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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모리스 아귈롱의 프랑스 혁명 읽기
[테마]모리스 아귈롱의 프랑스 혁명 읽기
  • 교수신문
  • 승인 2001.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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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07 16:26:59
김인중 / 숭실대·서양사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의 웬만한 도시의 시청에 가보면 예외 없이 입구나 청사복도 안에 마리안느(Marianne)라고 불리는 젊은 여인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는 바, 이것이 프랑스의 국가 즉 공화국이다. 마리안느의 흉상을 시청(코뮌청)에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876-1880년이고, 그 일의 주도권은 밑으로부터 나왔다. 공화국에 촌스러운 마리안느라는 별명이 붙인 것은 프랑스혁명기에 공화국의 적들이 공화국을 조롱하기 위해서였지만, 제2공화정기인 1850-1851년에 프랑스의 남부지방의 민중들은 자신들의 비밀결사에 자발적으로 이 이름을 붙였고, 1855년에 트렐라제에서 마리안느라는 비밀결사에 의한 무장봉기가 일어나면서 이 이름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왜 잔다르크가 아닌 마리안느였나

그렇다면, 왜 프랑스의 국가가 남자가 아닌 젊은 여인으로 表象되었고, 그 이름이 마리안느일까? 왜 제2공화정기에 파리가 아닌 지방, 그것도 공화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는 남부지방의 민중들 사이에서 그런 이름이 회자되었을까? 흉상의 마리안느가 그 후에 코뮌청에 자리잡게 된 것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아니, 저자는 왜 ‘프랑스현대사에 있어서 공화주의 관념의 위상에 대한 試論’을 하필이면 공화국에 대한 이미지`-`거리와 광장의 기념원주, 조각상, 그림, 판화, 주화, 우표 등에 나오는 잡다한 초상과 상징들`-`연구를 통해 접근하는 것일까? 얼핏보면 박학을 자랑하려는 호사가의 호기심에 지나지 않을 것 같은 이러한 물음들과 접근방식은, 그러나 의외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귈롱의 스승인 라브루스와 같이 ‘경제적 변화 → 사회적 변화 → 정치적 변화’라는 설명틀을 사용할 경우, 1789년 이후의 프랑스사는 기본적으로, ‘두 계급의 충돌, 두 문명의 충돌’, 즉 ‘토지 문명과 산업문명의 충돌’로 해석되며, ‘1789’ ‘1830’ ‘1848’은 10년 주기의 경제위기로부터 비롯된 하나의 단일한 혁명이 된다. 단, 이전 혁명들과는 달리 1848년에는 귀족 대 부르주아지라는 양 대 계급 이외에 성장하는 프롤레타리아트계급이 있었고, 따라서 1848년의 투쟁은 삼중투쟁이었다는 본질적인 또 다른 측면이 첨가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19세기가 제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반복, 접합, 연결로부터 시작했다’면, 다시 말해 19세기가 누보 레짐이 아니라 끝나가고 있는 앙시앵 레짐과의 절충의 시대라면, 19세기 1∼2/3분기의 프랑스는 ‘명사사회’가 되고, ‘1848’은 명사사회가 추구한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프랑스적 경로에 대항하는 하나의 봉기가 된다. 왜냐하면, ‘1848’은 유럽적인 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대칭점으로서의 프랑스적인 예외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48년 보통선거제의 도입에는 정치적 의미보다 더 중요한 차원 즉 사회형태 그 자체의 변화라는 차원이 부여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1848혁명은 어떻게 준비되었으며 또 그것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렇게 물을 때, 이른바 좌파 부르주아지의 중요성이 새롭게 발견된다. 이러한 발견은 아귈롱을 비롯한 라브루스 제자들의 지방사 연구로 확인되고, 이제 혁명의 중요한 행위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 대변되는 도시의 노동자만이 아니라 농민, 수공업장인, 소지식인, 진보적인 명사들임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은 1848혁명의 공간축을 파리에서 지방으로, 시간축을 1848년 봄에서 1849-1851년으로 이동시키면서, 1848년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혁명이 아니라 정치혁명이었음이 밝혀진다.

“정치는 경제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아직은 미완이었던 이 정치혁명의 구조를 밝히려면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연대기가 달라져야 한다. 경제구조를 밝혀내기 위해 장기지속적인 생산양식의 규명이 필요하듯, 정치양식의 변화는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 자체에 대한 장기적인 분석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마리안느의 역사는 짧은 사건이나 국면변동의 시간 속에 용해되지 않고, 섬세한 터치에 의해 그 표상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하나의 긴 시간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요컨대, ‘1848’이 지닌 새로운 차원은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공화국의 잉태라는 이러한 긴 시간으로부터 관찰되어야만 비로소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방식의 성과는 결코 적지 않다. 그것은 프랑스혁명이 무엇보다도 ‘자유’의 혁명이었으며, 당시 ‘자유’와 ‘공화국’은 자매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1849∼51년에 서로 다투던 두 공화국의 모습도 분명히 드러나고, 파리코뮌기의 정치투쟁이 파리의 혁명가들과 베르사유의 보수주의자들간의 이중투쟁이 아니라 지방의 급진파를 포함하는 삼중투쟁이었다는 사실과 파리코뮌은 민속의 영역에서는 과거에 속했음이 밝혀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정치적 근대화가 경제적 근대화의 부수물이 아니며 그 과정이 결코 짧지 않다는 사실이다. 프랑스공화국의 긴 탄생과정을 생각할 때, 정권이 한 두 번 바뀐 것을 가지고 마치 민주화가 달성된 듯이 떠들어대는 것은 아무리 봐도 성급하다.

그렇다면 긴 잉태과정을 거쳐 출산한 프랑스 공화국의 특징은 무엇인가? ‘쿠데타와 공화국’에서 저자는 “프랑스에서 공화국은 본질적으로, 전통적으로, 그리고 속속들이 자유주의적이다”라고 말하면서, 쿠데타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독재체제와 양립할 수 없는 대항세력으로서의 공화국과 공화주의자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1848혁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토대를 둔 이러한 평가는 자유주의의 윤리(즉, 법의 준수)와 결합한 공화국과 공화주의자들이 제2제정기에는 물론 제3공화정기에도 (신)보나파르트주의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보나파르트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날 때마다 거의 반사적으로 공화정을 수호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다. 다시 말해, 쿠데타에 대한 공화주의자의 경계심은 공화국의 대통령 가운데 권력욕이 있다고 의심받거나 권력을 남용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사임압력을 가하고, 위대한 인물들이 대통령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일종의 불문율로 삼을 만큼 강력했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는 헌법에 의해 행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파리보다는 지방 특히 남쪽 출신, 군인보다는 변호사출신, 거만하기보다는 온화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전통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20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스가 파시즘을 거부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관료지배체제가 온존되고 있는 우리로서 이는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프랑스 반파시즘의 뿌리는 공화주의

저자의 말처럼, 두 권의 책은 매우 ‘프랑스적인’ 이야기이다. 1971년 중국을 방문한 한 프랑스 정치인이 중국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곽말약에게 은메달에 새겨진 마리안느를 보여주자, 곽말약은 왜 잔다르크가 공화국의 상징이 되지 못했냐고 고집스럽게 되물었다고 할만큼 우리에게는 낯선 이야기이다. 게다가 ‘마리안느의 투쟁’은 ‘권좌의 마리안느’(1989), ‘마리안느의 변신’(2001)으로 이어진 3부작의 제1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들을 읽어야 할 이유는 많다. 1995년에 나온 ‘민주주의 백과사전’(영문판) South Korea편에 한국의 민주화과정을 설명하면서, the Park regime, the Chun regime, the Kim Young Sam government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The Republic of Korea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는 국가의 역사서술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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