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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풍경] 죽음, 그 영원한 딜레마
[책들의풍경] 죽음, 그 영원한 딜레마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1.03.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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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다룬 책들
지금, 담론시장의 화제는 단연 ‘도올 논쟁’이다. 아카데미가 이 논쟁을 비켜가기란 애초부터 어려운 일. ‘미디어에 의한, 미디어를 위한, 미디어의’ 복합문화상품이라고 폄하할 것도 없다. 도올다운 엔터테인먼트이며, 그 사이 가난한 우리 상업출판사들의 주머니에 조금 손때묻은 돈이 흘러들어간다고 해서 탓할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아카데미에 내재한 어쩔 수 없는 양가적 반응일 듯. 엄밀성과 대중성에 대한 학계의 강박증이 지금 도올 논쟁을 통해 교통정리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시선을 조금 돌려보자.

자살사이트와 게놈지도, 그 선명한 대비

이런 것은 어떤가. 이른바 ‘자살 사이트’라는 것이 물의를 빚고 있다. 이 사이트를 통해 성인은 물론 어린아이까지 동반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반사회적 인터넷 사이트를 수사해온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가 밝힌 자살 관련 사이트수는 대략 45개 정도.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자살 관련 용의점이 있는 15개의 글에 대해 IP 추적을 통해 신원을 파악한 후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인간게놈지도가 그려지면서, 생명연장의 꿈이 부풀려지고 있기도 하다. 한쪽은 서둘러 죽음을 만나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죽음의 시간을 지연시키려 하고 있다. 여기서 부각되는 점은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인 것 같다. 그렇다. 새 밀레니움의 시대에 죽음은 서서히 ‘엔터테인먼트’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죽음은 결국 생명활동의 전부를 비쳐준다.

자살 동향에 대해 세계적으로 조사·연구하는 세계보건기구는 1968년 “자살이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의지를 지니고 자신의 생명을 해쳐서 죽음이라는 결과에 이르는 자멸행위”라고 정의내렸다. 자멸행위로서 ‘자살’ 특히 유명세를 치르는 사람들의 이러한 죽음의 선택은 언론의 과도한 조명을 받았다. 요컨대 거리 도처에, 시내 곳곳에, 한 줌도 안되는 地上에 죽음이 넘쳐나고 있지만, 죽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이점에서 최근 소장 연구자 유호종이 지는 ‘떠남 혹은 없어짐―죽음의 철학적 의미’(책세상)은 11년전 한국종교학회가 펴낸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문제의식을 잇는, 세련된 작업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유호종의 작업은 일관되게 철학적 탐구를 견지한다. 그의 곁에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선 인간(유선자 옮김, 동문선)’이나 ‘죽음의 역사’(이종민 옮김, 동문선)를 놓을 수 없을까. 또 프랑스 저널리스트 마르탱 모네스티의 ‘자살, 도대체 왜들 죽는가’(한명희 옮김, 새움)를 세워 놓는다면?

마르탱 모네스티의 저작은 ‘자살의 문화사’를 보여준다. 자살을 둘러싼 음흉한 음모와 간계, 조직들을 폭로하거나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추적하고 있지만, 뒤르켐의 ‘자살론’이나 아리에스의 ‘죽음의 역사’ 그 사이 어디에도 놓을 수는 없는 저작이다. 신문사회면의 정교한 기사 스크랩. 그래서 저자의 시선에서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적인 징후를 읽기란 어렵지 않다.

‘죽음의 역사’에서 아날학파의 계보를 잇는 아리에스는 그들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오랜 기간동안 전개된 죽음을 둘러싼 관념이나 제식의 변화를 상세히 분석하고나서 이 미세한 역사적 사건들의 깊은 곳에 작동하는 어떤 본질을 드러내려 하였다. 문학작품이나 회화, 조각, 교회건물, 묘비, 유언장에서 그는 시대 속에 스며든 죽음의 데드마스크를 서술해냄으로써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스스로 답변한다. 분리되지 않았던 친밀한 죽음의 시간, 주인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고 선택했던 전통은 사라졌고, 이제 육체의 가냘픈 숨은 의사-마술사에게 넘어갔다. 가족들조차도 이 음모의 공범자가 되었다.

그의 지적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 “그래서 하나의 딜레마가 생긴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부당하고도 굴욕적인 상태에서의 생명 연장, 또는 이런 생명의 연장을 어느 한순간 멈출 수 있는 승인되고 규제화된 권리가 바로 그 딜레마이다. 그러나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환자인가, 아니면 의사인가?”는 지금의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역사가 이상의 문제의식으로 읽힌다.

유호정은 “죽음은 우리에게 인식적, 정서적, 실천적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사람들은 죽음을 직시하고 성찰하는 대신 두려워하며 회피하려고만 한다. 또한 우리 철학계에서도 죽음은 객관적으로 규명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죽음에 대한 탐구를 등한시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들에 대해 ‘본격적인 철학적 탐구’를 시도했다. 특히 죽음의 실천적 의미 항목은 뇌사 논쟁과 관련돼 있는데, 저자는 ‘산 자가 죽은 자가 되게 하는 사건’ 규정에서 ‘어떤 사람을 죽은 자로 대해도 되게 만드는 사건’ 규정으로 나아갈 것을 제안하여, 이것이 ‘그 사람을 장례 지낼 수 있게 만드는 사건’을 의미한다면서 그런 사건이란 바로 뇌사 아닌 心肺死라고 주장했다. 또한 인간 상태에 대해 살아 있거나 죽었다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보는 것은 불충분하고,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단계도 인정하는, 이른바 의식이 영구적으로 소실되는 사건을 설정함으로써 ‘인격사’라는 삼분법적 시각을 제안했다. 비록 유호종의 책이 문고본 형식이긴 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세부적 진술은 논쟁을 향해 기름을 퍼붓고 있다.

‘生과 死의 삼분법’ 제시하는 ‘떠남 혹은…’

이제 아리아스가 한 말로 돌아가자. “오늘날…우리들은 자신의 심층부에서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놀랍게도 우리의 삶이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지니는 관념과, 자아에 대해 지니는 관념 사이에는 어떤 관련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죽음은 삶과 잇닿아 있다. 자멸행위로서의 자살이나 혹은 죽음의 지연이 제기하는 것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묘지같이 휑그레한, 무참하게 바닥까지 파헤쳐진 시대의 삶을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지. 무엇이 삶을 확장할까.
최익현 기자 ihcho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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