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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이야기: '박하사탕 촬영지'와 '문학학교'
생각하는 이야기: '박하사탕 촬영지'와 '문학학교'
  • 이남호 고려대
  • 승인 2003.07.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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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산 박달재 넘어가니...시인의 꿈 대신 '유원지'만

어느 산골마을의 한 폐교(사진은 본문과 관련이 없음).

나와 같은 학과에 근무하는 오탁번 교수는 시인이요 소설가이며, 시 전문계간지 '시안'의 편집인이기도 하다. 그 분은 얼마 전에 고향 마을인 충청북도 천둥산 자락의 조그만 폐교를 구입하였다. 한편으로는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생활을 즐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폐교를 보수하여 문학관으로 만들어서 고향의 후배들에게 문학 지도를 하는 등 문화사업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종강을 하고 나는 선배 한 분과 함께 그곳을 방문하기로 하고 천둥산으로 향했다. 중앙고속도로의 제천 IC를 빠져나오자 점심 시간이 지나 있었다. 예전에 박달재에서 묵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었던지라 도로변의 묵집에서 요기를 하기로 했다. '향토음식전문점'이라는 간판을 내 건 그 집은 식사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내가 '이 지방에 왜 묵이 유명해요'라고 묻자 선배는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어쩌고저쩌고 하는 '천둥산 박달재'라는 옛 유행가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우리는 묵밥이 나올 때까지 신문을 뒤적였다. 신문에는 시합 도중에 사망한 카메룬 축구 선수 기사가 칼라사진과 함께 크게 나와 있었다. 이번에는 선배가 '카메룬 축구 선수 한 명 사망한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인데 이렇게 크게 보도하는 걸까'라고 물었다. 나는 '유승준이가 약혼녀 어머니 조문을 위해 귀국한 일이 그렇게 큰 뉴스가 되는 것도 이상하네요'라고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우리는 스포츠와 연예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다. 소설가 황순원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황선생님의 부고는 조그만 기사였는데 그 당시 서태지의 귀국 뉴스는 신문의 한 면을 거의 채우고 있었음을 기억했다. 그런가 하면 시인 조병화선생의 부고와 가수 조용필 부인의 부고를 비교하기도 했다. 누드 사진을 찍어 25억원을 순식간에 번 여가수와 월수입 백만원이 안되는 후배 시인의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김광림의 연극 '날 보러 와요'가 초연되었을 때는 관객이 거의 없었는데, 그것을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로 만들자 갑자기 그 연극마저 유명해지는 현실도 지적했다. 연예와 스포츠의 세상에서 문학과 예술의 자리는 어딘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먹는 묵밥은 별로 맛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오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그곳의 위치를 물었다. 백운면에서 '박하사탕 촬영지' 팻말을 보고 따라 오다 보면 '박하사탕 촬영지' 조금 못미처 있다고 했다. 도로 곳곳에 친절하게 세워져 있는 '박하사탕 촬영지'라는 팻말 때문에 우리는 그곳을 쉽게 찾아 갈 수 있었다. 한 때는 재학생이 100명이 넘었다는 그 분교는 정겨웠다. 젊은 사람들이 모두 마을을 떠나 도회로 나가니 어린 학생이 없어 여러 해 전에 폐교가 되었다고 한다.

폐교 앞 도로에는 '박하사탕 촬영지'로 가는 아베크족과 낚시족들의 승용차들이 자주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의 첫 장면과 끝 장면을 찍은 강가가 그곳에 있는 줄을 처음 알았다. 천둥산 깊은 산속의 인적 드문 강변이 영화 '박하사탕' 때문에 유원지처럼 되어 있었다. 조령 근처에 있는 '용의눈물 촬영지'가 유명한 관광지라는 사실도 이해가 안 되는 나에게, '박하사탕 촬영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영화의 힘, 대중문화의 위력을 다시 한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꿈을 이야기했다. 인근의 초등학교 학생들을 모아서 '어린이 글짓기교실'도 열고 또 문학공원도 만들고 시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마련할 것이라고 했다. 주변의 자연도 아름답고 깨끗하고 정성스레 보수한 교사와 교정도 시적 정취가 넘치는 곳에서 그런 행사를 하면 참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 문학과 인간이 순수한 모습으로 만나 하나로 어우러지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실현하는 공간일 수 있을 듯 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운 자연도, 문학도, 정겨운 분교도 중요하지 않다. 스포츠가 중요하고 연예가 중요하고 영화가 중요할 따름이다. 시인의 문학의 꿈을 심는 곳은 중요하지 않고, 영화를 촬영한 장소라는 소문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박하사탕 촬영지'라는 팻말을 따라가지 않고 그곳에 가는 길은 없을까. 젊은 사람들이 도회의 대중문화를 뒤로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백운초등학교 애련분교'에 다시 어린 아이들의 천진한 함성이 가득하게 할 길은 없을까.

반세기 전 '천둥산 박달재'라는 유행가가 이 지역을 도토리묵의 고장으로 만들었듯이, 이제 '박하사탕'이라는 영화가 이 지역을 유원지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이란 예나 지금이나 그렇고 그런 거라는 위안이 든다. 이런 억지 위안을 하면서 나와 선배는 새로 닦은 고속도로를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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