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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機’는 없고 지혜만 번뜩여…또다른 불교 신비화?
‘禪機’는 없고 지혜만 번뜩여…또다른 불교 신비화?
  • 서정형 박사
  • 승인 2003.04.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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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 방한, 무엇을 남겼나 : 불교철학자의 틱낫한 방한행사 관람기

틱낫한, 이 발음하기 까다로운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십여년 전 유학시절이다. 당시 필자는 위빠사나 수행법에 관심이 있었고, 틱낫한 스님의 책도 독서 목록에 포함돼 있었다. 읽어본즉 세일론이나 미얀마의 다른 명상 지도자들의 저술에 비해 가벼운 듯했지만 체험적인 글이 주는 설득력과 친근하게 와닿는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만한 통찰력을 가진 수행자는 그리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 이 스님이 우리나라를 다녀가면서 약간의 논란거리를 남겨놓았다. 일각에서 문화사대주의와 출판상업주의를 들먹이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의 방한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에 대한 찬사는 이미 충분한 듯하므로 필자는 화려한 조명 뒤편 그늘진 부분을 살짝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틱낫한 스님 스스로 선불교의 한 유파인 임제종의 선사(Zen master)라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 우선 미심쩍다. 그의 저술이나 그가 이끄는 명상센터의 프로그램이 위빠사나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직 이 순간 뿐, 다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卽是現今 更無時節)”는 임제의 경구와 위빠사나의 마음챙김(念, sati, mindfulness)이 궁극적으로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론에는 많은 차이가 있고, 그 차이로 인해 종파와 전통이 나뉘어지는 것이다.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同異의 문제인 것이다. 틱낫한 스님에게 관찰자의 지혜는 있을지언정, 선사의 전광석화 같은 禪機를 찾아볼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禪師라기보다 남방불교의 장로, 즉 테라(thera)에 가깝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위빠사나의 수행원리에 충실하다. 그의 수행관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남방불교전통의 다른 수행자들과 구별되는 요소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가 가르치는 수행법이 독특하게 보이는 까닭은, 교리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하는 한편, 일반 대중의 수행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한 다양한 방편을 고안, 적용해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틱낫한 불교의 특징을 구성하는 동시에 그가 주창하는 불교의 대중화와 사회참여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多作 작가다. 현재 1백여 권의 책을 썼고, 국내에 번역된 것만도 20여 종에 이른다. 이번에 다녀간 후에 그의 책이 또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고 한다. 저자인 틱낫한 스님은 물론, 출판업자와 책을 산 독자들까지 모두가 만족스러운 결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우리는 지난날에도 명상서적 붐을 경험한 바 있지만, 이들 명상서적이 공유하는 특성은 내용에 별 차이가 없는 책들이 양산되고, 같은 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중언부언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명상서적이 정작 명상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기현상도 문제다.

명상적이지 않은 명상서적 붐

사람들이 책에서 구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지식욕의 충족이다. 명상의 필요성과 그 방법을 충분히 이해한 후 곧바로 명상수련에 돌입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 그들은 책에서 얻은 지식 자체에 이미 만족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지식의 축적이 언젠가는 결정적으로 자신을 변화시켜줄 계기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대개의 경우 명상서는 심리적 위안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혹자는 틱낫한 스님의 글이 전하는 감동을 들어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지만, 그는 감동이 일회성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감동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수행이 요청된다.

그러나 시작부터가 쉽지 않다.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마음챙김이 되지 않고, 마음챙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산란하다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마음챙김’, ‘바라봄’과 같이 단순, 명료하게 보이는 수행법이 사실은 그렇게 쉽고 간명한 것만도 아니다. 단순하게 보이는 행법의 배후에는 결코 간단치 않은 이론적 배경이 있고, 수행이 진행될수록 크고 작은 의문들도 늘어간다. 책은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 못하고, 눈밝은 스승은 곁에 있지 않기 때문에 진지한 탐구자들은 미아가 되기 쉽다. 겉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일상 속에서의 수행은 이렇듯 쉽지 않은 것이다. 틱낫한 스님이 승가공동체 내에서의 지속적인 수행을 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불교가 신비화하고, 또 대중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사회참여와 대중화를 내세워 결코 쉬울 수 없는 것을 쉽게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느 책에선가 틱낫한 스님이 眞空妙有에 대해 “물을 마시고 난 빈[眞空] 컵에 공기는 있지[妙有] 않으냐”는 식으로 ‘쉽게’ 설명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쉬운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이다. 컵에 담긴 물은 有인 채로 空하며, 空한 그대로 有이다. 그의 장기인 불교 재해석에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불교 재해석도 의구심 남겨

쉽고 어려움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불교수행 가운데 염불은 자타가 공인하는 쉬운 길이고, 쉽게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듯한 참선(간화) 역시 세수하다가 코 만지듯이 쉽고 빠른 길이라고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수행이고, 즉각적인 수행효과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위빠사나의 장점이지만, 염불과 참선 역시 어느 정도 수행이 무르익으면 일상생활 중에도 항시 삼매가 현전함은 물론이다. 위빠사나가 일상의 모든 동작과 대상에의 마음챙김이라면 염불은 부처의 명호나 불국토에 대해 마음을 챙기는 것이고, 참선은 화두에서 마음을 챙기는 것이다. 어느 쪽이 나을까. 부질없는 질문이다.

서정형 / 서울대 강사·불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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