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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상의 예술, 엄혹한 세계에서 내면적 가치를 지키려는 절박한 물음"
"이인상의 예술, 엄혹한 세계에서 내면적 가치를 지키려는 절박한 물음"
  • 설한 편집인
  • 승인 2018.10.15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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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1·2』(돌베개 刊) 낸 박희병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연암 박지원 연구의 권위자이자 실학자 홍대용의 평등사상 연구로 월봉 저작상을 수상한 박희병 서울대 교수가 이번엔 필생의 역작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을 내놓았다. 연암과 추사가 존경한 문인화가 이인상의 그림과 글씨를 분석한 대작이다. 20년 노고의 결실로 집필에만 6년이 걸렸다는 이 책에는 문학과 사상, 예술 분야에 걸친 그의 학문적 내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2권 도합 2304쪽에 달하는 벽돌책이다. 독자들에겐 ‘이걸 언제 다 읽지?’라는 걱정거리를 안겨주지만, 한편으론 한번 시작한 일은 최대한 정열을 쏟아 결국 끝내고 마는 완결주의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자칭 ‘칩거형 학자’인 그는 오랜 세월 학문의 외길을 걸으면서 통합 인문학의 실천을 통해 한국학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외모만으로도 이미 딸깍발이 선비 정신이 은은히 풍겨 나오는 그를 이메일로 만났다.
- 설한 편집인 eidtor@kyosu.net

▲ 송변청폭도. 제공=돌베개
▲ 송변청폭도. 제공=돌베개

△ 이인상은 일찍부터 미술사 연구자들에게는 주목받아 왔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이름이다. 이인상은 누군가? 그리고 오랜 세월 이인상이라는 인물에 매달린 이유는?

이인상(1710~1760)은 18세기의 문인, 서화가, 지식인입니다. 격조 높은 그림을 그린 조선 최고의 문인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시서화 셋에 능한 사람을 ‘삼절’(三絶)이라고 하는데 이인상은 시서화에다 전각까지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사절’(四絶)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서얼 신분이었습니다.
문인화는 화가의 내면세계를 시각언어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화가의 정신세계라든가 고뇌라든가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어야만 그림이 온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선,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이들은 모두 문인화가가 아닙니다)과 같은 화가처럼 일반인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닙니다.

저는 1998년부터 이인상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이라는 책의 역주(譯註)를 막 끝낸 때입니다. 저는 이 무렵 ‘연암강회’(燕巖講會)라는 공부 모임을 이끌며 박지원의 『연암집』을 읽고 있었습니다. 한창 연암 공부에 빠져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연암집』의 「불이당기(不移堂記)」라는 글에 보면, 이인상의 전서(篆書)와 그림에 대한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글을 통해 저는 이인상과 박지원이 정신적으로 이어지는 면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실제 박지원은 이인상 및 그의 절친한 벗 이윤영을 좇아 노닐며 그림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을 알게 되면서 박지원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서는 그가 존경한 선배인 이인상에 대해 깊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공부인데, 마무리하는 데 이렇게 많은 힘과 시간이 들지는 몰랐습니다.
원래는 사상사적으로 이윤영·이인상 그룹(단호그룹)과 홍대용·박지원 그룹(담연그룹)이 어떻게 연결되고 단절되는지를 좀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공부하다 보니 이인상이 남긴 문예적 성과의 정수는 서화에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문제는 이인상의 서화는 다른 작가와 달리 이 분 특유의 ‘세계관적 근거’를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는 점인데, 기존의 미술사 연구에서는 이 점에 대한 해명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연구의 외연을 확장하면서 예술사 연구로 넘어가게 됐습니다.  
이인상의 그림과 글씨는 정신세계가 아주 높습니다. 이인상은 손재주가 아니라 ‘정신’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쓴 조선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게 문인화가의 본령이기도 하지요. 조선에는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과 같이 ‘감각’이 뛰어난 화가들도 있고 이 분들의 이런 면모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감각이 아니라 ‘정신’의 힘으로 밀고나간 이인상 같은 작가도 있는 것입니다. 감각과 달리 정신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감각과 정신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한 거 아니겠어요. 오늘날의 한국인이 이인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이인상의 서화를 통해 한국의 예술가가 도달한 높은 정신의 세계를 추체험하고 그것을 자기화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웅숭깊게 해 주지 않겠습니까. 저는 내심 그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 이인상에 대한 후대의 연구가 그동안 답보상태였던 이유와 기존 연구의 한계는 무엇인가?

이인상에 대한 기존 연구, 특히 유홍준 교수의 연구는 불모지에서 이인상에 대한 하나의 상(像)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연구는 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이런 선행 연구 덕에 가능했습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초창기 이래 지금까지의 연구는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나 자세에 있어서나 문제점과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이는 꼭 미술사연구 분야에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 수행되는 한국학 연구 일반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인상은 문학, 역사, 사상, 예술, 동아시아, 이것들이 모두 관련되어 있고, 그래서 그를 제대로 조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 역사, 사상, 예술, 동아시아, 이에 대한 공부가 통합적으로 필요합니다. 적당히 공부해서 될 일이 아니며, 철저히 파고 들어가 자기대로의 안목을 갖추지 않고서는 이인상이 도달한 정신세계에 입을 대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근본적으로 ‘연구방법론’과 ‘자세’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인상 연구가 이인상의 내면풍경과 그 예술의 핵심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근본 원인이 이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문인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시라든가 문, 그림에 붙인 제발(題跋), 그가 남긴 문집이라든가 관련 문헌을 정세하게 읽어내는 기초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기초가 대단히 허약하다는 사실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이인상의 서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시’를 미묘한 경지에 있어서까지 깊숙이 읽어내는 소양이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 미술사 연구자 중에 그런 분이 과연 얼마나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 이 두 권의 저서는 20년 연구의 결실로 이인상 그림과 서예, 전각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연구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서화연구에서는 원작을 몇 번이고 직접 보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중요한데, 그 점에 애로가 많아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이인상의 중요한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어 그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만, 거기도 1년에 한 사람이 열람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어 전번에 보았을 때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게 있어 다시 가서 좀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할 때 참 애가 탔습니다. 사설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은 특히 보기 어려웠습니다. 원작의 열람은커녕 그림의 사진 파일 하나를 얻는데 30만원씩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고충이 있었지만 이인상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그림과 글씨들은 거의 다 육안으로 본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 탐구의 결론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이인상은 당대 소외된 강경보수 지식인 집단인 ‘단호(丹壺)그룹’의 주축이었지만, 그런 성향이 독창적 예술세계를 이룩한 근본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이 점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갖는 함의가 있다면?

이인상과 단호그룹은 청나라를 배격하고 멸망한 명나라를 숭모했습니다. 이른바 ‘존명배청’입니다. 이는 당대의 현실적 맥락에서 볼 때 시대착오적인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정치의 영역에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술과 관련될 때는 문제가 간단치 않습니다. 숭명배청은 승산이 없는 정치적 입장임이 점점 더 뚜렷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알면서도 이인상과 단호그룹은 이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그 결과 비극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이 세계에서 도(道)가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비극적 세계관에서 주체성의 ‘틈새’가 생기게 된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어둡고 엄혹하고 비극적인 세계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 어떻게 자신의 내면적 가치를 끝내 지켜낼 것인가 하는 절박한 물음이 제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이인상 예술의 원점입니다. 아나크로니즘이 삶의 윤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예술의 주체적 모색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의 역설입니다. 하지만 정치와 달리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는 이런 아이러니가 의미와 능산성(能産性)을 갖곤 합니다. 그러므로 예술과 이념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진보적 이념을 소유한 작가가 예술적으로 꼭 탁월한 성취를 보이는 것은 아니며, 거꾸로 보수적 이념을 소유한 작가라 해서 반드시 저급한 예술적 성취를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정치적 세계관과 예술적 성취 간의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서는 일찍이 엥겔스가 하크니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설파한 바 있습니다.
이인상이 포함된 단호그룹과 박지원이 포함된 담연그룹은 노론의 청류 집단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역사적 연속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인상과 달리 박지원은 청을 거부하지 않고 ‘북학(北學)’, 즉 ‘청 배우기’를 주장했습니다. 박지원은 이인상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입니다. 이인상 역시 벗 김원행(金元行)에게 준 시에서 중화와 오랑캐를 함께 몰아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훗날 홍대용이 제기한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인상은 18세기 전반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나름대로 했다고 볼 수 있고, 홍대용과 박지원은 18세기 후반기의 상황에서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인상과 단호그룹의 경우 그들이 견지한 ‘비극적 세계관’으로 인해 현실과 예술 간에 극도의 긴장이 야기되고, 이 긴장감에서 다소의 예술적 주체성과 독특한 활기가 생겨나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청의 학예(學藝)를 배우고 따라야 할 전범으로 삼게 되는 19세기에는 이런 이념적 긴장감이 사라져 버리게 되고, 급기야 조선 예술의 주체성과 활기도 약화되고 맙니다.
한편, 진보와 보수의 관계는 시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며,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령 이인상은 여성과 하층민에 대해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인상 초상. 제공=돌베개
▲ 이인상 초상. 제공=돌베개

저는 이인상이 보수적 입장을 취했는가 어떤가보다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자세와 진정성에 보다 주목합니다. 그는 서얼이었지만 그 태생적 한계를 딛고 끝까지 정신을 향상시켜가며 예술에 매진했습니다. 세계와의 ‘불화’를 바탕으로 그가 어떤 예술을 창조했는지가 제 관심사였습니다. 젊은 시절 이래 저는 인간과 이념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런 관심이 이인상이라는 이념적 인간에 대한 제 연구를 추동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 그동안의 이인상 연구에서 간과되거나 잘못 인식된 많은 부분을 바로 잡고, 또한 ‘본국산수’와 같은 새로운 개념도 제시하고 있다.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그동안 통용되어온 이인상 그림의 제목은 엉뚱한 것이 적지 않습니다. 가령 제발에 ‘이 그림을 남간의 추일(秋日)에 그린다’라고 되어 있으면 그림 제목을 ‘남간추일도’라고 붙이는 식입니다. 제발의 말은 남간이라는 곳에서 가을날에 이 그림을 그렸다는 말이지 ‘남간의 추일’을 그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비슷한 사례가 허다합니다. 그림의 제목은 이래도 그만이고 저래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그림의 핵심을 응축된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는 불가피하게도 그림 제목을 바꾼 것이 적지 않습니다. 
이외에도 기존 연구에는 크고 작은 오류가 허다합니다. 이인상이 만년에 산 ‘종강’이 어딘지를 아는 것은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데, 지금껏 경기도 음죽(지금의 이천시 장호원읍 일대)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이인상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은거한 것으로 설명해 왔지요. 종강은 지금의 명동성당이 있는 북고개, 즉 종현을 말합니다. ‘남간’이라는 지명 역시 이인상의 예술을 논하는 데 아주 중요한데 지금껏 경기도 양근의 갈산 부근으로 보아왔습니다. 실은 남산의 이인상의 집 능호관이 있던 주변이 바로 남간입니다. 이인상 예술의 산실에 해당하지요. 
뿐만 아니라 그림의 해석에서도 기존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많았습니다. <둔운도>(일명 ‘와운’)와 <송변청폭도>(일명 ‘송하관폭도’)를 일례로 들 수 있습니다.

‘진경산수’라는 개념은 과잉의 이데올로기적 허구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점을 따로 좀 학문적으로 차분히 논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수를 그린 그림을 가리킬 때 ‘진경산수’ 아니면 ‘실경산수’라는 말을 씁니다.
‘진경산수’라는 용어는 조선 성리학이라든가 조선중화주의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제 연구에 의하면 이 개념은 역사적 실상과 합치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용어는 과대한 민족주의적 가치의식을 담아 널리 통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인상의 산수화를 실경산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곤란합니다. 이인상이 우리나라의 산수를 그린 그림은 흔히 말하는 실경산수와 거리가 있으며 남종산수화와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인상의 산수화를 남종산수화의 프레임으로 설명하면 이인상의 문제의식과 시공간에 대한 자의식은 온전히 해명되지 않습니다. 이인상에게 남종화와 실경의 경계는 모호했습니다. 그러니 종래처럼 남종화냐 실경이냐의 ‘경계나누기’를 넘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본국산수라는 개념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태동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종래의 진경, 실경, 남종화를 모두 포섭하며, 우리의 공동체적 삶이 영위된 공간에 대한 기억과 의식이 투사된 그림을 두루 지칭하되 그 자체로서는 가치중립적입니다.
본국산수라는 용어에는 과도한 민족주의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나라 인민의 삶이 영위되는 공간에 대한 최소한의 자의식(이런 자의식은 의미가 있으며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은 담보되어 있다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본국산수라는 용어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와 별 관계가 없다 할 것입니다.

 △ 이는 미술사학계를 향한 비판으로도 읽힌다. 기존 학계의 어떤 반응을 기대하는가? 기존 학계에 하고 싶은 말은?
 
‘진경산수’나 ‘본국산수’와 같은 개념은 일차적으로 미술사학의 영역과 관련되지만, 그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조선후기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조선후기 문학과 예술의 성취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좀 더 균형 잡히고 성숙한 정신적·지적 태도에 가까운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이 문제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한국인의 지적 전망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제가 진경산수라는 개념 대신 본국산수라는 개념을 제안한 것은 이런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혹 ‘본국’이라는 말조차도 거부감을 갖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이 말은 전통시대 동아시아 각국에서 두루 쓰인 말로서 공간에 대한 자의식은 있으되 특별한 민족적 감정과 지향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나의 판단입니다. 
아무튼 나는 기존 학계를 비판하기 위해 억지로 말을 새로 만든 게 아니며, 조선후기의 예술적 현상을 나의 학문적 체계와 지향 속에서 정당하게 해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 요즘 인문학 논란이 많다. 디지털 시대에 ‘통합인문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선생께서 생각하는 ‘통합인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 인문학의 갱신을 위한 제언도 부탁드린다.

‘통합인문학’은 제가 40대에 접어들면서 나름대로 실천해 온 것이고, 이인상을 연구하면서 좀 더 깊어졌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이인상 연구를 통해 통합인문학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통합인문학을 하면 뭐가 달라지는가, 통합인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통합인문학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가를 얼마간 보여줄 수 있었다고 여깁니다. 
통합인문학은 쉽게 말하면 전근대 동아시아 학문의 본령으로 돌아가 ‘문사철’의 경계를 허물자는 주장입니다. 동아시아의 전근대 학문을 좀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별로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문사철만이 아니라 예술까지도 통합해 인문학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요즘 학문하기에서 ‘통섭’이라는 말을 쓰는 분도 있고 ‘융복합’이라는 말을 쓰는 분도 있습니다. 이 개념들은 분과학문의 경계를 허물자는 전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제가 사용하는 ‘통합’이라는 말과 통하는 바가 없지 않지만,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차이도 있습니다. 통섭은 에드워드 윌슨의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말의 번역어입니다. 윌슨은 자신의 사회생물학을 중심에 두고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포섭을 구상했습니다. 윌슨의 학문체계에서 인문학은 생물학의 시녀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그가 생각하는 학문은 ‘유물론’적 전제에 입각해 있습니다. 융복합은 직접간접으로 자본과 산업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정신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담보되기 어렵습니다. 이와 달리 통합인문학은 그 출발점을 인간 정신의 자유와 자율성의 옹호에 두고 있으며, 인간의 전일한 정신과 의식의 규명, 인간적인 삶의 옹호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 도래한 디지털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초연결’입니다. 통합인문학은 이런 상황에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하나의 유력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통합인문학은 인간이 점점 몰주체화되고 기계에의 종속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인간성과 인간다움을 옹호하고 환기하는 중대한 학문적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문학, 역사, 철학, 예술을 가로지르는 통합적 연구를 수행하면 우선 한국학문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지적 전망이 넓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 인간과 삶,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력이 깊어지고 커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창발(이머전스)이 가능해집니다. 분과학문에서는 창발이 좀처럼 나오기 어렵습니다. 상이한 정신적인 영역들이 통합적으로 관계맺어질 때 비로소 새로운 차원이 열리고 창발이 이루어집니다. 높은 창조와 상상력이 가능해진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디지털문명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고 통합되는 추세에 있습니다. 통합인문학은 ‘비판’과 ‘사유’를 중시합니다. 통합인문학은 AI가 수행할 수 없는 창의적이고 비판적이며 종합적인 연구를 수행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에 이르고자 합니다.

△ 앞으로의 연구계획이나 집필계획은?

▲ 박희병 교수.      사진제공.출처=한겨레신문
▲ 박희병 교수. 사진제공.출처=한겨레신문

올해부터 『한국고전소설사』라는 책을 집필하려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머릿속에서 구상해 온 책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소설사와는 체계나 문제의식을 달리하는 아주 새로운 소설사를 쓰고자 합니다. 이 저술 역시 통합인문학적 방법을 추구합니다. 새로운 인간형이 소설사에 등장하는 과정과 연유와 의미, 그리고 이를 작품에 담아내는 작가의식의 문제, 지성사적 환경, 이런 것이 제 주된 관심사입니다. 이 점에서 제 소설사는 지성사를 겸할 것입니다.

이인상 연구는 18세기 예술사에 대한 연구입니다. 소설사 집필이 끝나면 이인상 연구를 토대로 19세기 예술사에 대한 연구를 시도할 생각입니다. 이인상 공부를 하면서 이미 추사 김정희에 대한 공부는 해왔습니다. 종전에는 김정희로부터 소급해 한국 미술사와 지성사를 보아 온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만, 저는 단호그룹, 즉 이인상 그룹으로부터 내려와 김정희를 보고자 합니다. 김정희의 상(像)을 좀 달리 잡아보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제 학문의 총정리가 될 ‘조선후기 지성사’로 수렴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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