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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 위로받은 충만감
[북소리] 위로받은 충만감
  • 교수신문
  • 승인 2019.07.0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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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평생 커피만 알고 살았으며, 그 커피로 인해 행복했다고 말하는 남자들. 한 사람은 도쿄 오모테산도의 ‘다이보 커피점’에서 매일 새벽 낡은 수동배전기를 돌려 커피콩을 볶으며 일과를 시작했다. 같은 시각, 다른 한 사람은 후쿠오카 아카사카의 ‘커피 비미’에서 배전기에 파란색 불을 붙이는 것으로 하루를 열었다. 녹색이던 콩의 색깔이 점점 변해 갈색이 되고, 고소한 냄새가 이른 아침 공기를 부유할 즈음이면 사람들은 하나 둘 그들의 커피집으로 모여들었다. 두 남자가 융드립 필터로 한 잔, 또 한 잔, 천천히 우려낸 커피를 마시며 각자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


“동쪽의 다이보, 서쪽의 모리미츠.”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커피 마니아들도 오래 전부터 전해진 이 말의 의미를 잘 안다. 무릇 진정한 커피 맛을 논하려는 사람이라면, 도쿄의 다이보 가쓰지가 만들어내는 강배전 커피와 후쿠오카의 모리미츠 무네오가 내리는 약배전 블랜드를 모두 경험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만큼 커피 취향은 서로 다르지만, 지치지도 않고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자기만의 커피를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그들은 동지였다.  


두 사람은 도쿄와 후쿠오카를 오가며 양쪽 커피를 고루 즐겨온 사람들 덕에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진작부터 들었다고 한다. 더러 적극적인 이들은 후쿠오카에서 원두를 구입해 도쿄의 다이보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고마운 손님들 덕에, 서로를 향한 두 동년배 거장의 호감도 점점 높아졌다. 그런 그들이 얼굴을 마주한 건, 67세에 이르러서였다. 간사이 지방에서 활동하는 저술가이자 커피애호가인 고사카 아키코가 두 사람을 마주 앉혀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롭고 소중한 자리가 될 거라는 궁리를 한 것이다.


성정도 커피 만드는 스타일도 전혀 다른 두 거장은 흔쾌히 응했다. 다이보 씨는 태생적으로 장인기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가게를 연 후 40여 년 동안 새벽 5시에 나와 커피콩을 볶고, 깐깐하게 선별한 콩을 그라인더로 분쇄하고, 실처럼 가느다란 물줄기를 융드립 천에 떨어뜨려 한 잔 한 잔, 커피 만드는 일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왔다. 이와 달리 모리미츠 씨는 매사 호방하고 논리적인 사내였다. 한 잔의 커피에는 콩이 거쳐 온 모든 기억이 스며든다고 믿는 그는 커피 맛과 향의 기원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했다. 예멘과 에티오피아 커피산지를 찾아가 토양과 커피 맛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는가 하면, 과학적인 차원에서 커피를 탐구하는 데 열중해왔다.


서로의 커피집을 방문하며 이어진 대화는 처음부터 활기를 띄었다. 마치 오래 못 본 친구를 만난 듯, 두 거장은 평소 드러내지 않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가게를 열고 10년 넘게 돈에 쪼들리던 시절의 살림살이, 그럼에도 누군가는 나의 커피를 알아주리라 위안하며 버텨내던 기억, 때로 그들을 가슴 아프게 한 손님들 혹은 20년 넘는 단골들, 외롭고 고단할 때 한참을 보고 듣던 그림과 음악들, 결국은 커피로 끝맺게 될 자신들의 한 생애까지…. 두 사람의 대화는 끝도 없이 계속될 듯했다. 그러나 이별은 불쑥 왔다. 2016년 겨울, 서울에서 열린 융드립 세미나에 참석하고 귀국하던 모리미츠 씨가 인천공항에서 쓰러진 뒤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가 일본에서 책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작년 여름, 지인에게서 들었다. “그 책, 제가 번역하고 싶어요.” 물기 맺힌 눈으로 그가 덧붙였다. “모리미츠 선생님의 마지막 강연이 된 융드립 서울 세미나를 주최했던 사람이 바로 저예요.”


두 말 않고 번역출판을 위한 절차를 밟았다. ‘모리미츠 씨. 우리 둘의 대화를 담은 책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함께 기뻐해야지요. 그런데 왜, 당신은 지금 여기에 없는 것입니까? 저는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단 말입니다.’ 다이보 씨의 헌사로 시작되는 번역원고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이 책 《커피집》 원고를 매만지는 여러 달 동안, 하나의 일을 통해 완성된 두 사람의 삶이 육화된 힘으로 내 삶을 휘감는 느낌이었다. 이런 충만감을 어디에서 경험할까. 누군가를 위로하겠다고 책을 냈는데, 내가 더 큰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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