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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계몽주의 재검토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오늘날의 계몽주의 재검토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 윤상민
  • 승인 2018.01.29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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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동서 문명과 근대’_ 제3강 문광훈 충북대 교수의 「계몽주의 사상과 그 비판」

네이버 ‘열린연단’의 다섯 번째 강연 시리즈 ‘동서 문명과 근대’가 진행됐다. 동서양 근대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강연으로 2018년 총 50회 강연이 예정돼 있다. 1월에 열린 3개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문광훈 충북대 교수(독어독문학과).  사진 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문광훈 충북대 교수(독어독문학과). 사진 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아마도 근대적 인간의 주체 의식, 그리고 그 자율성과 자기성찰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이 칸트의 이 성찰적 판단력일지도 모른다. 성찰적 판단력이 근본적으로 심미적인 것이라면, 이 심미적 판단력은 정치적인 것이다. 칸트의 ‘확대된 사고’란 심미적으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성격을 띤다. 주체는 심미적 경험 속에서 감각과 사고의 부단한 쇄신을 경험한다. 그렇듯이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가운데 자기 생각을 고쳐가고, 이런 반성 속에서 생각의 지평을 확대해간다. 그러므로 ‘스스로 사고하라’는 칸트의 계몽주의적 명제는 심미적 판단력의 정치윤리적 가능성과 연결되어 마땅하다.

예술은 유토피아를 직접 실현시킬 수 없다. 또 심미적 방법이 미래의 삶을 탐색하는 유일한 길이지도 않다. 하지만 예술은 삶에 본질적인 것을, 적어도 파편적 형식으로나마, 상기시켜준다. 그것은 진리를 온전히 포착할 수 없지만, 그리고 그 진리를 즉각 실현시킬 수도 없지만, 그것은 진실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형상적으로 드러낸다. 더 나은 현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절대적 부정성 속에서 드러내는 예술을 통해 조금씩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합리성을 비판하는 합리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존에는 없던 것?잊히고 망실되고 억압된 것의 진실을 드러내는 가운데 세계의 지배적 합리성에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지배 권력에 대한 비지배적 저항 형식이 된다. 예술의 저항은 표현 저항이다. 이렇게 저항하면서 그것은 세계의 새로운 차원을 開示한다. 이것이 심미적 유토피아의 현실적 가능성이다.

그러나 삶의 심미적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되풀이하여 강조하건대, 다시 사회역사적 제도적 경험적 차원에서 논의돼야 한다. 개인적 행동의 진실은 인간관계적 차원 속에서 순환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카시러의 『국가의 신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아래 구절은 하나의 결론으로 되새김질할 만해 보인다. 잊지 말아야 할 엄연한 점은 “인간의 문화가 우리가 한때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확고하게 세워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류 문화의 위대한 걸작들을 훨씬 겸손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들은 영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논박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적 세계와 사회적 질서를 바로 그 밑바닥까지 뒤흔들 수도 있는 난폭한 충격에 대해 언제나 대비해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이성과 비이성의 착잡한 뒤엉킴, 혹은 신화와 계몽의 은밀한 공범 관계를 직시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직시함으로써 우리는 이성의 야만으로의 퇴행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렇게 직시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식과 권력의 동화를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시 이성의 잠재력에서 올 것이다. 여기에 대해 칸트는 주체가 스스로 사고하는 자기규정력을 말했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자기파괴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계몽 자체에 대한 계몽을 위한 이데올로기 비판을 시도하였다. 그에 반해 카시러는 역사의 난폭한 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지적 윤리적 예술적 힘들’로부터 온다고 믿었다. 여기에 덧붙여 필자는 ‘심미적 방법’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 모든 힘들이란 아마도 ‘문화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화란, 불순의 함의가 없지 않는 채로, 근본적으로 ‘교양적’이다. 우리는 문화보수주의가 가질 수 있는 퇴행성에도 주의해야 하고, 그 교양은 교양인본주의가 갖는 폐해를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화나 교양도 이성의 부정적 관점 아래 재검토돼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자발적 형성자이고, 나는 내 삶의 책임 있는 변형자여야 한다. 이 점에서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듯이, 어떤 그들도 우리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지극히 어렵다. 현대의 이성은 산산조각 나 있고, 우리의 마음은 더 없이 피폐해 있다. 현대적 삶은, 그것이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롭고 정보적으로 아무리 거대하다고 해도, 그 삶의 질적 수준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가 가진 정신의 풍경은 차라리 황량하고, 그 영혼은 증발한 지 오래인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의 계몽은 앞으로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우리는 이성을 믿으면서도 그 이성을 불신할 수밖에 없고, 계몽은 지금 여기에서 그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 나날의 경험을 부단히 질의하고 검토하면서도, 그러나 그 바탕에는 어떤 믿음?일관된 믿음을 아니 가질 수 없다. 나는 ‘사유의 자기갱신’, ‘이성의 자가증식’, ‘반성의 이중운동’을 떠올린다. 그렇듯이 이성의 이성 비판과 이성 초월을 생각한다. 감성과 이성의 교차를 떠올리고, 이런 교차를 통한 삶의 고양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주체는 대상을 비판하면서도 이렇게 비판하는 자기 자신도 비판해야 하고, 이렇게 비판하듯이 세계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 비판과 사랑은 모든 비루함과 저열 그리고 속됨을 넘어, 마치 에로스의 사다리처럼, 좀 더 높은 단계로 이행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경로는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의 삶을 ‘북돋는’ 것이어야 한다. 즉 즐거워야 한다. 삶은 마땅히 즐거워야 하고, 매일매일 즐거워할 만하며, 또 그렇게 즐거워해도 좋을 자격이 인간에게는, 모든 생명에게 그러하듯이, 있다.

그런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항구적 자기성찰인지도 모른다. 이 항구적 반성 속에서 우리는, 마치 ‘영구평화’나 ‘영구혁명’에서처럼, 자기 삶의 형식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부단히 갱신하고 변형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원래적으로 주어진 경험 세계의 질적 풍요로움을 회복할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반성과 실천의 부정변증법적 운동’이 될 것이다. 이러한 쇄신을 설득력 있게 지속할 수 있다면, 나와 우리는 스스로 ‘윤리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 있는 야만과 다가오는 야만에 주의하는 것, 그리고 이 같은 야만에 저항하기 위해 삶의 도덕적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 오늘날의 계몽주의 재검토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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