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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가 다시 읽어낸 마르크스
알튀세르가 다시 읽어낸 마르크스
  • 교수신문
  • 승인 2019.04.2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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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와 정신분석' (파스칼 질로 지음, 정지은 옮김, 그린비, 2019.03)

 

한국에서 1980년대 말에서 90년으로 넘어가는 시기를 지냈던 이른바 운동권 사람들은 소련의 붕괴와 동서를 나누던 베를린 장벽의 파괴와 함께 정신적인 큰 혼란을 겪었다. 그 두 사건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실천 이론이라는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이 현실적으로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정치의 무대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맑시즘은 이제 끝난 것일까? 그렇게 90년대에 이제 무엇을 따라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알튀세르의 구조주의 맑시즘과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새로운 빛을 제공해주었다.
알튀세르가 프랑스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이유는 좀 다르다.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스탈린주의에 대한 강한 반발이 공산주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한 회의가 지배적이었을 때 알튀세르는 맑시즘에 대한 재독해를 시도한다. ??자본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의 맑스 독해는, 레비-스트로스, 푸코와 더불어 당시 프랑스 학계를 지배하던 구조주의 운동의 일부가 되었다. 구조주의적 분석을 넘어서, 알튀세르는 특히 정신분석과의 연결 속에서 맑스의 이론 안에서 아직 분석되지 않았던 것을 드러내 밝힌다.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은 제목이 알려주듯이 정신분석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론적 관계를 밝히고 있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재독해함에 있어서 정신분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그의 고유한 개념들인 징후적 독해나 중층결정, 호명 이론 등은 정신분석이 없었다면 생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이중적 의미에서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연결시킨다. 첫 번째는 알튀세르 자신의 행보 및 방법론과 관련된다. 그는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라캉을 모델로 삼아 ‘맑스로의 복귀’를 주장한다. 복귀는 대상이 되는 이론의 심화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으며, 라캉과 알튀세르에게 심화란 ‘이론의 과학화’를 의미했다. 라캉이 사회에 대한 적응기술이라고 자아 심리학을 비판하고 구조적인 방식으로 무의식에 접근했듯이, 알튀세르는 필요의 충족에 기반하고 있다고 경험주의적 경제학을 비판하고 구조적인 방식으로 맑스의 정치경제학에 접근한다. 그렇게 라캉의 정신분석처럼 알튀세르는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일체의 인간주의, 경험주의, 역사주의를 배제한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정신분석을 원리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신분석과 맑스의 이론의 평행성을 주장했지만 맑스의 글들 안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이미 함축되어 있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역전시킨다. 두 번째는 내용적 측면과 관련된다. 알튀세르에게서 중요한 이데올로기 이론에는 특히 정신분석의 영향은 뚜렷하다. 역사에 속하지 않으면서 사회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인 이데올로기 이론은 ‘무의식은 무시간적’이라는 정신분석의 언명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그런 이데올로기에 의해 늘 호명되고야 마는 탈중심화되고 예속된 주체성은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더 이상 모든 경험과 원리의 기반이 될 수 없다는 진리를 드러낸다. 

정지은 홍익대 초빙교수
정지은 홍익대 초빙교수

현대사회는 복잡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사회 속에 내재된 불만과 분노를 표출시키기 위해서, 아주 간편한 방식으로 ‘갑을 관계’라든지 ‘갑의 횡포’ 등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갑과 을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하청에 하청을 잇는 식으로 경제구조가 더욱 더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갑과 을의 연쇄들(예를 들어 을이 다시 갑이 되는 식의 연쇄들)은 과연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고 하청을 모두 끊어낸다면 이미 형성된 구조 속에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될 것이다. 마치 강사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강사법이 수많은 강사들의 실업을 야기했듯이 말이다. 그랬을 때 갑과 을의 대비는 윤리적 차원에서의 작은 양심에만 위안을 안겨줄 것이다. 알튀세르적으로, 혹은 정신분석적으로 말하자면, 갑을 사회에서 갑의 횡포와 을의 불만은 이미 구조에 예속된 주체성을 발현하기만 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읽은 독자는 주체성의 지위의 가차없는 하락에 아마도 크게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구조주의는 주체를 중심의 자리에서 배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구조에 시선을 두게 하며 ‘무엇을 할 것인가’의 문제를 구조적 변화로 풀어내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알튀세르의 surdetermination을 과잉결정이 아니라 중층결정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려두고 싶다. 알튀세르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위의 단어를 과소결정에 대비시켜서 과잉결정으로 옮기는 경향이 있으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내용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는 이 책의 특성상 프로이트의 surdetermination과의 일관성을 위해서 중층결정이라는 번역어를 선택했다.        

정지은·홍익대 초빙교수
프랑스 부르고뉴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상학과 정신분석, 그리고 예술과 관련해서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고, <유한성 이후>,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철학자 오이디푸스>, <알튀세르와 정신분석>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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