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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한가함을 찾아서
문화비평: 한가함을 찾아서
  • 배병삼 영산대
  • 승인 2003.07.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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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달리하여 각각 존경했던 분들이, 그들 사이에 또 정겨운 교유가 있었음을 발견할 때의 기쁨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피천득과 윤오영이 이런 경우다. 피천득이 여성적이고 현대적인 스타일로서 '인연'이라는 명수필로 잘 알려진 작가라면, 윤오영은 남성적이고 전통적 글쓰기를 구사하는 이로서 '방망이 깎던 노인'으로 널리 알려진 수필가이다.

헌데 이 둘의 느긋한 만남이 윤오영의 '비원의 가을' 속에서 그려진다. '구름다리를 향해 걸어가던 나는 맞은 편에서 오는 琴兒(피천득의 호)와 만났다'로 시작되는 수필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한가함(閑)이다. 잠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인생 백년을 짧다 하지만 그 사이에 한가한 시간이란 다시 짧다. 깊은 산 고요한 절에 숨어살아도 우수와 번뇌를 벗어나지 못하면 한가한 것이 아니요, 밝은 창 고요한 책상머리에 단정히 앉았어도 명리와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한가한 것이 아니다....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해나가고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간다. 그러나 한가한 사람이란 시간과 마주 서 있어본 사람이다".

특별히 마지막 구절은 작가의 시간관이 무르녹은 명구로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한가함 예찬'은 오늘날 느끼기엔 왠지 촌스럽고 나아가 면구스럽기조차 하다. 언제부턴가 '한가함'을 비생산적이거나 무능한 것으로 여겨 꺼려하고, 대신 거기에다 '재창조'라는 이름을 붙여야만 안도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한가함-'시간'과 빈자리-'공간'을 가만 두지 못한다. 한가함을 '재창조'라는 이름을 붙이고서야 안도하듯, 빈자리는 '미개발지'라는 말을 붙여서 호시탐탐 채색을 노린다. 도무지 자연의 무위한 녹색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새만금 방조제의 저 시퍼렇게 날선 직선과 경부고속철도의 천성산 통과노선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 땅에 대고 위도와 경도를 따라 칼질한 국경선처럼 아집적이고 독선적이다. '야만을 문명화한다'는 인간중심주의가 땅의 한가함을 '미개발'로 명명하는 독선의 근원이다. 겉으로 거창해 보이는 인간중심주의, 근대주의 그리고 제국주의마저도 뿌리를 거슬러 내려가면 그 궁극 처에는 '한가함'이나 '빈자리'를 내버려두지 못하는 우리의 '안달하는 마음자락'이 똬리를 틀고 있다.  

대상과 지식을 수치화하고서야 안도하는 버릇도 여기서 멀지 않다. 가령 매년 봄마다 맞는 황사 현상을 두고 '이번 황사로 반도체업계 등이 입은 손실액은 1조원에 달한다'라는 계산이라든지, 또 태풍이 지나고 나면 언제나 헤아리는 피해액수를 접할 때에도 앞뒤가 뒤바뀐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런 액수가 나왔는지 그 산출과정도 의심스럽지만, 또 거꾸로 제 때 내린 비가 경제에 미친 이익 계산은 왜 하지 않는 것인지도 질문하고 싶은 대목이다. 요컨대는 자연(無爲)이 인간(有爲)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이런 계산법 아래 깔린 우리의 오만과 독선이 섬뜩한 것이다.

자연을 두고 숫자로 환산하는 오만무쌍한 마음자락이 어디 인간에게 라고 비켜가랴. 노동자들의 파업이 발생하면 곧 그로 인한 손실액이 계산되어 나온다. 좀 큰 파업이다 하면 피해액이 수천억 나아가 수조원에 달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도무지 기업을 할 수가 없다"고 과장된 비명을 지르면서-여태 기업하는 사람들로부터 "사업 잘 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사람들을 윽박지른다. 숫자를 지키기 위해 자연과 인간을 내모는 것이다.

그러면 숫자에 집착하여 자연과 주변의 인간을 내몰고서 획득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餘暇라고 이름 붙이자. 이 '여가'를 채우는 것은 아마도 식도락과 명품, 또는 세계 유명 관광지에서의 시간 보내기이리라. 그러나 여가의 자리는 한가롭지가 않다. 분주하고 바쁜 여가는 그야말로 리크리에이션의 시간이지 결코 한가의 시간이 아니다. 한가함이란 윤오영을 빌리자면 시간에 끄달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마주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장마가 걷히면 완연한 여름이다. 몇 년 전 "뭉게구름이 사라진다"는 과학잡지의 기사를 읽고 난 다음부터 해마다 여름이면 뭉게구름을 찾는 것이 일이 되었다. 소나기 오기 직전 토끼모양, 고래모양의 구름들이 뭉게뭉게 피어나던 그 '한가롭던' 장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뭉게구름을 잃어버린 것은 우리가 '한가함'을 '뒤쳐진 것'으로 여기면서부터, 그리고 閑暇를 버리고 餘暇를 찾아 나서면서부터였다고 나는 믿는다.

공자도 "초여름 시원한 새 옷을 지어 입고 어린이 대여섯, 어른 두엇과 함께 기수에서 멱감고 무우에서 바람쐬고 돌아오는" 유유자적한 '한가함'의 꿈을 꾸었으니, 우리도 이번 여름은 '여가'나 리크리에이션이 아닌 '한가함'을 찾아볼 일이다. 허나 한가함이란 것이 어디 서늘한 산 속이나 시원한 해변에만 있으랴. 연구실의 느긋한 선풍기 소리 속에도 깃들이어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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