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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간 경쟁 무의미한 시대”, 절대평가가 돌아온다
“학생 간 경쟁 무의미한 시대”, 절대평가가 돌아온다
  • 이해나
  • 승인 2018.04.02 1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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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대학 학점 절대평가제 도입 잇따라

 

「나눔리더십」은 이화여대(총장 김혜숙)의 필수교양 과목이다. 학교 홈페이지에서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며, 소통과 나눔의 품성을 함양하고, 공존과 나눔의 리더십이 배양될 수 있도록 다양한 이론교육과 실천교육을 병행하는’ 교양 교과목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화여대 A 교수는 “나눔리더십은 특히 학생 모두 열심인 과목”이라며 “수학처럼 옳고 그름을 명확히 판별할 수 있는 과목이 아니라 상대평가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A 교수 같은 사례는 올해부터 이화여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전망이다. 이화여대 교무처는 지난달 19일 “올해 학부 과정 전체 교과목 성적 평가를 교수자율평가로 시범 운영한다”고 밝혔다. 이화여대 측은 “교수자율평가란 담당 교수가 교과목 특성에 맞게 성적 평가 방식을 정해 성적을 부여하는 방식”이라며 “학생의 과목 수강이나 교수의 성적 평가 등 대학의 주요 학사 제도에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선진 제도”라고 설명했다. 특히 나눔리더십 수업은 절대평가제 시행이 결정됐다.

이화여대는 그간 전체 수강생의 35% 이내로만 A 학점을 부여하고, A와 B 학점을 합친 비율은 전체 수강생의 70% 이내로 제한하는 상대평가제를 실시해 왔다. 교수자율평가 도입에 따라 교수는 상대평가나 절대평가 가운데 택일하거나 두 방법을 절충해 학점을 매길 수 있다. 교수가 상대평가를 선택해도 성적 등급별 인원 제한이 없으며, 평가 비율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 사실상 절대평가인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이화여대 4학년 재학생은 “주변에서는 성적을 좀 더 잘 받을 기회라며 반기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는 그러나 “상대평가 덕분에 성적을 오히려 잘 받았던 과목도 있었다”며 “상대평가제 하에서는 B 학점을 일정 부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B 학점 정도는 받을 수 있던 과목에서 더 낮은 학점을 받게 될까 걱정된다는 반응도 있다”고 말했다. 이화여대는 1년간 교수자율평가를 시범 운영하며 개선점을 찾아 보완할 예정이다.

“절대평가제는 학생과 교수 모두 존중하는 제도”

공고했던 대학 내 학점 상대평가제에 손을 대는 대학은 이화여대뿐만이 아니다. 서울대(총장 성낙인) 역시 절대평가제를 도입했다. 올해부터 서울대 기초교육원(원장 이재영)은 ‘글쓰기’ 수업의 성적을 절대평가 방식으로 매긴다. 지난해 2학기부터는 ‘타학과(부) 전공교과목 평가방법 선택제도’도 시범 운영 중이다. 타 전공 교과목 수강 시 최대 9학점까지 등급제(A~F) 대신 급락제(S/U)로 성적 평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다. 급락제란 교과목의 성취 목표를 충족하면 S(Satisfactory·及), 그렇지 못할 경우 U(Unsatisfactory·落)를 부여하고, S 또는 U를 받은 과목은 학점 평균 계산 시 제외하는 제도다. 서울대 측은 “전공 계열별로 분리된 교과 과정을 넘어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기반을 둔 융합·통섭형 인재 양성이 필요해 도입하게 됐다”고 밝혔다. 

고려대는 염재호 총장의 공약에 따라 2015학년도 2학기부터 절대평가제를 도입했다. 2017학년도 안암캠퍼스 기준 절대평가 강좌 비율은 66.5%에 이른다. 절대평가제의 단점으로 지적되는 ‘학점 인플레이션’ 현상이 벌어지진 않았을까. 고려대 교무팀 관계자는 “현격한 학점 상승은 없었다”고 말했다. 절대평가제 도입 이전인 2013학년도부터 현재까지 학점을 분석한 결과 절대평가제로 인한 인플레이션 현상은 관찰되지 않았다는 것. 자율권이 보장되므로 교수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라는 후문이다. 
고려대 교무팀 관계자는 “절대평가제 도입 취지는 학생을 ‘줄 세우기’보다 학업 성취도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라며 “학생과 교수 모두를 존중하는 제도”라고 말했다.

“개인 간 경쟁보다 목표와 경쟁 부추겨야”

상대평가제는 2004년 서울대가 교양과목에 도입한 이후 주요 대학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허남진 서울대 교수(철학과)는 상대평가제가 대학 사회에 빠르게 뿌리내린 배경의 원인으로 학부제 선발과 학점 인플레이션 현상을 꼽은 바 있다. 2000년대 초반 신입생 모집 단위가 학과에서 학부로 변경되면서, 소위 인기 학과 진입 기준으로 학점이 중요해졌다. 한편으로는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일부 교수들의 ‘학점 퍼주기’ 현상이 벌어졌고, 학점을 신뢰할 수 없다는 기업의 항의가 계속됐다. 두 가지 현상이 현재처럼 엄격한 상대평가제를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김신영 한국외대 교수(교육학과)는 “이제는 누가 누구보다 잘하냐는 것보다 해당 강의에서 얻어야 할 것을 어느 정도 얻었느냐를 평가해야 한다”며 대학의 학점 절대평가제 도입 움직임에 대해 “적절한 변화”라고 평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개인 간 경쟁보다는 창의력이나 전문성을 갖추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절대평가는 개인 간 경쟁보다 목표와 경쟁하는 구조”라고 정의했다. A 학점 부여 기준이 ‘수강생 중 상위 몇 프로에 속하는가’가 아닌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가’로 바뀌려면 강의 목표의 구체화가 중요하다. 그는 “기준 설정이 명확하면 학생은 목표에 도달하려 더 노력하게 되며 교수 역시 수업의 내실화를 추구하게 된다”고 말했다. 실패 경험을 강제하는 상대평가제보다 목표와의 경쟁을 부추기는 절대평가제가 현시대에는 더 적절하다는 의견이다. 상대평가제와 경쟁에서 한 차례 패했던 절대평가제가 이번에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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