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행세를 하기 위해 반드시 몇 마디 풍월쯤은 읊을 줄 알아야하는 사상가들이 있다. 실존주의의 사르트르, 구조주의의 레비-스트로스, 근대적 주체의 해체재구성이 활발했을 때의 푸코와 데리다 같은 이들이 그랬다. 특정 시기의 지적 최전선을 이끈 이들 사상가들은 칸트와 헤겔, 맑스와 프로이트를 잇는 근대사상사의 名將들과는 구별되는 면이 있다.
항상 유행과 지적 쏠림 현상을 동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쏠림 현상은 프랑스 발 담론일수록 열풍의 강도가 남달랐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미 10년 전에 ‘프랑스 철학과 우리’라는 단행본 네권 분량의 시리즈로 분석이 시도된 바가 있지만 명쾌한 결론은 얻지 못했다.
지적 유행의 빈자리
언제나 그렇듯 유행은 지나가고 사상은 早老한다. 후기구조주의가 사그러들고 난 이후 또 다른 지적 유행이 그 빈자리를 메워나가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대강 그 목록을 잡아보면, 일본 근대문학이 성립된 단면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고고학적이고 비교문학적인 작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가라타니 고진이 맨 첫 번째 올 것이다. 같은 비교문학 전공자로 교양소설을 비롯한 장르 연구를 통해 모더니즘을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 가능한 총체성에 대한 상상의 한 표현’으로 매혹적으로 그려보이는 프랑코 모레티가 고진을 압도하는 문제적 사상가로 부상하고 있다.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는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객관화시킴으로써, 맑스 문화이론을 재성찰의 장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세계를 ‘제국’이라는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제시한 안토니오 네그리도 낙양의 紙價를 올리는 중이다.
그리고 이미 폐허로 변한 근대의 영토들 곳곳에서 또 다른 국지전을 펼치고 있는 프랑스 68세대의 후손들이 있다. 최근 번역과 해석 작업이 활발해진 질 들뢰즈, 라캉의 충실한 해설자이자 영화를 비롯한 문화비평에서 안목을 번득이는 슬라보예 지젝, 그리고 들뢰즈 비판가로서 그 잠재력을 인정받기 시작한 알랭 바디유 같은 철학자들이다.
예전의 폭발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이 흔한 말로 2000년대의 ‘뜨는’ 사상가들이다. 이들이 떠오르게 된 데는 그러나 사상적 내용보다는 그 사상가의 ‘스타’로서의 매력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카더라 통신’에 민감한 상업적 지식생산자들이 사상가들의 몇몇 관점을 세계를 내려다볼 수 있는 대단한 사유의 틀로 포장하는 일 말이다.
잡종성과 유목성의 옷으로 갈아입다
한편 박기수 한양대 강사(국문학)는 지적 유행의 계기를 다른 곳에서 포착한다. 그는 가라타니 고진이 전공자들을 자극하는 수준을 넘어 유행에 휩쓸리게 된 것은 “고진이 일부 중진학자들에 의해 은폐된 채 이용돼왔다는 것이 한 소장학자에 의해 폭로되면서였다”고 분석한다. 지젝의 경우도 “국내 정신분석학적 문화이론가들이 그의 라캉 해석을 별 인용없이 전거로 사용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원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경우”라고 덧붙인다. 번역을 통한 학문의 주체성과 투명성 확보의 차원에서 이들은 소개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지적 유행은 이런 긍정적인 동력에 의해 일어나는 측면도 있다.
실천보다 인용의 도구에 머물러
이와 연관된 비관적인 사실 하나는 이들 사상가들이 이론과 이론의 가교 역할을 하는 인용의 도구로만 활용될 뿐 국내의 현실을 읽는 도구로는 좀체 진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비교적 많은 연구가 이뤄진 들뢰즈도 그의 사상에 대한 ‘주석학’은 본격화된 느낌이 있지만, 한국사회를 향한 통언어적 실천은 멀었다는 분석도 그런 지점에서 제기된다. 아직 한국에서의 외국이론이 수용보다는 수입의 단계에 머물러있다는 인식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대표적인 논객으로는 문화평론가 김성기 씨. 그는 “10년 전부터 이어져온 들뢰즈와 그 주변 지식인들에 대한 선호현상은 현실은 없고 이론만 난무해 섀도우 복싱을 보는 듯한 안타까움을 준다”며 “젊은 연구자들이 열심히 하는 것 같긴 하지만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들뢰즈에 대해서는 이미 영미권에서 비판적인 평가가 충분히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긍정적인 측면에서 패권자적인 면모만 부각되고 있는 게 제자리걸음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촘스키가 “나는 데리다나 푸코를 슈퍼마켓에서 10분 정도 들여다보고 덮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사상의 보편적 지위를 위협받는다는 점도 덧붙였다.
하지만 10년 전의 들뢰즈와 지금의 들뢰즈는 다르다는 입장도 있다. 즉 민음사 ‘현대사상’이나 1990년대 초반의 ‘문화과학’을 주도했던 이론가들과 그 이후 세대의 문화적 정체성의 차이에서 해결의 열쇠를 찾는 시각이다. 이것은 지식을 소비하는 계층으로서 지식인의 성격이 변화했다는 점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영상언어에 비교적 익숙한 30대 초중반의 지식인들은 그 전세대와 달리 들뢰즈를 영화, 문학, 미술에 적용시키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체화된 공통언어를 지니고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들뢰즈의 정확한 이해나 현실적합성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들뢰즈가 끊임없이 회자되는 수용자 측면에서의 설명은 제공해준다.
2000년대에 유행하는 사상가들의 특징이 1980년대나 1990년대의 그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면은 ‘정당성’ 부분이다. 정치체제의 변환에 대한 욕구, 근대적 인식에 대한 전복의 욕구에 탄력을 받아서 문제를 초점화하는 양상은 많이 없어졌다. 앞의 사상가들이 자본주의체제나 근대성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양가적인 측면이 있다. 영상과 기호의 바다로 종횡하는 지젝의 날렵함이나, 빌둥(Bildung)적 이념의 세련된 양태 속에서 자본주의와 화해하는 모레티의 주체구성의 방식은 현실에 다가가기보다는 지적 줄타기 자체의 환상 속에서 자율적 영역을 구축하려는 모습이 강하다.
사상과 문화의 소통에 뛰어난 사상가들
얼마 전 일본의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 바람이 분 적이 있다. 그는 자율적인 학술적 깊이를 갖춘 사상가는 아니지만, 보기 드문 지식 일꾼이자 파퓰러한 사상가로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그의 저술의 핵심보다는 독서가, 장서가, 교양인의 면모만 독자들의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수준에서 알려졌다는 점이다. “문화가 난숙해질수록 거친 리얼리즘보다는 세련된 모더니즘에 치중하게 된다”는 시인 김지하의 말마따나, 학문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지적 유행이 이런 대중적 현상과 얼마만큼 차이가 있는 것인지 미심쩍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