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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투성이 가족
상처투성이 가족
  • 정학섭 전북대
  • 승인 2003.07.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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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학 섭/전북대 · 사회학                    

  최근 대학생들의 주된 지적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수강신청 과목을 통해 확인해 볼 수도 있다.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되고 정보화사회로의 진전이 활발하게 논의되면서 대학생들의 학문적 관심은 실용적 차원으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는 듯하다. 사회과학 분야의 경우, 여성과 사회, 성의 심리학, 결혼과 가족 등과 같은 과목에 엄청난 수강생들이 몰려들고 있으며, 이들 학생은 이같은 교과과정을 통해 전문적인 학술적 논의보다는 실제 생활과 관련되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논의가 펼쳐지는 것을 크게 선호하고 있다.

  필자도 최근 서너 번 '결혼과 가족' 강의를 하고 있다. 원래 '가족사회학'이라는 명칭의 전공선택 과목이었는데, 몇 년 전 '결혼과 가족'이란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가족사회학'일 때는 사회학과 학생 중심으로 수강생이 30-40여명 수준이었으나, '결혼과 가족'으로 이름이 변경된 뒤부터 수강생이 수백 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여전히 전공선택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매번 강의마다 "나와 나의 가족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보고서 작성의 과제를 낸다. 수강생 가족에 대한 사항은 어떤 경우에도 비밀이 보장될 것임을 확약하고 또 실제로 지금껏 그것을 지켜내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수강생 거의 대부분이 갖가지 가족문제로 인해 크게 고통받았거나 고통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온갖 폭력으로 유린되고 할퀴어져서 상처투성이로 봉합돼 있는 곳이 가정이요 그곳의 가족이라는 사실이다.

  폭력의 가해자는 거의 대부분 아버지인 남성이다. 이들은 대체로 가정으로 돌아와서는 전제군주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술에 취해 물리적 폭력을 아내와 자녀에게 휘두른다. 갖가지 위협과 언어폭력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죽여 버리겠다'며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묶어 두고 바늘 따위로 찌르는 경우도 있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는 '폭력과 상처' 그 자체로 얼룩져 있는 셈이다. 수강생들의 기록에 의하면,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40대 중반쯤에 뒤늦게 가정과 가족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음주의 빈도와 양도 크게 줄어들고 지난 시절을 심각하게 반성하면서 가족 본래의 품으로 복귀하려 '발버둥'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전의 오랜 기간에 걸쳐 저지른 유무형의 폭력에서 비롯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고,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지위와 역할은 제대로 회복되지를 않는다.

수강생들이 정직하고 진지하게 작성해 제출한 보고서를 읽으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나와 나의 가족에 대한 회고와 성찰도 이뤄졌다. 주변의 동료교수들과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러저런 얘기를 처에게 했더니, "당신도 젊은 시절 늦게 귀가할 때면, 오늘 무슨 잔소리하면서 고함지르나 해서 저와 애들이 바짝 긴장해 '아이스 맨(ice man)'이 되곤 했어요"라는 것이 아닌가.

이혼율 세계 3위라는 충격적 통계치 탓인지 학생들은 이혼으로 인한 가족의 위기 현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결혼과 가족' 강의의 여러 주제 중에서 학생들이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이혼문제였다. 그래서 전통적 의미의 결혼을 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형성할 수 있는 방안들은 없는지, 혼전동거를 실제로는 대다수가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결혼과 가족형성에서 비롯되는 여러 문제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대안으로 혼전동거는 해볼만한 것은 아닌지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다. 단순한 쾌락적 차원이 아닌 새로운 대안으로써 혼전 계약동거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이들을 통해 필자 또한 이전의 부정적이고 편견적 태도를 지양하게 되는 경험도 해보게 된다.

 학생들은 각자의 체험에 따라 상처를 치유받기를 갈망하고 있다. '결혼과 가족'에 관련된 전문상담자도 아닌 담당교수에게 많은 학생들이 상담받기를 희망하고 있다. 여학생들의 경우,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들로 인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미는 일에 부정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결혼하여 행복한 가족을 형성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다. 대학 내에 이들을 위한 전문상담기구를 설치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사회에서도 가족문제를 상담하거나 치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기구설립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함도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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