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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읽기 : 『건축과 철학』(장 보드리야르 외), 『은유로서의 건축』(가라타니 고진)
비교읽기 : 『건축과 철학』(장 보드리야르 외), 『은유로서의 건축』(가라타니 고진)
  • 강혁 경성대
  • 승인 2003.07.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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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철학의 '이념적 모델'에서 소비사회의 '시뮬라크르'로

강 혁 / 경성대·건축학 

플라톤에서 근대의 데카르트, 칸트, 헤겔,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사에서 건축은 특권적 비유로 자주 동원됐다. 물론 현실의 건축, 즉 집짓기나 지어진 건축물 자체는 철학과 직접적 상관이 없다. 단지 철학이 건축에 주목했을 뿐이다.

건축의 모종의 속성이 사유의 단초가 됐음이 틀림없다. 추측하건대 건축이 지닌 구축성, 체계성, 영속성, 부동성, 그리고 그 견고성이 철학이 지향해야할 이념적 모델로 작용한 듯하다. 칸트가 사유의 능력을 '이성의 건축술'이라 칭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서구적 사유의 본성이 건축적이라는 걸 말해준다.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이 부분을 건드린다. 그에 따르면 서구 철학의 역사는 견고한 사유의 건축물을 구축하려는 기나긴 여정이었고 거기에는 '건축에의 의지'라는 것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건축에의 의지라고 부른 것은 지식 혹은 이론이 완결된 형식성(체계성)을 갖추려는 것, 혹은 거기에 견고하고 안정된 토대를 마련하려는 경향이다. 서구 사상사를 특징짓는 것이 바로 이 '구축하려는 의지'인데, 수학에서의 확실성, 엄밀성, 논리적 완벽성의 추구는 그러한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여기서 고진은 건축에의 의지로 쌓아올린 견고해 보이는 관념의 건축물이 실상은 내부로부터 붕괴할 수밖에 없는 허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쳐주는 단단하고 안정된 토대라는 것이 부재함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능케 해주는 체계 외부, 혹은 기원에는 어떠한 합리적 근거나 확실성도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서구적 사유가 상정한 건축의 '건축성'이 사실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다.

'서구적 사유의 건축물'이라는 은유

실제의 집짓기는 철학자들의 (은유로서의) 건축과는 달리 온통 우연, 맥락, 비결정성에 노출돼 있다. 진짜 집을 지었던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을 거론하면서 고진은 타자의 중요성을 말한다. 공유하는 규칙을 갖지 않는 타자의 개입 없이 세속의 집짓기는 가능하지 않다고. 고진의 프로젝트는 서구적 사유에 대한 또 하나의 해체다. 그러나 그는 해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건축을 달리 봄으로써 그는 타자를 발견하고 그것과의 대화를 통해 전혀 다른 집짓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건축이 역사적으로 철학의 총애(?)를 입은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존재의 옹호자, 혹은 현전의 지지자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열거한 건축의 본성에서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건립으로서 건축은 실재를 드러내고 표상하는 일로 간주됐다. 라틴어 어원이 말해주듯 '근본적인 지음'으로서 건축의 테크네는 제작의 기술일 뿐 아니라 앎(지식)이고 봄(視)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 철학자들이 건축을 빌어 자기 담론을 생산하고 있는 그 순간 건축은 내부에서 붕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으로 견고한 집짓기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대문자로 A로 시작되는 아키텍처(Architecture)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사물로서 전통적 역할은 소진되고 하나의 기율로서 건축은 예술이 되고 구축의 '기술'이 됐다. 빅토르 위고가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선언한대로 그것은 건축의 위기이자 죽음이었다. 근대 이래로 건축은 전혀 다른 사물로서 생을 살아야 했다.

건축이 무너질 때 인간의 환상도 무너진다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건축은 근대 이후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물의 위상으로서다. 건축은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담거나 가치를 재현하는 사물이 아니다. 플라톤이나 하이데거처럼 건축을 존재와 연관짓는 일은 적어도 그에겐 우스운 일이 됐다. 그가 보기에 건축은 허구의 구축이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 존재한다고 믿는 허구적 세계, 가상의 질서와 믿음을 세울 뿐이다. 이제 견고한 사물로서 건축은 신기루가 됐다. 건축 역시 소비사회의 한갓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건축도 이미지, 기호, 매체로 인식되고 교환된다.

그 과정은 또 하이퍼-리얼리즘을 생산한다. 보드리야르가 보부르나 뉴욕 쌍둥이 빌딩을 특이한 대상으로 주목하는 이유다. 쌍둥이 빌딩의 붕괴는 실제 건물이 붕괴됨으로 환상이 붕괴되는 사건이었다. 건축이 무너져 내림으로써 그것이 표상하던 자본주의 질서와 세계화라는 시스템도 무너져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도저히 무너질 수 없는 것이 무너졌기에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또 하나의 환각이다. 아마도 보드리야르에겐 쌍둥이 빌딩의 건립보다 붕괴가 더욱 건축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또 다시 아이러니한 것은 현대 건축의 풍경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와 더불어 비판되고 더불어 근대건축의 이성주의적 사고는 포기되는 듯하다. 전위적인 현대 건축은 뒤틀리고 갈라져서 낯설고 괴이하다. 한마디로 비논리적이고 비기하학적이다. 현대건축은 비건축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건축이 중력에 저항해 서있기 위해선 내적인 구축성까지 포기할 순 없을 것이다. 신체의 거주성과 물질성을 완전히 소거할 수도 없다. 그것이 건축가에게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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