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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킹의 전쟁터 미국 학술컨퍼런스 …“무엇에 대해 공부하세요?”
네트워킹의 전쟁터 미국 학술컨퍼런스 …“무엇에 대해 공부하세요?”
  • 교수신문
  • 승인 2017.12.1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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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대학은 지금_ 캐나다 서부정치학회 참관기
서부정치학회리셉션이 열린 밴쿠버 하얏트 호텔에서 참석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서부정치학회리셉션이 열린 밴쿠버 하얏트 호텔에서 참석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난 4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연례 서부정치학회(WPSA: Wester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 컨퍼런스에 참여했던 필자의 경험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서부정치학회는 미국정치학회(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나 중서부 정치학회 (Midwest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와 같은 다른 미국 내 정치 학회 컨퍼런스들에 비해 작은 규모로 개최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작은 규모의 학회가 갖는 나름의 장점이 있다. 소규모 학회에서는 발표자들 사이에 공유돼 있는 주제가 있고, 그러다보니 같은 패널에 있는 발표자, 토론자뿐만 아니라, 다른 패널의 참석자들과도 나의 연구 관심사에 대해 보다 깊은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성·이민·인종 아우르는 정체성 정치
서부정치학회의 경우 정치학의 세부 연구 분야 중에서도 소위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연구를 주된 테마로 한다. 정체성 정치란, 인종 정치(race politics), 성 정치(gender politics), 이민 정치(immigration politics)를 아우르는 분야를 말한다. 실제로 2017년 컨퍼런스의 부제, ‘정체성의 정치, 그룹 간 편견, 그리고 갈등과 협력(The Politics of dentity, Intergroup Bias, and Conflict and Cooperation)’은 서부 정치 학회의 이와 같은 전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필자는 이민 정치 섹션에 속해 최근 유럽 내의 「반-이민 태도 (anti-immigration attitudes)」에 대해 발표했는데, 대부분의 컨퍼런스 참석자들이 이민 정치에 대한 관심이 크다보니 학회가 열리는 동안 유익한 코멘트들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학기 내내 연구실과 도서관, 강의실에서 연구로 씨름하고 있는 박사과정학생들에게 컨퍼런스 참석은 몸은 고되지만 잠시나마 낯선 도시에서 기분을 전환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리고 점차 세분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학계에서, 나와 비슷한 연구 관심사들을 가지고 있는 동료 연구자들을 만나 다른 누구도 해줄 수 없는 ‘구체적인 코멘트’를 받는 과정은 컨퍼런스 참석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라 할 것이다.

그간 쌓아온 연구 성과를 낯선 이들 앞에서 발표한다는 것은 분명 긴장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긴장되는 시간이 있으니, 그것은 컨퍼런스 막바지에 열리는 리셉션 파티이다. 발표장에서는 미리 준비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와 함께 어느 정도 준비된 원고를 가지고 내 연구를 청중들에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리셉션 자리에서는 “무엇에 대해 연구하세요?”라는 짧은 질문을 서로 주고 받으며, 표, 그래프 하나 없이 나의 연구에 대해 짧지만 흥미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구직 앞둔 대학원생들의 필수 기초 작업

성급한 일반화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미국의 대학원 사회에서는 ‘네트워킹(networking)’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네트워킹이란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대략‘학계의 다른 연구자들과 관계를 쌓고(안면이 있으면 좋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그와 관계를 바탕으로 미래에 협동 연구의 기반을 닦는 작업’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맺어진 관계가 꼭 협동 연구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네트워킹은 졸업 이후의 구직을 고민하는 대학원생들에게 필수적인 기초 작업으로 이해된다. 물론 여전히 상당수의 대학원생들은 “공부하기도 바쁜데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라며 볼멘소리를 늘어놓기도 하지만, 공부도 열심히 하고 네트워킹도 열심히 한 선배 박사들이 졸업 후 직장을 구하는 데 있어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학회 컨퍼런스는, 특히나 컨퍼런스의 리셉션 파티는, 이와 같은 네트워킹을 위한 주된 공간으로 활용된다. 대다수의 대학들이 서울 및 수도권에 밀집해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학회 컨퍼런스가 아니고서는 다른 대학의 연구자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원생들은 컨퍼런스 이전에 미리 미팅 약속을 잡거나, 리셉션 파티에서 여러 테이블을 바쁘게 움직이며 안면을 쌓는다. 이번 컨퍼런스의 리셉션 파티는 약 세 시간 남짓 진행됐고, 필자 또한 부족한 영어로 약 15명 정도의 연구자들과 통성명을 하고 대화를 나눴다.

서로에 대한 배경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각자의 연구 주제는 이 공간에서 각자의 정체성이 된다. 그리고 모두가 짧은 시간 내에 더 많은 사람과 안면을 쌓으려는 네트워킹의 전장에서, 나의 연구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판단 받는 듯 했다. 나의 연구가 상대방에게 충분히 흥미롭지 않다면, 아까운 시간을 나에게 내어주고 있는 그들이 굳이 내 테이블에 오랫동안 머무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학계의 관심을 받으려면?

리셉션 자리에서의 대화는 나의 연구에 대한 이와 같은 ‘학계의 관심’-물론 학계의 관심이 연구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결정짓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을 미리 예측해볼 수 있는 자리다. 이 날의 대화는 이민 정치(immigration politics) 연구자로서, 앞으로의 박사논문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큰 도움을 줬다.

최근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그리고 헝가리와 폴란드에서의 극우정당의 발흥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유럽 정치, 미국 정치의 변화 속에서, 이민 정치 연구자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새로운 연구를 쏟아내고 있다. 반-이민 태도(anti-immigration attitudes)와 관련된 초기 연구가 집중했던 설명 변수들인 실업률, 주변 인구 중 이민자의 비율 등은 그 자체만으로는 더 이상 학계의 관심을 받을 수 없다.

이 날의 리셉션 자리에서 “무엇에 대해 연구하세요?”라는 질문을 받고 필자가 “유럽의 반-이민 태도에 대해 연구한다”고 답했을 때, 처음 그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그러나 “거주지 주변의 범죄율이 반-이민 태도에 미치는 영향력에 관심이 있다”그리고 “유럽, 미국만이 아닌 한국과 같은 아시아 케이스에 적용해볼 계획이 있다”며 한국 내 조선족에 대한 혐오 감정에 대해 소개하자, 다행히 듣고 있던 이들이 관심을 가지며 관련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줬다.

그 날 대화를 나눈 마크 카스완 텍사트대(RGV) 교수(정치학과)는, 사실 멕시코와 접하는 텍사스 국경 지대에서 범죄율이 가장 낮고, 이민자들의 범죄율이 오히려 더 낮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과 지지 세력에 의해 잘못된 인식이 유포되고 있다며 필자의 연구가 시의성이 있을 수 있다고 답해주기도 했다.

컨퍼런스 참석을 이제껏 학기 중의 꿀맛 같은 휴가 정도로 생각해 왔던 필자에게 (컨퍼런스 참석은 수업을 빠질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된다) 이번 서부 정치 학회 컨퍼런스는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줬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오늘날의 학회 컨퍼런스는 ‘네트워킹의 전장’이다. 8월에 있을 미국 정치 학회 컨퍼런스에서는 15분 분량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뿐만 아니라, 리셉션 자리에서 내 연구를 소개할 수 있는 ‘1분 스피치’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송정민 (jungmin-song@uiowa.edu) 아이오와대 박사과정
박사과정 3년차에 재학 중이다. 유럽의 극우정당들에 대한 관심을 시작으로 현재는 이민정치,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민자 혐오 태도와 범죄율 간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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