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운 한국고전번역원장 인터뷰] “사람의 모든 건 言錄과 行錄으로 정리되는 것”...“한문 문화를 한글 문화로 바꾸는 게 번역원의 所任”
[신승운 한국고전번역원장 인터뷰] “사람의 모든 건 言錄과 行錄으로 정리되는 것”...“한문 문화를 한글 문화로 바꾸는 게 번역원의 所任”
  • 양도웅
  • 승인 2018.10.0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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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寬路서 새 시대 여는 한국고전번역원 신승운 원장 

"有志者事竟成." 사람이 하고자 하는 뜻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마침내 이룰 수 있다. 이 문장처럼 신승운 한국고전번역원장의 삶을 표현한 말은 따로 없을 것이다. 신 원장은 남다른 추진력으로 어지러이 놓여 있던 우리 고전을 『한국문집총간』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마침내 그 방대한 작업을 해내고만 신 원장의 뜻이 궁금했다. 최근 번역원 청사에서 만난 그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인터뷰·정리=양도웅 기자 doh0328@kyosu.net

신승운 원장이 즐겨 인용하는 문장은 “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有非常之事 然後有非常之功”이다. 인터뷰에서 그가 언급한 최치원의 「西川羅城圖記」에 있는 문장이다. 그는 또한, 이 문장을 비틀어 “특별한 일은 특별하게 다뤄야 한다”를 즐겨 사용한다.

△1951년생 △경기도 양평 △성균관대 문학박사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구부장·편찬실장·교무처장·국역연수원 부교수 △한국서지학회장 △한국고전번역학회 회장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성균관대 한문고전번역 석박통합과정 주임교수 △성균관대 한국사서교육원장·대동문화연구원장·동아시아학술원장 △세계기록유산한국위원회 위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겸 문화정보분과위원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성균관대 명예교수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택시 기사는 위치를 몰랐다. 초행길이라 땀을 뻘뻘 흘리며 탑승한 기자에게 도리어 위치를 물었다. 황급히 스마트폰에서 한국고전번역원(이하 번역원)을 검색했다. 은평구 진관 1로 85. 메뚜기다리를 지나 좌회전하니, 탁 트인 시야에 세련된 건물이 눈에 띄었다. 지난 6월부터 공식 업무를 시작한 번역원 新청사였다. 여러 동의 건물을 얼기설기 이은 듯한 종로구 구기동의 舊청사가 떠올라 놀라움이 일었다. “여기 맞나요?”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의실로 빠르게 올라갔다. 신청사 이전 기자간담회가 막 시작할 참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흐른 9월 12일. 연신내역에서 전보다 익숙한 몸놀림으로 택시에 올랐다. 행선지를 말하자 “진관로에 있는 새 건물 말씀하시는 거죠?”라는 택시 기사의 반문이 돌아왔다. 진관내천을 지나 낯익은 번역원 신청사에 다다를 무렵, 택시 기사는 “여기가 옛날 문헌들을 번역하는 곳인가요?”라고 물었다. 괜히 반가워 “『조선왕조실록』 아시죠?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한 곳이 이곳입니다”라고 답했다. 현재 번역원은 지난 1993년에 번역 완료한 『조선왕조실록』을 재번역, 현대화하고 있다. 

주민들의 환대, 번역원의 배려

행선지가 번역원인 손님을 많이 태웠을 수 있다. 아니면 한 달 전 택시를 다시 탄 것일 수도. 지난 기자간담회에서 최영록 홍보전문위원이 건넨 말이 떠올랐다. “주민들이 이곳에 번역원이 들어온 걸 많이 좋아하더라고요. 새롭게 들어선 아파트가 많은데, 번역원이 커뮤니티센터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현재 진행하는 ‘하계 한문특강’에도 주민 몇 분이 참여하고 있고. 우리 구내식당 밥이 저렴하고 맛있다는 소문이 나, 여기서 점심 식사하는 주민들도 많이 있습니다.” 은평구에는 거주한 지 오래되지 않은 주민들이 많다. 주민들은 자신처럼 꿈을 갖고 은평구에 정착한 번역원에 점차, 더욱 마음을 여는 걸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번역원에 들어서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도서관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기자간담회에서 신승운 원장은 1층 로비 바로 옆에 도서관을 설치한 이유로 접근성과 편의성을 들었다.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도서관을 설치했습니다. 또한, 번역원을 오고가는 사람들이 도서관에 큰 용무가 없더라도 편하게 들를 수 있도록 1층에 설치한 것이죠.” 

도서관 초입에는 신라시대 최치원(857∼?)의 문집부터 조선시대 노상직(1855∼1931)의 문집까지, 1000년이 넘는 우리 고전의 역사를 총망라한 『한국문집총간』(정편 663종 350책, 속편 596종 150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1986년에 기획·시작해 2012년에 완간했으니 약 27년이 걸린 大작업의 결과물이다. 이 至難한 세월을 견뎌야 하는 일, 그래서 선뜻 누구도 실행할 생각을 못한 일을 서른 중반에 기획한 이가 신 원장이다. 지난 2017년 고향으로 ‘금의환향’한 국역연수원(현 고전번역교육원) 1기 출신의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원장실로 향했다.   

진관로에 들어선 번역원 신청사.
진관로에 들어선 번역원 신청사.

“방법이 바뀌지 않으면 결과가 바뀌지 않습니다”

“고전 얘기가 좀 어렵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잘난 체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선생 노릇만 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신 원장은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고전을 주제로 이야기할 때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더군다나 이 인터뷰는 한문(한자)과 한글에 익숙한 세대, 한글과 영어에 익숙한 세대의 만남이기도 했다. 

멀게는 1894년의 갑오개혁, 가깝게는 1970년대부터 본격화한 한글전용 정책은 불가피한 면도 있었지만, 한문만 놓고 봤을 때 역사의 단절, 문화의 단절, 세대의 단절을 초래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전의 한글화를 본격 고민하고 추진한 시점도 1970년대였다. 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이하 민추)가 국역연수원 1기생을 선발한 해가 1974년이다. 한문 문화와 한글 문화의 단절을 잇는 가교 역할을 민추와 번역원이 맡은 것. 신 원장은 여러 인터뷰에서 “한문 문화를 한글 문화로 바꿔놓는 게 번역원의 소임”이라고 밝혔었다. 

그럼 이 인터뷰의 첫 번째 가교 역할을 무엇으로 삼아야 할까? 이제 갓 임용된 젊은 교수들이 敎授法에 목말라 한다는 게 떠올랐다. 신 원장이 어떻게 배웠고 가르쳤는지가 궁금했다. “국역연수원 1기생 시절, 한국의 마지막 선비라는 분들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조규철, 신호열, 성낙훈, 임창순, 이가원, 이식 선생 등…. 성 선생님의 『자치통감』 수업을 예로 들면, 선생님은 본인이 절대 읽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학생들이 읽도록 했어요. 그러다 학생들의 독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진도를 나가지 않고 야단을 쳤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사전도, 번역본도 변변치 않을 때다. 학생들의 머릿속에는 수십 개, 수백 개의 질문이 떠다녔을 텐데. “그렇다고 마음 편히 질문할 수 없었습니다. 떠오르는 대로 질문하다가는 ‘네가 찾아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을 왜 내게 묻냐, 내가 네 심부름꾼이냐, 네가 열심히 찾아 생각해봐도 모르는 것을 내게 물어야 할 것 아니냐’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으니까. 수업 준비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배움과 가르침의 현장에 학생의 질문과 선생의 답변이 없을 순 없다. 선생이 자신의 지식을 학생에게 힘껏 내놓은 때는 언제였을까? “선생님의 꾸지람은, 가르침을 얻기 위해 질문할 때는 학생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이 질문에 담겨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죠. 질문은 자신이 해볼 수 있는 걸 다 해본 다음에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학생의 고뇌가 담긴 질문이 있을 때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쏟아 정성껏 답해주셨습니다.”

지난 2014년에 출간된 『주석학개론』이
이 수업의 결과물이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신 원장에게 요즘 대학교와 대학원 강의실 모습은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신 원장은 1995년부터 2016년까지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에서 20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요즘 학생들은 알기 쉽게 설명해 떠먹여 주는 걸 원합니다. 대부분의 학생이 질문을 아예 하지 않거나, 질문을 하더라도 전혀 준비되지 않은 질문을 하고요. 안타까움도 들고, 화도 나고 그랬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신 원장은 학술대회처럼 대학원 수업을 진행했다. 꼼꼼하게 매 수업의 발표자와 토론자를 정했고, 발표자와 토론자가 원전 번역 및 해석을 두고 토론을 하는 게 수업의 첫 번째 순서였다. 다른 학생들은 발표자와 토론자가 충분히 논쟁한 뒤에 참여했다. 신 원장은 수업 마지막에 평가와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수업을 이렇게 하면 아주 지겹게 됩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배우게 되죠. 배움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뒤에, 좀 더 배운 사람에게 귀띔 받는 겁니다. 방법이 바뀌지 않으면 결과가 바뀌지 않아요.”

察古知今, 今은 현재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레 이야기가 고전의 ‘쓸모’로 흘러갔다. 배움의 대상은 항상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이다. 하지만 그 과거의 것이 그저 낡기만 한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바로 여기에 고전의 역할과 힘이 있다. “知的으로 가장 앞서 있는 자가 쓴 것이 책입니다. 그런 책 가운데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의 비판을 견뎌낸 책이 바로 고전이죠.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전을 공부하고 토론해서 고전이 가진 한계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고전이 가진 한계를 파헤쳐야 한다. 신 원장은 재차 이 점을 강조했다. “젊어서 배우는 이유는 장성해서 그 배운 것을 쓰기 위함입니다. 지적으로 앞서 있다는 사람이 쓴 책을 읽고 그저 따라만 하면, 그 사람과 그 책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훌륭한 과거를 반복만 한다고 과거를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고전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진일보한 미래’를 얻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 원장을 지켜본 이들이 그를 가리켜 ‘進取的’이라고 묘사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진취적, 적극적으로 나아가 일을 성취해내는 것. 방향은 전방, 미래다. 신 원장은 고전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로 고전이 써진 형식을 덧붙였다. “고전은 사건의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 결과에 따른 後果까지 동시에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것만 보면 현상과 과거만 알 수 있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察古知今, 오해하지 말아야 할 건 지금에는 현재와 미래가 포함돼 있습니다.” 

우리 역사를 甦生시키는 일-경우의 수를 늘리는 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알아야 한다. 이 보편적 진리가, 하지만 우리에겐 좀처럼 실현하기 어려운 말이다. 우리의 오랜 과거가 한글(현재의 주류 언어)이 아닌 한문으로(과거의 주류 언어) 쓰여 있기 때문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문서를 한글로 작성하기 전, 우리의 정치·경제·외교·과학·문화와 관련된 일은 모두 한문으로 기록했습니다. 이 방대한 양의 한문 문화를 한글 문화로 번역하는 일, 그럼으로써 우리의 콘텐츠 총량을 늘리는 일이 번역원의 소임입니다.” 철지난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말이 아니다. 虛張聲勢도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두 가지 언어로 살아왔다. 하나의 언어만을 고집하면 과거나 현재를 잃게 된다. 그것은 지나치게 다른 문화에 의존하게 만든다. 

여기서 신 원장은 고전 번역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그럼에도 고전이 현실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합니다. 판단과 결정은 그동안의 견문을 통해 축적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축적한 지식에 우리 것은 늘 빠져 있어요. 우리 것이 없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言錄과 行錄은 모두 글로 정리되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이 땅에 살던 우리 선조들의 경험과 사유가, 현재 우리의 판단과 결정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서양의 문화와 지식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앞으로는 우리의 문화와 지식을 추가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고전의 현대화가 필요한 것이죠.”

분명, 근대 이후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서양이 축적한 경험과 지식이었다. 우리는 서양의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현재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논쟁의 출처도 대부분 서양이다. 만약 이것이 잘못됐다며 우리 것만 고집한다면, 그것은 구시대적인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하지만 신 원장은 우리 것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우리 것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경우의 수’를 덧붙였다. “한문 문화를 한글 문화로 번역함으로써 우리의 콘텐츠 총량이 늘어나면, 우리가 어떤 어려운 판단을 할 때 참고할 만한 사례가 풍부해지는 겁니다. 고려할 만한 경우의 수(사례의 수)가 많아지는 것이죠. 현명한 판단을 이끄는 사례가 많아지는 겁니다.”  

“우리 가슴에 우리 고전을”

경우의 수를 늘리기 위해 신 원장과 번역원이 고전 번역에만 집중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번역원은 번역해야 할 원문을 정리해 하나의 ‘그릇’ 안에 담는 일을 우선했다. 중국 청나라 때 건륭제가 지시해 편집된 『四庫全書』처럼. 그 그릇은 바로 『한국문집총간』이다. 현재 『한국문집총간』은 17%가량 번역된 상태다. 뿐만 아니라, 고전을 한글로 번역해도 고전에 익숙지 않은 비전문가는 그 뜻을 명쾌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 점을 고려해 번역원은 한국고전선집·어린이 도서·교양 도서로 세분화해 고전대중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하계 한문특강도 고전대중화 사업의 일환이다. 

신 원장의 비유를 옮기면, 번역원은 밀(『한국문집총간』)도 재배하고 밀가루(번역 작업)도 만들고 빵(대중화 사업)도 생산한다. 최근엔 남북 화해 국면에 발맞춰 세계기록유산인 『승정원일기』의 남북한 공동 번역과 공동 학술대회 개최를 추진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신 원장을 오래 지켜본 이들은 그를 가리켜 ‘기획의 귀재’ ‘번역원의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부른다. 번역원의 굵직굵직한 사업 가운데 그가 기획하고 완성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번역원 앞뜰 표지석에 새겨진 ‘우리 가슴에 우리 고전을’도 신 원장이 1983년에 고안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최종 목표, 꿈이 궁금했다. 그는 자신의 중학생 시절을 들려줬다. 

“중학생 시절, 제 옆방에 초등학교 선생이 묵었습니다. 영어 선생은 아니었는데 늘 <TIMES> 같은 영자지를 읽었어요. 그 선생이 늘 듣던 라디오에서는 ‘셰익스피어가 말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같은 말들이 나왔고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말은 안 나오지? 우리가 부족한가? 어리석은가? 세종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훌륭하다면서, 왜 그들이 한 말은 없는 거야? 제 최종 목표는 우리가 글을 쓸 때, 혹은 적재적소 필요한 말을 할 때, 전부 우리 것으로만 하면 촌스러우니까, 적어도 10개 중에 2∼3개는 우리 것을 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겁니다. ‘칸트가 말하기를’ ‘니체가 말하기를’ 이렇게 시작하는 게 아니라 ‘최치원이 말하기를’ ‘김시습이 말하기를’ 이렇게 시작하도록 말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가슴에 우리 고전을’에 담긴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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