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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에 대한 대서양 접근, 새로운 연구영역 될 가능성
영국사에 대한 대서양 접근, 새로운 연구영역 될 가능성
  • 교수신문
  • 승인 2019.05.0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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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역사 / 20세기 영국사 연구의 발자취
노예무역 (John Raphael Smith, 19세기 초)
노예무역 (John Raphael Smith, 19세기 초)

 

대서양사(Atlantic History)는 16세기 이후 대서양 양안 지역이 활발한 인적 교류를 통해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공동의 활동공간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전제 하에 이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 흐름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대서양 국가들의 혁명을 비교사적 관점에서 분석한 로버트 파머의 고전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The Age of the Democratic Revolution, 1959)에서 이런 접근의 초기 형태가 보였으며, 1980년대에 이르면 버나드 베일린과 잭 그린이 초기 영제국을 연구하면서 대서양사를 하나의 독립된 연구영역으로 발전시킨 바 있다. 
   영국사에서도 다양한 주제가 대서양사의 틀에서 다뤄지고 있는데, 다음의 두 가지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초기 북아메리카 식민지사(史)로, 최근에는 본국과 식민지의 교류 및 종교 공동체의 네트워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두 번째 주제는 노예제 및 노예무역으로, 대서양 양안에 대규모 부자유 노동력의 이동을 초래한 점에서 또한 영어권 대서양 양안의 반노예제 운동가들의 교류 속에 노예무역을 폐지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 점에서 대서양적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주제는 각각이 대표적인 영국사와 대서양사의 접목 사례이며, 동시에 대서양사라는 틀 안에서 두 주제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서양 노예무역 역사의 이해구조
   근대 노예무역은 포르투갈, 스페인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18세기에 이르면 영국이 주도하게 되었고, 그 폐지운동도 영국 의회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영국사의 주요 연구주제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노예무역이라는 주제는 대서양적 차원에서 접근해야할 필요성이 있는데, 첫 번째로 그것이 초래한 인적 이동이 그 방향과 규모의 측면에서 대서양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에모리 대학의 데이비드 엘티스가 구축한 데이터베이스는 노예무역을 통한 부자유 노동력의 이주의 흐름을 큰 틀에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에 따르면 1514년부터 1866년 사이의 기간 동안 약 1,060만 명 이상의 흑인 노예들이 대서양 반대편을 향해 팔려갔다. 흑인 노예들의 주된 승선지는 지금의 세네갈, 감비아, 베냉, 기니, 골든 코스트 같은 서아프리카였으며, 이들의 하선지는 북아메리카(30만 명), 스페인령 아메리카(약 520만 명), 서인도제도(약 431만 명), 브라질 (약 316만 명) 등이었다. 노예들은 18세기 전반에 약 220만 명, 18세기 후반에 약 350만 명, 19세기 초반에 약 324만 명 정도 이송되었고, 이 무역의 상당부분은 영국이 담당하였다. 이렇게 근대 이후 대서양 세계에서 행해진 대규모 인적 이동과 정착을 통한 디아스포라의 확산은 이 사건을 영국사라는 개별사의 틀을 벗어나 대서양사라는 새로운 틀 안에서 파악할 것을 요구한다.

윌리엄 윌버포스(1759-1933)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

 

두 번째로, 노예무역은 그것을 폐지하려는 움직임 또한 대서양적 차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대서양적 접근이 필요하다. 노예무역 폐지운동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첫 시기는 1730년대부터 1770년대까지로 아직까지 노예무역에 대한 반감이 대서양 세계에 퍼져가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노예무역에 대한 반감의 확산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주는 사건은 1730~40년대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부흥운동인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이다. 물론 대각성 운동 자체가 반노예제 감정을 확산시킨 것은 아니나 이 운동은 18세기 대서양 양안의 복음주의자들이 자신의 지리적, 교파적 차이를 넘어 대서양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성립할 계기를 제공한 점에서 반노예제 감정 확산의 배경이 되었다.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복음주의자들은 18세기 초·중반 종교부흥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서로를 방문하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대서양 세계에 회람되는 잡지를 발행하는 등의 네트워킹을 하였고, 더 나아가 다양한 종교, 정치적 주제들을 가지고 대서양 양안을 오가는 서신 교환을 통해 대서양적 차원의 논쟁에 참여하곤 하였다. 그리고 18세기 말로 가면서 노예무역이 확대됨에 따라 노예무역의 정당성은 이런 대서양 커뮤니케이션 통로안의 주요 이슈가 되었다.
 다음 시기는 미국 독립혁명기로, 이 시기 동안에는 1770년대 이전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던 노예무역에 대한 반감이 일부 사상가들 사이에서 반노예제 이데올로기로 전환되고, 더 나아가 노예무역을 폐지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되는 과정이 관찰된다. 컬럼비아 대학의 크리스토퍼 L. 브라운은 18세기 말 미국 독립혁명이 초래한 영제국의 도덕적 위기 국면 속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의 부도덕함을 주장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 상황 속에서 노예무역에 대한 공격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정치적 중요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이 식민지인들의 노예소유를 비판하며 그들의 자유와 독립 담론과의 모순을 지적할 때,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영국민에 의해 행해지는 노예무역을 비난하며 좀 더 근본적인 책임을 본국에 돌림으로서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런 변화 과정은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정치적 운동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세 번째 시기는 영국에서 노예무역 폐지운동이 의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1790년대부터 노예무역 폐지(1807)라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까지이다. 그동안 이 시기의 반노예제 운동은 영국 의회 내 노예무역 폐지법안 통과 시도를 중심으로, 또한 의회 내 투쟁을 주도한 윌리엄 윌버포스와 그의 복음주의 정치가 동료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의 뒤에도 대서양 양안의 반노예제 운동가들의 활발한 교류가 존재하였다.
영국의 복음주의 정치가들은 일찍이 노예제 반대활동을 시작한 북아메리카 퀘이커들과의 교류 속에서 자신들의 반노예제 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윌버포스의 동료로서 노예무역 폐지협회에서 활약한 토머스 클랙슨은 1808년 저술한 『노예무역 폐지운동사』에서 영국 반노예제 운동의 성공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뉴잉글랜드 각지에 흩어져 있던 반노예제 운동가들의 ‘신의 손길’에 의한 조우와 범대서양적 공조 속에 이뤄졌다고 평가한 바 있다. 1807년 1월 영국 하원에서의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통과되는 데 있어 대서양 양안의 반노예제 운동가들의 교류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지 않았다.

식민지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 조나단 에드워즈
식민지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 조나단 에드워즈

 

새로운 연구의 필요성-대서양 복음주의 네트워크 연구가 주는 실마리

이런 영국 노예제의 역사에 대한 이해 구조 속에서 볼 때 반노예제 운동의 세 시기는 각각 다음의 질문을 제기한다. 우선, 1)노예무역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던 시기(1730~70년대)는 ‘영어권 대서양 세계에서 반노예제 감정이 어떻게 확산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2)반노예제 사상이 등장했던 시기(1770~90)는 ‘반노예제 감정이 어떻게 사회 개혁을 위한 정치적 사상으로 전환되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마지막으로, 3)반노예제 정치운동기(1790~1807)에서는 ‘반노예제 운동가들이 노예무역 폐지와 노예 해방이라는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었는가’라는 주제를 도출할 수 있다.
그동안 반노예제 운동 연구가들의 관심은 세 번째 질문에서 두 번째 질문으로 초점이 이동 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인도제도의 경제적 이익 감소에서 노예무역 폐지의 원인을 설명했던 에릭 윌리엄스나, 1970년대에 노예무역의 수익성을 입증하며 오히려 대중의 정치 참여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했던 시모어 드레서는 노예제의 경제성에 관한 근본적인 시각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노예무역 폐지라는 성과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등장한 18세기말 영제국의 위기 상황을 강조하는 설명에서는 노예무역에 대한 반감이 어떻게 도덕적인 확신과 실질적인 행동으로 전환되었는지, 즉 두 번째 질문에 좀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서술에서도 첫 번째 물음인 노예제도에 대한 반감의 형성과 확산 과정은 여전히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18세기의 초중반 대서양 양안의 복음주의자들이 형성한 종교 네트워크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대서양 복음주의 네트워크는 대서양 양안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사상적, 물질적 교류가 촉발한 종교적, 사상적 일체감을 가리키는 말로1980년대부터 수전 오브라이언과 프랭크 램퍼드 등이 사용한 개념이다. 18세기 초·중반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전례 없었던 부흥의 소식은 매우 중요하게 보였기 때문에, 대서양 양안의 복음주의자들은 서신교환을 통해 대서양 반대편의 부흥운동의 소식을 듣고 또한 자기 지역의 소식을 전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1730년대부터 시작된 제1차 대각성 운동 기간 동안 다양한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성직자들이 새로운 부흥 운동을 지지하였고, 이들 중에는 벤저민 콜먼, 사무엘 마더 같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종교 지도자들과 아이작 와츠,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 같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종교부흥의 소식을 공유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서신을 교환하였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들 외에도 다수의 종교인들이 복음주의 저널을 읽다가 관심 가는 글이 있을 경우 그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부흥 운동이 대서양 양안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주었던 영향력과 파장에 기인한 것이었다.
몇 가지 대서양적 행사들 또한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대서양 차원의 네트워크가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1740년대에 대서양 양안의 복음주의자들은 특정일을 전 세계적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는 날로 정하는 운동을 시작하였고, 이는 곧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다양한 종교 단체에서 널리 지켜졌던 ‘연합기도회(United Prayer Day)’로 발전되었다. 영국과 식민지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레터 데이(Letter Day)’ 행사도 지켜졌다. 이들은 대서양 반대편에서 온 복음주의 서신을 읽는 별도의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지기 시작하였고 이는 영어권 복음주의자들이 프로테스탄트 부흥운동의 대의를 공유하는 과정에 기여하였다.

크리스토퍼 L. 브라운 '도덕자본'(2006)
크리스토퍼 L. 브라운 '도덕자본'(2006)

  이런 서신과 행사 교류가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대서양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형성된 점에서도 찾아진다. 예를 들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믿을만한 이야기(A Faithful Narrative)'와 제임스 로브의 '서술(Narrative)'같은 복음주의 문학의 대표작들이 출판되었을 때, 이 책들의 출판 소식은 대서양 양안의 복음주의 저널과 신문들을 통해 널리 알려지고, 복음주의 매체들의 유통 경로를 이용하여 대서양 양안 각지에 배포될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된 복음주의자들의 행사들도 관련 뉴스가 복음주의 미디어를 통해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 회람될 수 있었기 때문에 대서양적 차원에서 지켜질 수 있었다.
 각 지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잡지들의 내용을 조사해 보면 대서양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지적 연결고리의 강도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대각성 운동 기간 동안 런던의 출판업자들은 저명한 복음주의자들에게서 편지를 받아 대중 독서를 위한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런 예를 따라 글라스고우의 윌리엄 맥컬록, 에딘버러의 로브, 보스턴의 토머스 프린스가 자기 지역에서 복음주의 잡지들을 창간하였다. 이들은 편지를 수집하고 재출판 하는데 있어 높은 상호의존성을 보였다. 예를 들어 '글라스고우 위클리 히스토리'에 실린 152건의 편지 중 약 87개는 '런던 위클리 히스토리'에서 차용된 것이었다. 이런 증거들은 이 시기 동안 사상과 물질의 교환을 통한 복음주의자들의 종교적, 문화적 일체감의 형성을 일정수준 반영한다.

 18세기 말로 가면서 노예무역의 규모가 커졌고, 이에 따라 노예제 이슈는 이 대서양 커뮤니케이션 통로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예를 들어 1740년대 말의 부흥운동가 휘필드와 노예제를 옹호했던 알렉산더 가든 사이에 부흥 운동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나는데, 이는 곧 노예제 완화 여부를 둘러싼 논쟁으로 전환되었다. 1770년대에는  반노예제 주의자 벤저민 러쉬와 서인도 제도 농장주 리처드 니스벳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 1780년대에 이르러, 전직 노예무역선 선의(船醫)였던 제임스 램지는  '영국령 설탕 식민지에서 아프리카 노예들의 처우와 회심에 관한 글'을 통해 서인도 제도 노예 농장의 비참한 상태를 고발하였는데, 램지의 소책자가 출판된 지 1년이 못되어 3편의 출판물이 대서양 반대편에서 출판되어 그의 논지와 증거를 반박하였다. 이에 램지가 1785년에 '개인적 비난과 반대에 대한 응답'을 출판하여 재반박하자 네비스 섬의 제임스 토빈이 이에 반발하여 램지와 몇 차례에 걸쳐 출판물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 이런 대서양적 논쟁을 통해 우리는 노예무역 폐지론자들의 논지와 수사가 대서양 세계에 퍼져 나가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물론 대서양 복음주의 네트워크가 제공한 커뮤니케이션 통로 자체가 반노예제 감정을 고양시킨 것은 아니다. 그것은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자들 뿐 아니라 지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노예무역을 둘러싼 대서양적 논쟁 속에서 노예제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과 생각을 표출할 기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영미 복음주의자들의 대서양 네트워크는 반노예제 감정이 대서양 세계에 퍼져나갈 잠재력을 가진 커뮤니케이션 통로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는 이전의 연구들이 충분히 답하지 않은 첫 번째 질문, 즉 영어권 대서양 세계에 반노예제 감정과 가치가 확산되는 과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

나가며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한동안 영국사의 틀 안에서 연구되던 노예무역과 식민지 시대의 복음주의 네트워크 같은 주제들을 대서양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은 몇 가지 유용성이 있다. 우선 비교사적 접근만으로 조망할 수 없는 사건들을 좀 더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 해 준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 대서양 양안에서의 대서양 복음주의 네트워크의 발전과 반노예제 운동의 발흥은 대서양 양안을 비교해서가 아니라 이 지역을 하나의 공간으로 바라보고 분석할 때 더 종합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노예무역과 복음주의 네트워크 같이 트랜스내셔널성(性)을 특징으로 하는 역사적 움직임의 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
또한 영국사 주제에 대한 대서양적 접근은 새로운 연구 영역의 생성 가능성을 제시한다. 일부 학자들은 대서양사가 결국은 대서양 양안 국가들의 역사서술의 합(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또 다른 일부는 대서양사가 여러 지역을 아우르는 또 다른 이름의 제국주의 역사서술이라고 평가절하 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복음주의 네트워크 안에서 일어난 활발한 문화적 교류와 대서양 세계의 노예제에 대한 반감의 확산은 현상은 기존 주제사의 범주를 넘는 또 다른 연구영역에 해당한다. 그것은 단지 대서양 양안을 지리적으로만 한 공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서양사의 틀 안에 정치, 종교, 경제 같은 주제를 다양하게 조합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서양 정치종교사’, ‘대서양 경제사’ 같은 새로운 하위 범주 영역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대서양사는 역사학의 연구 범주를 지칭하는 말임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그 연구의 지평이 확대되고 있는 연구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윤영휘 교수
윤영휘 교수

 

윤영휘 교수-경북대학교 사학과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영국 정치종교사를 전공하였으며 대서양 노예무역과 도덕자본(moral capital)에 관심이 많다. 대표저서로 『혁명의 시대와 그리스도교』, 대표논문으로 「노예제 기록물의 생성과 반노예제 운동에 대한 기억의 형성」(제7회 역사학회 논문상 수상논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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