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0:25 (토)
평화연구를 비판한다 : 『21세기 평화학』(한국평화학회 엮음, 풀빛 刊)을 읽고
평화연구를 비판한다 : 『21세기 평화학』(한국평화학회 엮음, 풀빛 刊)을 읽고
  • 신승환 가톨릭대
  • 승인 2003.08.2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치학적 사유의 한계

신승환 / 가톨릭대·철학

소극적 의미에서 평화를 이해하더라도 현대를 평화의 시대라 부를 수가 없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의 시대가 지나고 '팍스 아메리카'를 외치는 시대임에도 이 세계에 진정한 평화가 자리한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과 폭력의 물결은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의심하게 한다. '21세기 평화학'은 이 점에서 많은 시시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평화학의 담론에는 많은 한계가 있으며, 논의의 층위가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먼저, 올바른 평화학 논의를 위해서는 현대 세계의 구조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요구된다. 사실 현대의 국민국가가 탄생한 것은 서구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형성이래 전쟁은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적인 수준으로 확대됐다. 평화학이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배태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전후해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된 것도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국민국가와 세계 체제는 물론, 그 근거가 되는 근대성에 대한 고찰을 병행하지 않기에 그 평화학은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전쟁, 특히 근대 이후의 전쟁은 거의 대부분 국가간의 이익을 전제로, "평화를 지키기 위한" 명분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평화학은 전쟁학을 넘어 근대세계의 체제, 충돌 뒤에 자리한 국가간의 이해관계와 지배구조, 문화와 경제적 차원의 제국주의적 관념을 해명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평화학은 결국 안보의 차원을 경제·환경·문화안보를 넘어 심지어 인간안보로까지 확대하려 한다(앞의 책 2부). 이런 논지는 일면 정당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단지 평화의 정치적 외연을 확대한 것이지, 그 구조의 내적 의미를 철학적으로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로, 평화를 위해서는 사회일반, 인간집단 상호간의 갈등이나 충돌과 그 안에 담긴 위험 요소와 그를 극복할 제도적 고찰이 뒷받침돼야 한다. 전형적인 범례가 한국 전쟁 이후의 이 땅의 상황이다. 북핵 위험은 고사하고 끊임없이 냉전반공 이데올로기를 확대재생산하는 구조에서 어디에 진정한 평화가 존재하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계층간의 갈등과 모순 구조 안에서 단순히 전쟁이 없었기에 평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래도 좋다면 지금의 평화학은 국제관계의 안보학이나 전쟁학과 같은 차원에서 논의돼도 좋다. 한 사회에서 조화와 관용, 화해와 공생의 윤리와 철학을 정립시키려는 노력 없이 평화학은 주어지지 않는다.


세 번째로, 현대에서의 평화 논의는 문화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구 중심주의에 의한 "문화 충돌" 논의의 허점과 이데올로기적 허상을 깨지 않을 때 반평화의 가능성은 고조될 뿐이다. 문제는 서구의 근대성이 형성한 문화중심주의와 끝없이 주변부와 타자를 양산하는 철학을 근본에서부터 비판하는 일이다. 미디어와 자본, 기술을 독점한 '선진국'들이 서구중심주의의 철학과 문화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전지구적 연대란 말은 허상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평화학의 논의가 진정한 성찰에 따라 정립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재적인 차원에 대한 해석이 선행돼야 한다. 갈등이나 충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란 이념적인 허구일 뿐이다. 그러기에 문제는 필연적인 갈등의 상황, 충돌과 대립의 구조를 어떻게 조화롭게 해소해가느냐에 논의가 맞춰져야 한다. 평화학의 논의가 확대되고 마침내 "세계윤리" 논의로까지 성숙한 것은 일면 반길 일임에도 그 논의는 철학과 윤리학, 또는 인간학적 최소한의 논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전쟁과 평화,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벗어나 타자의 삶의 방식과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할 때만이 평화는 가능하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원리는 형이상학적 판단과 실존적 결단을 요구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