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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 유역은 국경선, 현재 압록강은 후방 방어선”
“요하 유역은 국경선, 현재 압록강은 후방 방어선”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9.10 13: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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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터뷰_ 고려국경 새 주장 펼친 윤한택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

올해로 고려건국 1100주년을 맞아 학계 곳곳에서 학술대회를 비롯한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고 개별 연구자들의 연구성과들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고려토지제도를 전공한 윤한택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 역시 지난달 『고려 국경에서 평화 시대를 묻는다』(THE PLAN, 2018.08)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윤 연구교수는 고려 국경이 요하 부근이었다는 주장에 새로운 근거로 두 개의 압록강설을 제시했다. 주류사학계에서 이런 주장은 국수주의로 취급돼 왔다. 윤 연구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 평화 단계에 접어든 남북관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한반도기가 일제의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반도사관이라고 비판한다. 동국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사진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경제학으로 학부 전공을 했는데 역사학(고려토지제도)으로 박사를 했다.
서울대 경제학과 70학번이다. 경제학 전공에서 역사학으로 가게 된 이유를 말하자면, 경제사 공부를 했는데,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서양학문이 베이스라, 전통의 우리 학문을 하자는 생각에 국사학과로 옮겼다. 그때 한창 자본주의 맹아론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선후배들이 다들 근현대사를 하기에, 나는 반대로 거슬러 올라간 거고, 토지제도 문제를 연구하다보니 고려시대까지 가게 됐다.

△외교 문제는 결국 토지문제라고 주장한다.
동국대에서 프로젝트를 했다. 1876년 운양호 사건부터 1910년까지의 중·일·러 외교문서 번역하는 일에서 중국 관련 문서를 분석했다. 이후 인하대에서 관련 연구를 이어가다보니 조선사 정밀해제가 제대로 안 됐더라. 내가 고려사가 전공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연결됐는데, 결국 외교 문제는 토지 문제로 연결이 된다는 걸 조선사와 고려사를 함께 보면서 알게 됐다.

△이번에 확정한 고려국경의 근거로 두 개의 압록강을 들었다. 근거한 사료는?
압록강의 ‘록’자가 다르다. 우리가 아는 건 ‘綠’다. 시기를 918년부터 200년 동안으로 한정해볼 필요가 있다. 거란 침입, 서희의 강동6주 사건과 1033년 천리장성이라 불리는 북경관방 건축 사건이 있었다. 1084년에 쓰인 『요사(거란사) 병위지』를 찾아보니 ‘?’이라고 써 있더라. 요사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에 의해 국가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요사』, 『금사』, 『송사』가 동시에 만들어졌다. 1343년에 고려사에 무슨 기록이 나오냐면, 원나라 황제 비서실에 해당하는 직성의 실득이 고려에 와서 보유한 송, 요, 금 관련 사적을 요청하고 수집해서 가져간다. 이 자료의 근거가 고려사의 『대요사적』이라고 쓰여 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줄 수 있나?
주류학계에서는 붓으로 쓰면 록의 실사변이 삼수변과 비슷해진다고 주장한다. 나는 다른 거라고 본 거고 그걸 증명할 사료를 찾다 보니 1084년 『요사 병위지』를 찾은 거다. 거기에 압록강 주변의 주요 거점을 써뒀는데 지명들이 있다. 거란 동경이 요양, 개원 또 하나가 황룡부인데, 그러니까 압록강은 요양, 개원, 황룡부 거점이 이어지는 곳이다. 그 주변에 가타영, 유백영 등의 군영 이름이 나오고 70여개의 군 초소가 나온다. 초소 하나에 20명씩 배치가 돼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개원, 황룡부 같은 헤드쿼터에는 몇 천명씩 있으며, 총 2만2천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지금 와서 고려국경을 수복하자는 말이 아니라, 영역국가에서 경계국가로의
이행을 보자는 거다. 영역확장은 전쟁의 시대, 부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시대다.


△기록이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주류학계에서 밝혀지지 않은 건가?
고려 국경을 보려면 요사를 함께 봐야 하는데 요사를 안 본 건 아니었다. 조선 후기 학설도 봤고, 일제 때 식민사학자들의 연구도 봤다. 하지만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간도협약으로 압록강, 두만강을 두고 시작하니 사료를 봐도 잘 안보였던 것 같다. 대표적인 사람이 일본학자 쓰다 소키치다. 우리 학계 역시 오랫동안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다. 『아방강역고』를 비롯해 모든 논의에서 요사 자체를 무시한다. 그 이유는, 너무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역사서라 오류가 많기에 인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요사에 틀린 부분도 있겠지만, 918~1118년 시기의 고려국경을 다루려면 고려에 가장 가까웠던 지역을 기록한 역사서를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학의 고정 방식에 근거하면, 시간적, 공간적 봐야 하는데 그걸 무시한 다산의 의견이 해방이후 남한 역사학계를 지배한 거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거스를 수 없었던 것도 한 배경이었을 것으로 본다.

△어떻게 압록강이 두 개가 된 건가?
어떤 의미로 후대에 와서 자꾸 잘려나갔는가 이 문제를 제기해야 문제가 풀린다. 추론이긴 하지만, 거란과 고려의 싸움을 3~5차 동안 하면서, 국경지대에 쭉 배치돼 있었던 용주·통주·철주·귀주·각주·흥주 같은 곳, 요하 주변에 있는 6주의 이름이 그대로 평안도로 온다. 그래서 평안도에 강동6주를 박아 둔 거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인가? 고려국경체계가 특이하다. 이 6개 지역을 끝까지 방어하다가 후에 군사를 편제하고 후방 방어기지로 이름을 가져온 거라고 본다. 국경지역이니 백성들이 상주는 못하지만, 고향이기에 끊임없이 명절에 성묘도 하고, 그래서 가져오는 거다. 내부로. 그렇게 안시성이 고려 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고 그걸 조선 학자들이 다 지워버린 거다. 결론적으로 나는 요하 유역은 국경선, 현재 압록강은 후방 방어선이라고 본다. 금 시기까지는 이게 유지되다가 흐려졌다. 금의 시선이 중국 내부를 더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딕트 엔더슨은 국가를 상상된 공동체라고 말했다. 이 연구가 현재에 어떤 면에서 유의미한가?.
국가는 상상된 공동체 이상이다. 지배의 도구지. 다만 일제를 통해서 우리 강역이 어떻게 좁혀져 들어가는가,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우리의 국경을 스스로 어떻게 줄여가는지를 살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토지제도가 아닌 국경이 되는 것이다. 고려국경에 대한 학문적 고증이 이뤄지고 국경이 회복돼야 식민사관이 더 반복되지 않을 것 아닌가. 지금 와서 고려국경을 수복하자는 말이 아니라, 영역국가에서 경계국가로의 이행을 보자는 거다. 영역확장은 전쟁의 시대, 부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시대다. 그 시기를 지나서 생산력 발전 이뤄지고 하면, 그 위에서 경계의 의미가 더 중요해진다는 건데, 경계에는 부와 권력을 극복하려는 관점이 있다. 자연지리에 근거한 인문지리의 적정한 수준을 찾고, 미래시대 나아갈 방향을 더 찾아보는 것이다. 경계국가의 의미에서 고려국경을 찾는 것에는 분명 미래지향성이 있다.

△후속연구 계획은?
앞으로 역사지리 더 해야 할 것이다. 다산과 임상득의 『동사회강』, 한치윤의 『해동역사』 같은 사료를 더 정밀하게 연구하고, 조선후기 실학자, 성리학자들의 주장을 좀 더 체계적이고 비판적으로 정리하고 싶다. 그들의 주장이 일제 식민사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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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환 2018-09-11 15:33:49
"국경지역이니 백성들이 상주는 못하지만, 고향이기에 끊임없이 명절에 성묘도 하고, 그래서 가져오는 거다. 내부로. 그렇게 안시성이 고려 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고 그걸 조선 학자들이 다 지워버린 거다. " 갑자기 안시성이 나온 배경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