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정원 치장하던 花盆이 조선시대에 작아진 이유
궁궐 정원 치장하던 花盆이 조선시대에 작아진 이유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
  • 승인 2018.02.0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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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69. 분청사기상감조화문화분(粉靑沙器象嵌鳥花文花盆)

花草나 盆栽를 가꾸기 위해서는 물 빠짐이 좋은 花盆이 있어야한다. 우리나라에서 화분이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져 사용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오래된 화분도 高麗靑磁나 陶器로 제작된 화분이 가장 이른 시기의 遺物이다. 그러나 적어도 三國時代부터는 궁궐이나 사찰에서 庭園을 가꾸면서 필요한 花草나 나무를 옮겨 심고 그 과정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花草나 盆栽를 室內에서 감상하기 위해 화분이 화초나 분재의 종류에 따라서 다양하게 제작됐을 것으로 추측된다(특히 분재는 예로부터 문인이나 문객들이 애완의 대상으로 삼아 문집이나 시 등에도 등장하였으며 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남아있다).

북한 평양에 위치한 고구려의 궁궐이었던 安鶴宮(장수왕15년, 427년 건립)址에는 궁궐정원의 유적이 남아있고 『동사강목』의 기록에는 백제 진사왕(391년)에 “궁궐을 중수하면서 연못을 만들고 진귀한 새를 기르며 화초를 가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626년~681년)때인 674년에 경주 안압지를 만들고 宮庭에 꽃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구려 대무신왕(4년~44년)때는 궁궐에서 매화를 길렀으며 백제 동성왕(재위479년~501)때도 정원을 가꾼 기록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재위632년~647년)때는 당나라 태종이 모란을 보내왔고 신라 후기 최치원은 전국의 사찰에 모란을 심었다. 또한 신라에는 ‘四節遊宅’이라 하여 귀족들이 계절에 따라 돌아가면서 아름다운 정원을 즐기는 행사가 있었다. 이는 왕궁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집에도 정원을 가꾸고 화초를 심었으며 발달한 정원문화의 단면을 짐작할 수 있는 한 측면이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의 기록을 보면 花草나 盆栽를 가꾸고 재배에 필요한 花盆을 제작했을 가능성이 충분하지만 현재까지 화분으로 알려진 遺物은 없으며(삼국시대 건물터나 무덤에서 출토된 화분이나 화분조각도 알려진 것이 없음) 현존하는 유물은 대부분이 고려시대이후의 유물이다.

고려시대는 건물터나 청자가마터, 무덤에서 골고루 화분이 출토되고 있으며 해저에서도 출토된다. 대표적인 건물터는 삼별초 항쟁지인 진도 용장산성의 건물지에서 출토된 상감청자화분파편(사진2)을 사례로 들 수 있으며 전라북도 부안의 청자가마터 화분파편(사진2), 서해안 태안 앞바다에서 출토된 청자철화화분(사진3) 등을 들 수 있으며 용인 죽전지구 무덤에서 출토된 청자화분6점을 비롯해 그 외에도 출토지를 알 수 없는 대부분의 청자화분은 거의 온전한 형태로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시대는 화분이 副葬用品으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화분은 고려 초기 청자화분부터 고려 말기 화분까지 거의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된 유물이 남아있으며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최고급의 청자화분(사진4)에서 가장 서민적인 영암도기박물관 소장품인 도기화분(사진5)까지 매우 다양하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화분은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청자상감운학문화분(사진7)으로 보물 제1030호로 지정돼 있으며 화분과 화분받침대까지 완벽하게 남겨진 유물(사진10)은 이화여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해외의 기관에 소장된 청자화분으로는 일본 고려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청자상감모란국화문화분과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소장된 粉靑沙器象嵌柳鳥文花盆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고 호림박물관에 소장된 청자양인각모란문화분과 청자철화당초문화분도 上品의 화분으로 해석된다.

고려시대 청자화분이 여러 종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반해 朝鮮初期에 제작돼 전래되는 화분은 매우 희귀하다. 朝鮮初期에는 白磁와 粉靑沙器를 생산했는데 고려시대 활발하게 제작했던 사치스러운 陶磁花盆이 점차로 소멸돼가는 과정에 접어든 것으로 백자나 분청사기로는 화분을 거의 생산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사진9)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粉靑沙器花盆으로 고려시대의 餘韻이 남아있는 희귀한 작품이다.

화분의 형태는 고려시대 유행하던 도톰한 이중의 구획선으로 主文樣帶와 從屬文樣帶를 네 등분해 나눴으며 바닥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 벌어지게 만들어서 화초의 흙이 잘 담겨지거나 빠지게 했다. 몸통의 문양은 대칭이 되는 두 종류로 고려시대 유행했던 물가풍경무늬의 오리와 버드나무무늬와 연잎줄기무늬를 간략화한 白象嵌으로 시문했으며 유약은 엷은 갈색으로 잔잔한 빙렬이 온 몸에 나 있다(사진11).

화분바닥의 유약을 훑어내고 내화토를 받쳐서 燔造한 흔적이 있으며(사진12) 바닥의 중심부에는 지름 2cm의 물 빠짐 구멍이 있다. 바닥지름 14cm, 입지름 19.5cm, 높이 16cm 로 아담한 크기의 화분이다(사진1, 사진13).

개성시 운학동에서 출토된 청자상감국화모란문화분(사진8)과 가장 유사하지만  투각형식의 구름문양(사진14)과 종속 문양대의 분할 등은 고려시대 나타나지 않고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유행하는 기법으로 조선 초기에 제작된 온전한 형태의 粉靑沙器花盆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화분의 제작기법은 粉靑沙器는 아니고 朝鮮象嵌靑磁에 해당하지만 日帝强占期 近代부터 분청사기에 포함돼 固着化 됐다.

고려시대부터 청자로 제작된 花盆들은 初期부터 末期까지 전 시기에 걸쳐 다양한 제작기법이 가미 되어 왕실과 귀족층을 중심으로 널리 사용됐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왕조가 바뀌면서 도자기로 만들던 화분은 점차 사라지게 됐으며 화려한 外觀보다는 제작이 간편하고 기능이 강조된 甕器나 陶器로 대체하게 됐으며 그나마 조선후기에 왕실이나 양반계층을 위한 소수의 백자로 만들어진 화분들은 대체로 크기가 작아지면서 수량도 적어진다(사진6).

이렇게 세대가 바뀌면서 화초와 분재를 재배하는 필수요소인 화분도 변모했지만 고려왕조 초기인 11세기에 陶磁器花盆을 제작할 수 있던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와 중국 단 두 나라뿐이었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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