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戌年의 기억
戊戌年의 기억
  • 이연도 중앙대 교양대학·철학
  • 승인 2018.01.0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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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2018년, 새해는 간지로 戊戌年이다. 요즘은 교수사회에서도 연하장을 보내는 풍속이 문자 메시지나 카톡으로 바뀌는 추세라, 干支로 올해가 무슨 해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올해는 여느 때와 달리 일찌감치 戊戌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전공 분야가 중국근현대다 보니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술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戊戌變法’이다.  무술변법이 일어난 해가 1898년이니, 정확히 두 甲子 전의 일이다.

무술변법의 주인공은 청말의 경학자이자 혁명가였던 康有爲이다. 우리는 흔히 그를 『대동서』의 저자로 기억하지만, 강유위는 금문경학파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금문경학자들은 공자를 단지 ‘역사를 서술하였을 뿐, 새로 지어 말하지 않은(述而不作)’ 역사가로 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개혁가로 보았다. 그들은 공자의 『춘추』에서 ‘언어 뒤에 숨은 큰 뜻(微言大義)’을 발견하려 애썼으며,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강유위의 금문경학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저서가 『新學僞經考』와 『孔子改制考』인데, 특히 『공자개제고』는 1898년 1월에 출간된 책으로 무술변법의 청사진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강유위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큰 암흑 속의 기나긴 밤처럼 캄캄하고 흐릿한 게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 같았다. 첩첩히 꽉 막히고 어두운 게 밝은 태양은 마치 심연 속으로 깊이 떨어져 버린 듯 했다. 그 암흑 속에서도 수많은 학자들과 백성들은 기를 쓰고 고개를 들고, 한 점 초롱불을 켠 채 세상을 위해 밝은 빛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또한 주머니 속 반딧불처럼 스스로에게 소중한 작은 빛을 찾으려 애썼다. 그럼에도 끝내 천지와 같은 공자 학문의 전모나 태평의 정치, 大同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으니, 너무나 슬프다. 아! 이제 대동과 태평의 정치를 만나는 것은 마치 공자가 다시 태어난 것과 같다.” (『공자개제고』, 김동민 역주, 세창출판사, 2013.)

강유위는 여기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공자에 가탁하는 ‘託古改制’의 형식을 통해 개혁의 꿈을 펼치고 있다. 마치 漢代의 儒家들이 공자의 말에 가탁하여 정치·사회 제도를 제정했듯, 강유위 또한 공자를 내세워 ‘변법’의 이상을 이루려 한 것이다. 

무술변법은 1898년 4월 23일 광서제가 강유위의 상소를 받아들여 전격적으로 國是를 정하는 조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강유위를 비롯한 梁啓超, 譚嗣同, 楊銳, 劉光第, 林旭 등이 오늘날의 수석비서관에 해당하는 章京에 임명되었으며, 헌법·국회·철도·학교·군사 등 전 영역에 걸쳐 개혁 조치가 발표되었다. 스러져 가던 제국 청나라의 마지막 불꽃 같았던 이 개혁정치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 해 9월 18일 신식 육군의 지휘관이었던 원세개의 밀고와 서태후, 직예총독 榮祿의 반격으로 개혁정치는 103일 만에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광서제는 유폐되었고, 담사동을 비롯한 변법의 주역들은 참수되었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가까스로 검거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다.

무술변법이 ‘百日維新’으로 실패하면서, 청조는 결국 회생의 가능성을 잃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처절하게 실패한 무술변법이 있었기에 이후 신해혁명은 ‘共和’라는 새로운 정치 지형을 열 수 있었으니, ‘大同’의 기치는 그 씨앗이 무술년에 뿌려진 셈이다.

120년이 지난 오늘 다시 맞는 戊戌年은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적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2017년이 ‘破邪’의 힘을 보여준 시간이었다면, 올해는 ‘顯正’과 ‘再造山下’의 임무가 부여된 해이다. 무술년의 비극이 새로운 희망의 약속으로 전환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하며 새해를 맞는다.

 

이연도 중앙대 교양대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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