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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루덴스> 네번째 시집 발간한 김춘추 교수
<호모루덴스> 네번째 시집 발간한 김춘추 교수
  • 김미선 기자
  • 승인 2000.10.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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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31 00:00:00

“가재 뒷걸음으로 뒤돌아/가보니 어린 귀에/흐르던 물소리 간 데 없고/소쩍새 울음 울다 간/골짜구니에는/망울져 피어오른/눈매 하나 서러워/서로가 고향이 달라/말은 다르지만/내 얼굴, 그/얼굴에 포개주고 싶어라”
백혈병 치료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김춘추 교수가 3년 전부터 詩作에 푹 빠져있다. 한국과학재단에서 ‘이달의 과학자상’을, 지난 과학의 날에는 ‘옥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던 김 교수가 뒤늦게 시 쓰는데 몰두하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어린 시절 김 교수는 문학도를 꿈꿔왔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의대에 진학했다. 학부 때는 문학에 심취해 낙제를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졸업 후 김 교수는 의학연구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조혈모세포이식 수술에 성공하는 등 전공의로서의 업적을 쌓아갔다. 틈틈히 습작을 해 의학신문에 발표하기도 했지만, 그때까지 시인이 되겠단 생각은 없었다.

김 교수의 본격적인 詩作은 서정춘 시인과 우정을 나누면서 시작된다. 서정춘 시인이 김 교수에게 직업과 관련된 내용의 글을 써볼 것을 권했는데 그 말에 내심 기분이 상했던 것. 그날 새벽 ‘세한도’라는 시를 시작으로 매일 시를 쓰다시피 했던 김 교수는 97년에 첫 시집 ‘요셉병동(동학사)’을 출간했다. 98년에는 ‘현대시학’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했으며 ‘하늘목장’(문학세계사), ‘얼음울음’(시와시학사), ‘산속의 섬’(현대시) 등 올해까지 4권의 시집을 냈다.

김 교수의 시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백혈병 환자들을 치료하며 때로는 그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김 교수의 시에는 무력감과 자기혐오 그리고 인생에 대한 비애,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30년간 가슴에 담아 둔 시를 쉰 살이 넘은 지금에야 풀어내는 김 교수는 이제 더 이상 문학과 의학 중에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환자를 진료하다 짬이 나면 시상을 떠올리며 詩作을 준비한다. 연구실, 병실, 복도가 그에게는 모두 시를 쓸 수 있는 공간이다.

“詩作이 감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면 醫術은 지성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한쪽이 열리면 다른 한쪽이 닫혀야 하지요. 하지만 어떤 현상이나 사실을 보고 경이를 느끼는 것은 詩作이나 醫術이나 똑같습니다. 사물에 대한 사랑과 인식의 원형질이 같다고 할까요.”

김 교수는 좋은 문인을 사귀게 된 것과 이들을 통해 인간성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발견하게 된 것을 시작의 기쁨으로 꼽는다. 가끔씩 시를 청탁해오는 잡지에 작품을 골라 보내는 것도 삶의 활력이 된다는 김 교수의 말을 들으며 ‘세계적인 명의’의 소박함이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았다. <김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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