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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것과는 상관없는 '아름다운'지적 강박
먹고사는 것과는 상관없는 '아름다운'지적 강박
  • 강유원 기자
  • 승인 2003.04.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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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학술총서

강유원 / 동국대 강사·서양철학

1772년에 완간된 ‘백과전서’는 근대적 총서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백과전서’는 근대 계몽주의의 완성을 상징함과 동시에 지식을 구조화하는 총서 전략의 모델이다. ‘백과전서’가 전복하고자 했던 것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혁신을 이어받아 중세의 지식 세계를 규정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었다. ‘백과전서’ 이후에 등장한, 근대 최후의 백과전서인 헤겔의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 역시 마찬가지의 전략을 가지고 있었거니와, 이러한 시도들의 근본적인 의도는 분류를 통해 학문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의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총서의 근본 전략이 백과전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면, 그리고 독자가 그 전략에 동조한다면 총서에 포함된 것은 읽어야 마땅한 것이고 배제된 것은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특히 학문세계에 마악 발을 들여놓은 독자는 지적 감수성으로써 총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 의무감 또는 지적 호승심을 가지고 총서를 손에 쥐게 된다.

멋모르고 총서 전략에 휘말리다
‘삼성판 세계 사상 전집’을 샀을 때를 생각해본다. 나는 그것을 읽어야 마땅한 것으로 간주하는 총서 전략을 무의식중에 받아들였고, 철학과 다녔다면 최소한 사상 전반은 알고 졸업해야 한다는 상식에 근거해서 그 전집을 구입했다. 그것에는 마키아벨리, 홉스, 하이데거, 러셀, 촘스키, 데카르트, 마르쿠제, 베르그송, 말리노프스키, 베버, 플라톤, 칸트, 다윈, 프로이트 등이 두서없이 섞여 있었다. 누가 어느 학문 영역에 속하는지,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것들을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이러한 무작정 독서는 두고두고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전집을 읽고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는 사상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일상을 영위했더라면 별 탈이 없었을 테지만 그 뒤로도 공부를 몇 년 했기 때문에 총서에 의해 자리 잡힌 내 독서 방식이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것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책을 제법 읽어도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됐다는 점이다. 사실상 한국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이는, 일단 자신의 전공이 정해지면 그 전공을 바꾸는 일도 아주 드물 뿐더러 그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어도 별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관심 자체를 잡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헤겔의 사회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막스 베버의 사회학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며, 플라톤 전공자라면 칸트나 헤겔에 대해 몰라도 흠이 되지 않는다. 문학이나 역사는 아예 까막눈이어도 전혀 창피해 할 필요가 없다. 물론 그의 교양 수준은 학부 때 몇 과목 수강한 ‘개론과목’들 수준에서 멈추어 있거나, 그것도 세월이 지나면 아득해지는 지경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상 전집’을 통해 학문 영역에 발을 들여 놓고, 그것을 열심히 읽었던 경우라면 이러한 무관심과 무지를 스스로 용납하기 어렵다. 세부 전공을 열심히 하고 있다 해도 자신이 사상의 세계, 학문의 세계라는 더 넓은 영역에서는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공부의 범위는 ‘백과전서’이되 각각의 영역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알아야 한다는, 당대에는 도저히 성취하기 어려운 목표를 세우게 되고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상처 받고, 결국에는 이도 저도 아닌 뜨내기가 되기 십상이다. 내가 그러하다.

향수의 근원이 된 책들
‘사상 전집’ 이후에는 총서를 의식한 독서가 전혀 없었고 어떤 책이 좋아서 읽은 기억은 없다. 늘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고, 읽고 나니 그것이 어떤 총서의 한 권이었을 뿐이다. 홍성신서 시리즈로 나왔던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은 여러 차례 읽었고, 다렌돌프의 ‘산업사회의 계급과 계급갈등’도 좋은 책이었다. 이데아 총서 중의 하나였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은 그냥 주욱 읽었다가, 아주 나중에는 열심히 읽었고, 지금은 벤야민에 대한 내 향수의 근거지가 된 책이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도 읽고 나니 모더니티 총서의 한 권이었고, 그것이 같은 시리즈 안에 들어있는 야우스의 ‘미적 현대와 그 이후’와는 어떻게 엮이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코젤렉은 자주 참조해서 보던 ‘역사적 근본 개념(Geschichtliche Grundbegriffe)’ 사전의 편집자라 읽었고, 야우스는 오래 전에 읽었던 ‘도전으로서의 문학사’의 기억에 따라 읽은 것이다.
학문 세계의 입문자에게는 어떤 총서를 집어드느냐가 중요한 계기일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총서를 읽어야 할 사람들은 이미 학문세계에서 한 가닥 한다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테면 근대 철학 전공자라면 자신의 좁은 영역에서 벗어나 모더니티 총서를 읽어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게 해야만 이른바 다학제적인 교류가 가능해질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해서 크게 비난할 일은 아닐 것이다. 안 읽어도 먹고 살 수 있고, 학문적 업적을 쌓는 데 지장 없는데 돈들이고 시간 들여 고생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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