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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F학점 원하는 학생을 만들었나
누가 F학점 원하는 학생을 만들었나
  • 곽호완 경북대
  • 승인 2003.06.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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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이야기 : 학점경제학 시대의 풍경

곽호완/ 경북대 심리학

아침에 일어나 졸린 눈을 부비며 커피 잔을 들고 컴퓨터를 켜고 습관처럼 전자메일을 크릭했다. 첫눈에 보이는 한 학생의 편지, “교수님, 저는 이번학기 xx 과목을 수강한 학생입니다.…취업시험을 준비한다고 수업을 제대로 하지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부탁드릴 것은 제가 취업하려는 곳이 성적을 중요시하는 곳이라 F를 주셨으면 해서요. 뻔뻔함을 무릅쓰고 부탁드립니다.”

이런 메일이나 전화는 이번학기만도 벌써 여러 번이다. 이정도의 공손함을 보이는 것은 그래도 좀 낫다. 어떤 친구는 성적을 확인하고 와서는 “저는 후반부 수업을 별로 듣지 않았으니, 당연히 F를 받는 줄 알았는데, C라니요?”라고 대들 듯 하는 학생부터, 거의 수업을 들어오지도, 시험도 안치고는 “졸업 학점 모자라니, 제발 학점 아무거나 주세요”라는 학생까지 매우 다양하게 나의 심장을 쑤신다.

아, 내가 부족해 이런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구나 라는 자괴감이 들 무렵, 한 학생이 불쑥 연구실에 음료수 캔 하나 들고 찾아와서는 “교수님, 제가 이 과목 B+ 이상 못 받으면 졸업이 안되니, 레포트를 하나 쓸께요. 어떻게 안될까요?”라고 나오면 이미 내 속은 반으로 뚝 부러지며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같은 느낌이다.

그런 학생에게 속을 가라앉히며 이렇게 타이른다. “자네들 세상의 부정에 대해 그렇게 비판하고, 부패를 싫어하면서, 나에게는 그러한 부정을 저지르기를 요구하면 나는 너무 슬퍼진다. 자네 학점을 올려주면 누군가의 학점을 내려야 하는데, 자네는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가?” 그러면 학생은 할 말이 없으니, “알겠습니다” 하고는 나가 버린다. 속으로는 “그놈의 상대평가 땜에 될 일도 안돼” 라고 생각할 뿐 자신의 잘못은 느끼지 않을 것 같은 등의 모습을 뒤로 한 채….

학생들만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다 어른들, 지도층, 사회시스템 모두 저지른 잘못에 젊은이들은 늪에 빠져든다. 학점 평점이 대체 뭐라고, 토익점수가 뭐라고, 학생들은 수업을 듣고 깊은 탐구정신과 비판정신을 담금질하기 보다는 쉽게 학점을 따는 방법에 몰두한다.

즉 소위 말하는 ‘전략과목’ 이란 것이 있어서 쉽게 학점따는 과목이 학교 내에 소문으로 돌고 있고, 대대로 신주처럼 내려오는 예상시험문제 및 답안들, 필요한 레포트를 다운받아서 제출하는 레포트 사이트들 등등 나열하면 한이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소위 ‘학점경제학’이라는 경향으로 치부될 듯 하다.

이런 학점경제학으로 인해 대학졸업생의 세계적 경쟁력은 실종된다. 여기에 기여하는 것은 교수들의 편의주의적 발상이다. 학생들과의 학점논쟁이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학생들의 깊이학습을 유도하지 않는 사지선다형이나 OX문제들을 제출하고, 어떤 교수는 아예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예상학점을 제출하게 한다. 학생들에게 질문을 해도, 토론을 유도해도 다 벙어리니, 시험문제에 나오지 않을 만한 깊은 이론적 논쟁에 대한 설명을 하면 당장 ‘이거 시험 나오나요?’ 라는 질문이 들어온다. 

그래도 수강학생들이 너무 적어지면 그것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연예인도 아닌 교수가 온갖 우스개 소리나 농담으로 학생들에게 재롱을 떨기도 한다. 일탈적인 행동을 하는 학생이 있어도 혹시 인권침해나 언어폭력 등으로 고소당할지 모르니 가만히 지나간다. 신용카드에는 신용이 없고, 지도층은 지도력이 없고, 대학에는 교육이 없으니, 학생에게 공부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쓰다가 보니까 이건 순전히 넋두리요 투정이다. 그래도 학교에 몸담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보람이라도 없으면 하찮은 걸뱅이 보다 대접 못 받는 신분이니 무언가 좀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자. 학생들이 학점경제학에 중독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학점이나 토익점수가 취직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 사회가 되면 된다. 웃기고 있네. 그러면 수백 대 일의 입사경쟁은 어떻게 처리할 건가. 회사별로 면접과 자체시험을 실시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수의 추천서를 받으면 된다.

미국 등 서구에서는 취직 시 지도교수의 추천서가 모든 것에 우선해 고려된다. 나중에 회사를 옮기더라도 전직 상관 또는 옛 지도교수의 추천이 결정적이다. 아, 또 문제가 있다. 교수는 추천권을 이용해 온갖 금품이나 서비스를 학생에게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교수는 함부로 추천하면 안 된다. 잘못 추천하면 그것은 데이타베이스에 들어가서 향후 추천서는 휴지조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가 우리에게는 오지 않을까?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나는 오늘도 내 연구실에 앉아서 학점 때문이 아닌 순전히 공부나 진로 또는 애인 문제에 대해 상담을 받고 싶은 학생을 만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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