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2:10 (금)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1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 21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3.06.13 00:00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和樂能成實', 5·16의 운명을 예견한 예언자의 새벽 목소리

▲'5.16을 어떻게 볼까'를 집필했던 시기의 함석헌 /

<제 발이 5천년 아파도 아프단 소리 못하고 슬퍼도 목을 놓고 울어도 못 본 이 민중을, 이제 겨우 해방이 되려는 민중을 또다시 입에 굴레를 씌우지 마라. 정신에 이상이 생겼거든 지랄이라도 맘대로 하게 해야 될 것이다. 4·19 이후 첨으로 조금 열렸던 입을 또 막아? 언론 자유주의니, 남북협상 소리 나오더라도 성급한 소리를 마라. 그 원인 거기 있는 건 아니다. 얕은 수작 마라. 또 협상 무섭다 할 것 있느냐? 우리 자식들이 저것들의 설득이 아니라 혼의 실력으로 누를 수 있도록, 누르는 것이 아니라 녹여버릴 수 있도록 한번 길러보자꾸나. 군인이 왜 그리 기백이 없느냐? 나는 공산당 터럭만큼도 무서운 것 없더라.>

<혁명은 사람만이 한다. 학생은 사람 아니다. 그러므로 먼젓번에는 실패했다.
군인도 사람 아니다. 그러므로 이번도 군인이 혁명하려 해서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리냐? 학생은 그 혁명 4월에 했듯이 사월의 잎이다. 사월은 잎피는 달이다. 잎은 나무가 아니다. 잎이 나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잎을 피운다. 학생은 잎처럼 푸른 것이다. 4·19의 정신 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녹색정신, 그 평화주의, 그 비폭력주의, 그 공명정대주의, 늘 자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잎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요, 나무로서만 하는 것이다. 민중의 덕은 목덕(木德)이다. 나무의 산 것이 앞에서 발단하지, 자엽(子葉)부터 나오지, 하지만 마침내는 나무가 서야한다. 학생이 시작했지만 혁명은 민중의 혁명이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4·19, 4·19, 서로 주고받는 빈 칭찬 아첨, 나쁜 이용, 쓸데없이 부푼 가슴뿐이었지 민중운동이 되지 못했다. 거기에는 민주당, 혁신당의 죄가 많지만 그래도 역시 따지면 결국 저 자신의 죄였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월은 꽃달 아닌가? 5·16은 꽃 한번 핀 것이다. 꽃은 찬란하기가 잎의 유가 아니다. 저번은 젊은 목청으로 외쳤지만 이번은 총칼과 군악대로 행진을 했고 탱크로 행진했다. 그러나 잎은 영원히 남아야 하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는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화락능성실(花落能成實)이다. 꽃은 떨어져야 열매 맺는다. 5·16은 빨리 그 사명을 다하고 잊혀져야 한다. 노량진두에서 많지는 않지만 흐른 피는 그 알고 모르고를 물을 것이 없이 전국민이 스스로 흘려 역사의 제단에 바친 것이다. 그것은 부득이하여 한 번 잠깐 할 것이요, 될수록은 없어야 하는 것이요 있다 하여도 곳 잊어야 하는 것이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아무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성의로 했다 하여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선이라 하더라도 또 사실 민중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의는 아니다. 강아지를 아무리 잘 길러도 그것이 참 사랑은 아니다. 참 사랑은 내가 저를 좋아할 뿐 아니라 저가 또 나를 좋아 하도록 되어야 하는 것이다. 민중을 동물로 사랑하고 기르고 불쌍히 여겨도 성의는 아니다. 그는 때리면서라도 사람으로 대접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민중 내놓고 꾸미는 혁명은 참 혁명 아니다. 반드시 어느 때 가서는 민중과 어그러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즉 다시 말하면 지배자로서의 본색을 나타내고야 만다. 그리고 오래 속였으면 속였을수록 그 죄는 크고 그 해는 깊다.>

우리는 위의 글이 1961년에 쓰여진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5·16을 어떻게 볼까'(전집 17:125-136)라는 글에서 발췌한 글이다. 지금부터 40여 년 전의 글이다. 이 글에 비추어 40여 년이 경과한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는 이 글이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자의 사자후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군사독재시대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이 나라의 수구파들이 만약 이 글을 읽는다면 간이 서늘해지지 않을까? 이 글을 통해서 그들은 앞으로 반세기 후의 이 나라의 정체를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은 숨을 쉬는 것이다. 국민은 김이 빠지는 데가 있어야 한다. 그 김 빠지는 데가 언론, 유언비어다. 방귀가 나가야만 살 듯이 국민도 기운을 빼는 데가 있어야 한다. 파고다 사직동 그 밖의 곳곳의 잡담터가 있음으로 그나마 서울이 생명을 유지한다. 그것 없으면 축구공처럼 터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질식되어 버리고 만다. 민중의 입을 막고 말썽없는 정치를 하려던 앞의 치들의 운명이 어떤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러기 때문에 민주주의라고 한다. 떠도는 소리일수록 들어주어야 한다. >
나는 5·16의 새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군인들은 각자 자기의 근무처로 되돌아 가라"는 당시 매그루터 UN군 사령관의 반복되는 라디오 방송을 나는 지금도 귓전에서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이 나라의 실질적 통치자 장면총리는 그 향방이 묘연했다. 서양사학자 노명식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라디오 방송소리

<4·19 학생혁명의 결과로 수립된 장면(張勉) 정부는 내각 책임제의 민주주의 정부였다.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 책임제의 민주주의 정부였는데, 그 폐단을 시정한다는 취지에서 내각 책임제를 채택하였다. 다시 우리나라의 여러 사정에 비추어 볼 때 내각 책임제가 과연 대통령책임제보다 우리 실정에 더 적합한 것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끝없는 논쟁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장면정부가 5·16 군사쿠데타를 막지 못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내각책임제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제2공화국이 좀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였었더라면 5·16과 같은 군사 쿠데타는 미리 봉쇄할 수 있었고 또 쿠데타가 일어났더라도 능히 분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5·16군사 쿠데타는 일어나야 할 하등의 역사적 정당성이 없었는데도 결국 그것이 성공한 이유는 장면정권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노명식 엮음 '함석헌 다시읽기' 606쪽)

함선생님 자신이 이 글을 <3년 전 이 밤에 잠 못자고 한 생각 말했더니 "나라 없는 백성이라"했다고 이 나라가 나를 스무 날 참선을 시켰지. 이번엔 또 무슨 선물 받을까?> 라고 마무리한데서 볼 수 있듯이 투옥을 각오하고 발표했던 이 글로 침체의 나락에 빠져 있었던 함석헌은 미국 3개월 시찰이라는 미국 국무성 초청을 뜻하지 않게 선물로 받게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의순 2003-06-20 12:12:49
김선생님께
항상 건강하셔서 그렇게 꾸준한 활동을 하시고 좋은 글을 쓰시니 저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내가 본 함석헌'을 통하여 제가 잘 모르던 부분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한 것이 저에게 많은 가르침이 되어 감사합니다.
지난 번 선생님을 뵈었을 때, 어떻게 쓸까 하며 고민(?)하시던 함선생님의 그 문제를 어떻게 그렇게 잘 처리하셨나 감탄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서 쓰신 글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번 호의 글에 실린 함선생님의 사진은 54년도로 기억되는데 그때 양평 용문산에 가서 은행나무 아래에서 찍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옛날 생각이 바로 어제 일같이만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어머님께서는 어떠하신지요.
선생님과 사모님의 건강하심을 빕니다.
강화에서 윤 의 순

윤의순 2003-06-20 12:11:25
김선생님께
항상 건강하셔서 그렇게 꾸준한 활동을 하시고 좋은 글을 쓰시니 저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내가 본 함석헌'을 통하여 제가 잘 모르던 부분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한 것이 저에게 많은 가르침이 되어 감사합니다.
지난 번 선생님을 뵈었을 때, 어떻게 쓸까 하며 고민(?)하시던 함선생님의 그 문제를 어떻게 그렇게 잘 처리하셨나 감탄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서 쓰신 글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이번 호의 글에 실린 함선생님의 사진은 54년도로 기억되는데 그때 양평 용문산에 가서 은행나무 아래에서 찍은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옛날 생각이 바로 어제 일같이만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어머님께서는 어떠하신지요.
선생님과 사모님의 건강하심을 빕니다.
강화에서 윤 의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