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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졌다”…국제사회 연대 강조
“미국이 졌다”…국제사회 연대 강조
  • 김유석 통신원
  • 승인 2003.04.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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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엔의 위상과 역할 고민

미영 동맹군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많은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국제 사회, 특히 유엔의 위상과 본질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사실 유엔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회의는 이미 미국이 유엔의 전쟁반대의견에 맞서 제기한 바 있다. 미국은 유엔이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창설된 이후 단 한 차례도 국제분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적이 없으며, 이제 새로운 시대와 국제 질서에 걸맞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 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지식인들의 유엔에 대한 고민은 미국과는 정 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이번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유엔의 창설 이념을 진지하게 재검토하는 속에서 그 위상과 의미를 공고하게 하는 쪽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최근에 발행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4월호에서, 이 잡지의 편집장이자 국제정치학자인 이그나치오 라모네는 유엔 헌장의 의미를 되새기며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을 비판했다. 그는 ‘불법적인 침략’이란 제하의 기고문에서 유엔 헌장 전문을 인용하면서 유엔헌장 전문의 이념이야말로 지구상의 모든 국가와 민족에게 공통된 법이라고 보았다.

문제는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침략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이 다름아닌 유엔의 상임이사국인 미국과 영국이라는 것. 더욱이 이 두 나라가 소위 민주주의가 가장 성숙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제 질서는 정치적 가치에 따라 극심하게 흔들리고 국가들은 분열됐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반전을 외칠 때, 그들은 그저 순진하게 폭력에 반대하고 평화를 호소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에 대해 그에 어울리는 강력한 윤리적인 힘과 단호한 인권 존중의 모습, 그리고 투철한 법 준수의 의지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이 안 된다면, 최소한 정치적 도덕성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말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라모네는 미국의 그런 태도에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충고한 내용, 즉 “군주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념과 동정심, 인간성과 종교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전례 없는 외교적 재앙”
그는 이러한 국제 사회의 분열을 “전례 없는 외교적 재앙”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를 계기로 미국이 더 이상 국제 사회의 여론을 하나로 모을 능력을 상실했다고 지적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미국은 이 전쟁에서 법률적으로도 패소했다고 라모네는 말한다. 유엔은 이라크에서 미국에 위협을 줄만한 어떠한 요소도 없다고 평가했으며, 미국 역시 단 한 번도 이라크와 테러집단과의 연계성을 국제 사회에서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모네는 미국이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이번 전쟁을 통해 미국은 독재자 후세인을 몰아내고 이라크에 민주정부를 세우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일방적인 무력의 호소는 국제법상으로 어떤 승인도 받을 수 없다. 무력을 사용해서 다른 나라에 민주주의를 세운다는 명분은 어떤 식으로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스펙트럼도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제 사회의 결속과 유엔의 제자리 찾기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권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몇몇 나라의 주도가 아닌 국제 사회의 연대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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