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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서평 :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마사 너스봄 외 지음, 오인영 옮김, 삼인 刊)
논쟁서평 :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마사 너스봄 외 지음, 오인영 옮김, 삼인 刊)
  • 박효종 서울대
  • 승인 2003.07.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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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호소력 공감..."광야의 외로운 함성" 아닐지

이 책은 1996년 미국 '보스턴 리뷰' 紙上에서 벌어졌던 세계시민주의의의 이론적, 실천적 의미에 관한 논쟁을 편집한 것이다.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방한 마사 너스봄 시카고대 교수의 글에 대응하는 16편의 논평과 그 논평들에 대한 너스봄의 응답으로 구성됐다. 세계시민주의란 당시 미국에 과잉 확산 돼 있던 진부한 애국주의를 폐기하고 우리 자신을 세계 시민이라는 보편의 차원에서 보자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논평자들은 입장은 세가지로 나뉜다. 힘 멜파브, 벤저민 바버, 매코넬 등은 애국주의를 지지하고 세계시민주의를 비판한다. 애피아, 리처드 폴크는 세계시민주의를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월러스타인 등은 명확한 입장을 보류하고 있다. 미국의 애국주의와는 그 역사적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애국주의 전통이 있는 한국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편집자주]

박효종 / 서울대·정치학

세계시민주의는 우리에겐 낯선 용어다. 한민족으로서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국가주의가 친숙할지언정, 세계시민주의는 그 이름부터 생소하다. 월드컵축구와 '붉은 악마'를 보면서 확인한 것은 민족주의이지, 세계시민주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의 로마제국처럼 세계 국가를 자부하고 있는 미국에서, 유럽국가의 폐쇄적인 문화와 달리 다문화주의와 속지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에서, 새삼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주장이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 미국을 뒤덮고 있는 애국주의에 대한 하나의 반응일는지 모른다. 물론 시기적으로 너스봄의 논문은 9·11테러 전에 나온 것이긴 하나, 하나의 예측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성을 갖는 사건들과 연계시키기에 이 책은 보다 심오한 역사적인 논쟁을 재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마치 "헌 술을 새부대에 담은" 것처럼 말이다.

따뜻함과 내밀함이 결여된 보편주의

너스봄의 멋진 주장처럼 공기는 국경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어느 국가, 어느 지역에 태어났다는 것도 "도덕적으로 임의적인(morally arbitrary)"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느 특정국가로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전적으로' 부여받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정의와 이성이 만개한 '목적의 왕국(kingdom of ends)'에 대한 헌신이 특정 국가에 대한 헌신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 앞에서 국가주의자들이 답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예술과 과학, 철학은 국적이 없지만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는 국적이 있는 것처럼, 공기에는 국적이 없지만 공기를 마시는 사람은 국적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또 어느 특정국가에 태어난 것이 "도덕적으로 임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특정국가에 대한 일정한 도덕적 의무(obligation)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부잣집에 태어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은 것은 우연이며, 도덕적으로 임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그 재산을 탕아처럼 탕진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목적의 왕국'은 좋지만, 실체가 없고, 따뜻한 정과 내밀성도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 공동체주의자들 가운데 작은 공동체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따뜻함과 내밀성 때문이다. 따뜻함과 내밀함이 결여된 공동체에서 세계시민은 고독과 외로움을 곱씹을 수밖에 없다.

너스봄은 인도에서 타고르의 이상을 따라 세워진 세계시민대학이 인기가 없는 것을 '저주'라기보다는 '축복'으로 보고 있으나, 오늘날 에스페란트어가 영어는 물론, 어떠한 국적의 언어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열세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보고도 같은 소망을 피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 너스봄이 세계시민주의의 태두로 꼽고 있는 디오게네스나 스토아학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모든 외로움과 따뜻함의 결여를 이길 수 있는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과연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그런 정도의 강인함을 기대할 수 있는가.

평자 본인은 국가주의자다. 하지만 너스봄의 세계시민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동조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점과 관련해 너스봄의 유비적 예화는 매우 시사적이다. 즉 부모로서 자기 자녀들에 대해 다른 아이들보다 특별한 정을 느끼고 배려하는 것은 당연하며 정당한 일이다. 그렇지만 다른 아이들도 자기자녀와 똑같은 도덕적 실체로 보아야 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발상과 행위가 모순어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기집 아이들과 이웃집 아이들을 데리고 저수지에 놀러갔다가 이웃집 아이가 물에 빠지자 그를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친 어느 가장의 이야기는 그러한 너스봄의 생각이 이상적일 뿐 아니라 현실성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주의와 국가주의의 공존가능성은 없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시민주의와 국가주의의 공존가능성을 옹호할 수 있는 논리라면, 그린(T.H. Green)의 주장처럼, 추상적인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은 구체적인 인간 안에서 비로소 그 진실성이 입증될 수 있다고 하겠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매일 마주치며 더불어 생활하는 정치공동체의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냉정하다면, 보편적 사랑의 발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세계시민주의는 도덕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으나, 지금은 국가의 시대고 우리상황은 더욱 그렇다. 특히 국가 이전의 시대를 가졌던 유럽과는 달리 동북아는 오래 전부터 국가위주의 체제였다. 또 유럽에서는 유럽연합과 같은 움직임이 있지만, 동북아에서는 국가경쟁체제가 더욱 더 치열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너스봄의 세계시민주의에 대한 호소는 경청할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한국의 독자에게는 "광야에서 부르짖는 외로운 소리"에 그치지 않을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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