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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 영국 역사학의 두 가지 해석 전통 담은 유럽사 번역서들
책들의 풍경 : 영국 역사학의 두 가지 해석 전통 담은 유럽사 번역서들
  • 조승래 청주대
  • 승인 2003.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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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주인공' 둘러싼 팽팽한 해석...역사가의 과제 되물어

 

조승래 / 청주대·영국사

19세기 말 이래 영국 역사학은 크게 두 갈래의 길을 걸어 왔다. 하나는 휘그적 해석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좌파적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의 길이었다. 전자는 영국의 자유주의적 전통을 대변하며 후자는 급진적 전통을 대변한다.

휘그적 해석은 영국의 역사를 자유를 위한 영국인들의 위대한 투쟁사로 그리고 있다. 원래 자유로운 공동체였던 영국이 노르만족의 정복에 의해 그 자유를 잃었다가 17∼19세기의 혁명과 투쟁 그리고 자유주의적 개혁에 의해 모범적인 의회 민주주의를 실현한 자유 국가가 됐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좌파적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영국사는 계급, 계층간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며 진정한 자유를 위한 피지배 계급의 투쟁은 늘 지배 계급에게 저지되고 잊혀졌지만 중단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중간 계층을 상정한다면, 후자는 그것을 인민 대중, 민중 혹은 노동 계급으로 설정한다.

휘그적 전통의 역사서들, '자유의 확대' 강조

최근에 번역된 W.A. 스펙의 '진보와 보수의 영국사'(이내주 옮김, 개마고원 刊)와 A.J.P. 테일러의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유영수 옮김, 지식의풍경 刊)은 휘그적 해석의 전통에서 나온 책들이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하나의 나라 영국으로 통합된 18세기초에서부터 영국이 유럽 공동체에 가입한 20세기 중반까지 역사를 다룬 이 책은 하나의 견고한 플롯에 의해 짜여졌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 권리와 자유의 확대, 산업혁명을 통한 일반적 부의 확산, 그리고 복지 국가 수립을 통한 사회적 불행의 치유라는 전인미답의 진보의 등고선을 영국사는 헤쳐 올라 왔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영국의 이런 진보가 폭력보다는 설득이라는 방법으로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국은 평화적으로 과두정에서 민주정으로,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그리고 복지 국가로 진화해 갔다는 것이다.

옥스퍼드대의 저명한 독일사가 테일러는 휘그적 해석을 독일사에 적응시켰다고 볼 수 있다. 즉 휘그적 해석으로 역사를 볼 때 독일은 분명 잘못된 역사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테일러는 일찍이 1차대전의 책임을 독일보다는 프랑스와 러시아에게 돌리려는 외교사가들의 해석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이번에 번역된 책에서도 2차대전은 1차대전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세력 균형을 깨야만 해외로 진출할 수 있다는 군국주의적 후발 산업국가 독일의 강박 관념이 억압적인 베르사이유 체제를 핑계로 역사에 다시 분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2차대전의 책임을 악인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 일부에게 물으려는 시도는 역사의 표피만을 보는 것에 불과하며, 전쟁의 책임은 바로 그 잘못된 독일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휘그적 해석이 자랑스러운 승리자들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라면 좌파적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잊혀진 패배자들의 역사를 찾아 그들이 묻혀 있는 저 낮은 곳을 발굴하는 것이었다. E.P.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나종일 외 옮김, 창작과비평사 刊)은 가히 이 방면의 최고작이라고 할 수 있다.

톰슨은 영국에서 노동 계급이 18세기를 거쳐 공장제가 완전히 정착되기 이전인 1830년대에 형성됐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이제는 잊혀져버린 다양한 하층 민중들이 공장제 이전의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해 대응하면서 형성시켜 나갔던 문화적 구성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국의 정치, 문화, 생활의 의미 있는 역사적 주체였다. 비인간적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의 위협에 맞서 따뜻한 인간의 정이 흐르는 도덕 경제의 수립을 위해 투쟁하던 노동 계급이야말로 결코 멸시 당해서는 안 되는 다시 되살려야 할 역사적 주체라는 것이다.

그는 영국의 문화 연구를 받아들여 계급을 문화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봤다. 그것은 계급을 생산 수단에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집합으로서 구조적으로 자동적으로 이미 형성돼 있는 것으로 보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계급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철저히 구조주의적으로 해석해 인간의 능동적 실천을 경시했다는 그의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홉스봄,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학의 적"

또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자본주의 문명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한편 신화화된 민족주의 역사를 극복하고 보편적인 역사를 구성해 미래를 내다보려고 한다. 일찍이 자본주의 문명이 활짝 꽃피던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극단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 야만성을 폭로한 바 있는 에릭 홉스봄의 '역사론'(강성호 옮김, 민음사 刊)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계몽주의 합리성으로의 복귀를 주장한다. 그것만이 역사적 진보의 유일한 담보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도 모두 계몽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홉스봄은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역사학의 제일 명제를 유린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역사학의 최대의 적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한낱 천박한 상대주의에 불과하고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역사학은 진보를 위해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은 실천의 학문이지 단순한 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역사가들이 해야 할 일은 민족주의 역사와 같은 신화화되고 날조된 '특수사'들을 거둬 내고 미래를 향한 진보를 실천할 수 있는 '전체적 사회사'라는 '보편사'를 추구하는 것이다.

최근 번역된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들의 저서들은 잘 짜여진 플롯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언어적 인공물이다. 그리고 그런 저술 행위는 정치적, 사회적 실천으로 역사는 신념의 행위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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