보면, 자살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절망에 빠진 사람의 최후의 감정을 분석할 수는 있다." 죽겠다는 것은 최후의 의식적 결단이고, 죽음의 시나리오는 무의식 속에서 축적되고 진행되는 것인데, 유서란 대개가 자살 직전의 '최후의 감정'에만 압정을 꽂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최후'를 가능케 한 과거와 현재,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현실의 '상황 맥락'에 있다. 비록 자살이 사후에 목도한 타인들에게는 '돌연한 사건'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 그것은 파국에 이르기까지 자살자를 둘러쌌던 분명한 사회·정치적 배후를 내포하고 있다. 유서는 다만 이 맥락의 단서만을 수수께끼처럼 보여줄 뿐이며, 때문에 유서를 통한 죽음의 원인규명은 결과적으로 자살의 원인을 둘러싼 '해석의 정치학'을 요구한다.

지난 4월 홍콩 오리엔탈 호텔에서 '돌연' 자살한 배우 장국영 씨의 유서는 얼마나 간명한가. "20여세의 청년을 알게 됐고, 그와 唐唐 중 어떻게 선택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매우 괴롭다. 이에 자살한다." 위의 유언을 보건대, 장국영의 '최후의 감정'은 두 연인 사이에서의 선택의 괴로움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죽음의 전모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 자살한다"는 선명한 진술이 또렷이 박혀 있지만, 이 발언조차도 그의 죽음 앞에서는 수수께끼일 뿐이다.

유서 자체는 '실존의 영역'에 속하나, 그것의 해석은 '정치적 자장'을 형성한다. 자살자는 스스로가 그 최후의 행위에 대한 투명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자처하지만, 그의 유서는 오직 '부분적 진실'만을 유추하게 만든다. '유서'의 해석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그의 죽음을 좌표축으로 해 전개되는 살아있는 자들의,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해석투쟁'이다.

 명백한 것은 누군가 자살했다는 것이고, 유서에 고인의 최후의 동요가 얼마간 사실적 발언으로 담겨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실'의 심층에 숨어있는 자살의 '진실'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 유서에 '당파적'인 또는 '편의적'인 해석을 덧붙임으로서 밀도 높은 죄의식의 수고를 덜고자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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