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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부활의 號泣 속에서 만난 ‘예언자’
1960년, 부활의 號泣 속에서 만난 ‘예언자’
  • 김용준
  • 승인 2003.05.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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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18)

<살았노라,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노라, 죽음이 곧 삶이더라, 지옥 밑에 천당이 뚫렸더라 하는 말밖에 더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을까?
죄를 지었으면 가만 있거라,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반밖에 못되는 진리다. 죄인이야말로 말할 자격이 있더라. 그것은 죄인 되어보니 알겠더라.
‘빛이 있을지어다’는 캄캄한 혼돈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왔고 말씀이 생명의 빛을 낸 것은 살(肉) 속에 갇혀서야 했다.

방안에 단정히 옷을 입고 앉은 사람은 돌부처와 다름이 없을 것이며 똥간에 빠져 허위적거리는 사람 거기서 뛰어올라오는 사람의 팔다리는 그것이 정말 생명의 춤일 것이다.
물이 완전히 밝아진 다음에 마시려다가는 목이 먼저 타 죽겠더라. 맘이 다 깨끗해진 다음에 말하려다가는 혼이 지레 말라버리겠더라
죄는 무섭지만 삶은 죄보다 더 무섭더라.

어둠 속을 노래로 밝히자!
혼의 노래에는 웃음, 울음이 따로 있지 않더니라, 잘잘못도 없느니라, 그리하여 내 소리는 못되더라도 내가 하고 싶으면서 못하는 말 대신 해주는 입을 빌기로 하였다.
칼릴 지브란은 나를 똥간에 빠진 데서 이끌어냈다. 제 손에도 똥을 쥐면서, 그럼 내가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의 구부림이 나의 일어섬이요, 그의 더러워짐이 나의 깨끗해짐이라면 내가 이 손으로 그를 부쩍 쥠이 그에 대한 고맙다함 아니겠나?

한많은 이 1960년이 오자마자 아직도 채 녹지 않은 눈 위에 새 꿈을 그리는 하룻날, 내 60년 쌓아 온 모래탑은 와르르 무너졌다.
나와 같이 그 모래탑을 쌓던 바로 그 사람들이 무너뜨렸다. 모래탑을 가지고 진짜나 되는 양 체하고 뽐내는 내 꼴이 미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당연하였다.

내 눈에 모래를 뿌리고 내 얼굴에 거품을 끼얹고 발길로 차 던지고 저희도 울며 갔는지 손뼉치며 갔는지 나 몰라.
나는 영원의 밀물 드나드는 바닷가에 그 영원의 음악 못 들은척 뒹굴고 울부짖고 모래에 얼굴을 파묻고 죽었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장마가 졌다가 개고 시든 열매가 다 익어 떨어져가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가 꼭 일으켜주어야만 될 것 같은데, 조곰 부축만 해주면 꼭 일어설 것 같은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따금 저 멀리서 귓결에, 어서 일어나라는 소리가 들려는 왔지만,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원망은 아니 하기로 힘썼다.
십자가도 거짓말이더라
아미타불도 빈말이더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도 공연한 말뿐이었더라”
내가 장발장이 되어 보고자 기를 바득바득 쓰건만 나타나는 건 밀리에르가 아니고 자베르뿐인 듯이만 보이더라.

멍청히 서울과 천안을 왔다갔다하는 동안 한가하여 물에 산에 놀기나 하는 듯, 동해로 싸 다니는 동안 내 혼은 이렇게까지 맥빠지고, 비뚤어지고, 떨어져 영원의 바닷가에 죽은 솔피처럼 밀려 들어왔다 밀려 나갔다 하는 줄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 동안에 내가 그 물결과 싸우면서 기도를 했다면 어느 누가 곧이 들을까?
누가 들으라고 한 기도야 아니지만….
그런데 가을도 깊어 사나운 서풍이 또 불기 시작하여, “나는 인생의 가시밭에 엎드렸노라.

오, 바람아 나를 일으키려마, 잎새처럼 물결처럼 구름처럼.”하는 셀리의 노래만이 생각나는 날 문득 한 소리가 날라왔다.
그것은 레바논의 백향목 가지 꼭대기에서 일어나 지중해를 건너 대서양을 건너 로키 산맥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뛰어오는 소리였다.
나는 한 번 듣고 일곱해 동안을 잊었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다시 읽게 되었다. 그것은 내 속에서 자고 있지 않았다.
그 부르는 소리가 이러했다.

“너희가 너희 모래탑을 쌓는 동안 바다는 더 많은 모래를 가 쪽으로 가져왔고 또 너희가 그것을 무너뜨릴 때는 바다도 또 너희와 한가지로 웃더라, 진실로 바다는 언제나 단순한 것들과 함께 웃더라.
너희 영그러운 몸은 바다 같으니라.
영원히 더러워지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해를 향해 걸어가는 자들아, 땅 위에 그려진 어떤 그림자가 너희를 능히 붙잡을 거냐?

너희 고통을 너희 깨달음을 둘러싸는 껍데기를 깨침이니라.
악이란 뭐냐? 스스로 주리고 목말라하는 선일 뿐이니라.”
‘모래와 거품’을 노래하는 지브란은 자기도 그 거품을 마시고 그 모래를 뒤집어쓰는 사람이 되어서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의 심장이 뛰놂이 내 가슴에 있었고, 그의 숨이 내 얼굴에 와 닿았고 그리고 그는 나를 알아주었다.
죄인의 친구를 처음으로 만났다.

글을 읽다말고 나는 책머리에 있는 (어머니의) 초상을 다시 보았다.
보나마나 이 책을 쓴 것은 우리 어머니다. 지브란이 뭐라 했나?
“또 너 망망한 바다여 잠잘줄 모르는 어머니여
너만이 강물과 시냇물에겐 평화요 자유더라.
나는 내 옷을 들여다보고 또 내손을 맡아보았다.
지금은 아무 얼룩도 아무 냄새도 없다.
또다시 보았다. 이 옷이 온통 똥이요, 이 주름진 살이 온통 똥이다.
그 순간 억만 화살이 몸에 와 박힌다.

모든 기억아 물러가라, 나는 지브란과 함께 노래하련다. (주: 이 대목은 함 선생님이 어렸을 때 똥뒷간에 빠졌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그 때 아무 소리없이 똥묻은 함 선생님을 닦아주시고 새옷을 입혀 주시던 어머니를 기리며 부르는 노래다.)
우리… 어머니의 아들이여, 그대들 물결위에 타는 자들이여,
너희는 내 꿈속에 얼마나 자주 찾아 왔었느냐? 이제 너희는 내가 깨는 때에 왔구나, 그 깸은 나의 한층 더 깊은 꿈이니라.
가야지 어서 가야지 슬픔에 돛을 달고 어서 가야지.”
우리 어머니는 바다요, 나도 바다다.
나는 지브란에게서 한 친구를 발견하였다.
그는 말했다. “벗을 사귀는데 정신을 깊이 하는 것 외에 아무 목적도 두지 말라.”

그는 내가 빠진 밑바닥, 지옥바다, 멸망한 자만이 있다는 그 바닥에 내려와서 따뜻한 손으로 일으켜 거기서도 오히려 일어설 수도 있게 함으로써 내 정신을 한층 깊게 하여 주었다. 지옥 밑바닥에서 보는 하늘은 유난히 높았다.
내가 스승이 없지 않고 친구도 없지 않았으나 아무도 그 이름들을 가지고 나를 찾아주는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석가도, 예수도, 공자도, 맹자도, 노자도, 장자도, 톨스토이도, 간디도, 남강도, 우찌무라도, 다 내가 이름도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이젠 나는 무슨 교도도, 누구의 제자도, 누구의 친구도 될 자격이 없고 다만 한 개의 깨어진 배이다.

다만 칼릴 지브란만은 들의 한 송이 작은 풀꽃같이 이름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독점하려 하지 않았고 자유로 그 외로운 나그네의 옆에 올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알아줌에는 구속함이 들어 있다”고 한다.>
위의 긴 인용문은 함석헌선생님이 번역하신 지브란(Khalil Gibran, 1883~1931)의 ‘예언자’(The Prophet)라는 책의 역자 서문(전집 16:211~221)을 발췌한 글이다. 함석헌 88년간의 생애에서 특히 그의 공생활이라 할 수 있는 1950년대 후반부터 계산한다면 1960년이란 그의 공생활의 대부분이 시작되는 매우 중요한 해다.

그는 어찌되었던간에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을 범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후회하며 그가 떨어진 그 나락에서 다시 일어나 30년 가까운 그의 절규로 이어지는 빛나는 생애가 이루어 졌던 것이다. 그는 지브란의 부르짖음을 자기의 부활의 부르짖음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함석헌을 알려면 그 지옥에서 쥐어짜는 듯이 울부짖는 그의 호읍(號泣)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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