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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68 신드롬' 어떻게 볼 것인가
[동향]'68 신드롬' 어떻게 볼 것인가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3.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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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07 16:15:47
몇 해전 맑스주의를 공부했다는 서양사학자가 죽은 체 게바라에게 편지를 썼다. "바람처럼 살며 권력냄새 혐오한 '영원한 게릴라'…당신의 주검을 상품화한 시장경제의 기동성에 경악한다"고. 역설적이게도 그가 편지를 기고한 매체는 '조선일보'였다. '어떻게 '체'를 그것도 '조선일보'에 팔아먹을 수 있느냐'는 비판들이 쏟아졌지만 그는 당당했다. "게바라를 통해 '조선일보' 독자들의 냉전의식에 조그만 틈이라도 벌릴 수 있다면, 그것은 내 의무다." 그는 자신의 실천이 '진지전'의 일환임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68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긴 전쟁도 스펙터클이 되는 시대다. 이미지는 현실의 잔혹함을 순치시켜 친숙한 구경거릴 만들어낸다. 이런 시대엔 혁명도 신화가 되고, 낭만이 되고, 패션이 된다. 더구나 혁명의 경험이 일천한 우리다. 결핍은 더 많은 갈망을 낳고, 증폭된 갈망은 대상에 대한 신비화로 이어지는 법. 그 신비화는 때로 실체와 무관한 상징과 이미지들의 폭주를 낳는다. 확실히 우리사회엔 '혁명은 싫어도 혁명의 이미지는 좋아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운동보다 운동가를 사랑했다"는 '전직 운동권' 여자시인의 고백은 차라리 소박해서 좋다.

최근 '1968'이란 책이 출간됐다(원제 Marching In The Street, 삼인 刊). 저자는 '신좌파평론' 편집위원인 타리크 알리. '68'에 대한 그의 독해는 상당히 '좌파적인' 축에 속한다. '68'로부터 히피와 마리화나, 로큰롤로 상징되는 '에로스 혁명'의 외피를 걷어냄으로써 그것을 '세계화된 정치적 급진주의 운동'으로 재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책이 한국의 서점가에 깔리기 무섭게 보수적 일간지들의 서평면 머릿기사로 다뤄졌다는 사실은 이러한 점에서 하나의 아이러니다. '1968…청년들은 변혁을 꿈꿨다'(조선일보), '68운동 가치는 아직도 유효'(중앙일보), '68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동아일보) 등 지면의 상단을 채운 큼직한 활자들엔 하나 같이 우호적인 시선들뿐이다.

물론 보수 일간지라고 좌파서적을 리뷰 대상으로 삼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에 근거한 '본격 리뷰'가 아니라 근거없는 상찬과 '구색 맞추기식' 서평에 그친다면, 그것은 비평의 '상업적 의도'를 의심받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행태에 '신좌파의 문화상품화'란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당연하다. 前카피레프트 모임 대표 김현우씨는 "68혁명의 정치적 의미와 그것이 우리사회에서 갖는 실천적 함의는 도외시한 채 '68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치는 것은 '서구의 세련된 문화상품'으로서 '68의 이미지'를 팔아먹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물론 '상품화'에 대한 우려가 제기된 것은 지난해 봄의 '체 붐'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대학가의 사회과학서점에는 한 출판사가 '체 게바라 평전'(장 코르미에 지음)의 홍보차 배포한 브로마이드를 구하려고 '노랑머리' 대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출판사는 출간 2개월만에 2만 5천 권의 책을 팔아치웠다. '노랑머리들'의 구입동기는 단순했다. "책표지에 담긴 첫인상이 멋있다". "RATM(미국의 하드코어 록 밴드)이 입은 T셔츠에서 봤는데,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문화평론가 이동연씨는 이 같은 '체 붐'에는 "체라는 인물로부터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일종의 선정적 기대감이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요컨대 엘리트 지식인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정글 속에 뛰어든 체의 삶이 "취업난 시대의 막힌 일상으로부터 일시적 탈출구"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유팔무 한림대 교수(사회학과)의 견해도 유사하다. 그는 '체 게바라 현상'이 "화끈하고 감각적인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의 기호와 기성세대와의 단절되고 싶어하는 강한 욕구가 결합돼 빚어낸 새로운 영웅숭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대중가수를 우상으로 삼아 기성세대와의 차별화를 꾀하는 10대들의 행태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 셈이다.

"체 게바라요? 멋있잖아요"

그러나 '체 붐'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68 현상'에 대해서는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윤수종 전남대 교수(사회학과)는 "변화에 대한 열망을 지닌 대중들이 새로운 운동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전제하고 "68운동은 과거와 구분되는 수평적 네트워크 운동의 전범을 보여줌으로써 침체에 빠진 한국사회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라 기대한다. 이동연씨 역시 "신좌파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는 것은 운동 스펙트럼의 확대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같은 평가는 그 초점이 68운동 '자체의 의미'에 맞춰진 것들이다. '68'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맥락에 대해서는 '신좌파' 지식인들조차 비판적이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어영문학과)는 "68이 대중화되는 건 바람직하나 거기에 가장 보수적인 세 일간지가 앞장선다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말한다. 윤수종 교수 역시 "68을 그들처럼 문화적 반란으로 취급하다보면, 그것이 애초에 지녔던 정치적인 전복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국내에서 '68'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시기는 1993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구의 '교과서 맑스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학생운동의 이념적 경직성을 탈피해야한다는 요구가 PD(민중민주) 학생운동 내부에서 제기됐다. 이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68년 학생봉기'였다. 그들은 '볼셰비즘'을 대신할 새로운 운동의 돌파구를 이 '봉기'에서 찾고자 했다. 하지만 참고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해야 국내에는 '프랑스 5월 혁명'(백산서당 刊), '미국의 대학과 노동계급'(창작사 刊), '새로운 사회운동과 참여민주주의'(문학과지성사 刊) 같은 책들이 전부였다. 성실하게도 '신좌파평론'에 실린 논문들을 번역해 자료로 활용했는데, 당시 번역작업에 참여했던 장석준 민주노동당 교육부장은 "68에 대한 관심은 대학개혁, 효과적인 노동자-학생 연대에 대한 관심에서 싹튼 것이었을 뿐, 지금처럼 '문화혁명'이니, '모든 금기에 대한 도전'이니 하는 식의 낭만주의적 수사와는 무관했다"고 말한다.

'장삿속'인가 '자신감'인가

지난 98년 '68' 30주년을 맞아 학생운동권 출신 대학원생들이 펴낸 무크지 '읽을꺼리'(카피레프트모임 刊)는 국내에서는 거의 유일한, '68 비판적 읽기' 사례로 꼽힐 만하다. 이들이 소개한 다양한 입장 가운데 '프랑스 자본주의를 재탄생시킨 68년 5월'이란 레지 드브레의 글은 눈여겨볼 만하다. 프랑스의 68운동이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소비자본주의의 확산 요구였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지적은 '문화혁명과 소비자본주의의 친화성'과 관련해 한국의 문화적 좌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까닭이다.

월러스틴은 '68'을 인류역사상 단 두 번밖에 없었던 세계혁명으로 규정했지만, 기실 '68'내부의 스펙트럼은 극단적인 트로츠키주의자부터 신우파적인 소비자본주의 예찬자까지 대단히 다양하고 이질적이다. 따라서 '68'의 성격과 의의를 한마디로 규정짓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다만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상황이 '68의 전도사'들에겐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의 '언론 해프닝'에서 확인된 것은 '혁명조차 상품화하는' 문화자본의 탁월한 장삿속이거나, '68의 급진담론쯤은 능히 관리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지배블럭의 자신감, 둘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로선 한국에서의 '뜻밖의 성공'을 외려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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