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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반패권 평화론 선택의 기로…윤리적 우월성이 평화운동 세계화의 동력
패권-반패권 평화론 선택의 기로…윤리적 우월성이 평화운동 세계화의 동력
  • 이대훈 평화학
  • 승인 2003.04.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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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시론 : 이라크전 이후의 평화의 지평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서 우리는 두가지 커다란 변화를 읽을 수 있다. 한편에서는 패권국가의 불법적인 대외침략이 사실상 승인되었고, 이러한 전쟁원리가 “끝없는 전쟁”으로, “선제공격의 보편화”로 적용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반면 다른 편에서는 역사상 초유의 범지구적인 반전평화운동이 지속성과 상호연계성 대중성의 특성을 강하게 보이며, 동시에 미국에 대한 반패권의 기치를 분명히 하는 ‘저항운동의 세계화’가 평화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다. 근대 국제정치의 두 축을 전쟁과 평화라고 할 때 21세기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 앞에서 미국의 미국만을 위한 단일패권체제와 세계화되는 民 저항운동에서 우리는 전쟁과 평화의 쌍곡선을 다시한번 목격한다.

따지고 보면 근대의 ‘평화’관이 꼭 패권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가 근대에 들어와 쓰는 ‘평화’라는 사상은 일본인들이 19세기 말 ‘국가간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뜻의 ‘peace’를 ‘평화’로 번역해 사용하면서부터 수입됐다. 평화(Peace)의 어원은 라틴어 ‘Pax’에서 찾는데 이 말은 이미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힘의 정치, 패권에 의한 질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로마인들의 정착지를 통해 군사력에 의해 강제된 패권적 질서를 지칭했던 로마시대의 Pax로서의 ‘평화’, 그리고 현재에도 제국의 평화가 정복과 힘의 질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평화의 문제를 간단치 않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바그다드가 미군에 함락되던 지난 9일 ‘팍스’로서의 ‘평화’의 이중성은 한 미군 병사에 사담 후세인의 동상에 성조기를 덮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확인됐다. 미국 병사와 주류 언론의 눈에는 이 성조기야말로 ‘해방’이며 ‘자유’인 동시에 그들이 이해하는 질서와 이익이 보장되는 평화의 상징인 것이다. 이라크를 미국식 어법으로 “아이랙”이라고 부르며 이슬람사회에 대한 무지를 과시해온 미군은 이제 중동에서 그 성조기와 함께 점령군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며 그에 따라 중동지역에서 지속적인 불안을 야기할 것이지만, 세계 최대의 석유자원을 장악한 이상 이러한 불안과 저항은 제국의 평화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미국의 평화 팍스 아메리카나의 구현인 것이다.

파병논쟁에 나타난 정부의 패권안정론
국제정치를 이해하는데 미국보다도 더 미국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한국의 안보담당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제국의 평화론은 반복된다. 최근 파병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반전평화운동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행동적인 저항뿐만 아니라 ‘국제법과 헌법, 명분과 양심 모든 면에서 정당성이 없는 파병’이라는 논리적 치밀성을 갖춘 주장에 설득력 있는 반론을 제기해야 하는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반론은 이라크 침공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을 우회한 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국익론을 제기하는 것이 요점이었다.

‘국익’에는 정석이 없으며 구체적인 항목을 제시하기 전에는 항상 애매한 주장이다. 집단에 따라 해석과 설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애매한 국익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던 안보담당자들이 국제정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 ‘골목대장론’을 통해서였다. 파병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대통령 국방보좌관은 “골목이 조용해지려면 강한 골목대장이 질서를 유지해 줘야 한다”라고 하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했다. 한국식 패권안정론의 해석이었다.

여기서 ‘골목이 조용하다’는 비유법은 한국의 패권안정론자들이 생각하는 평화관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는 일종의 ‘골목’이며 여기에 골목대장이 있고 그가 지켜주는 질서가 있으며 그 질서는 ‘조용한 골목’이라는 결과를 낳는 것으로 상상된다. 국제정치 및 안보전문가들의 사고와 언어가 대부분 남성적 가치와 언어에 기초해 있다는 비판을 이 골목대장론에 대입하고 싶은 유혹을 잠시 접어 둔다고 하자. 이미 골목대장론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실토하고 있다. 중국와 일본 및 러시아가 존재하는 동북아시아를 ‘골목’으로 비유하는 것은 상상력의 한계라기 보다는, 중심과 주변, 광장과 뒷골목 등의 관계를 동북아시아에 대입하는 한국 정치 행위자들이 스스로 어디에 자리매김하는지를 그대로 시사한다. 광장은 다른 곳에, 이곳은 골목인 것이다. 이 후미진 곳에서 ‘골목대장’은 골목을 휘젓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유지해 주는’ 위치로 설정된다. 은총을 내려주는 자와 은총을 받는 자가 수직적으로 묘사돼 있다. 여기서 이러한 은총에는 의리로 화답해야 한다.

이런 비유법에는 생략된 것에 오히려 묘미가 있다. 예를 들어 골목대장론에는 대장이 있으면 당연히 따라다녀야 할 부하들과 하수인들의 존재가 편리하게 생략된다. 골목의 패거리들에게 갈취당하는 사람들의 존재 또한 적절히 생략된다. 골목대장이 주민투표로 선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떤 것이 조용한 상태인지 골목의 주민들에게 물어보는 일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때가 되면 골목대장이 바뀌거나 아예 주민들에 의해 쫓겨난다는 상식도 편리하게 생략된다.

한국의 안보책임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러한 골목대장론은 미국 패권주의를 지탱하는 패권안정론의 식민지적 수용이다. 한반도에서의 미군의 역할을 지역균형자로 설명하는 것과 같은 궤에 있다. 사실 초강국 미국의 시각에서 미국의 국익을 위해 미국의 대외정책을 정당화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패권안정론은 골목대장론과 같은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 패권안정론, 지역균형자론, 골목대장론을 모두 하나로 관통하는 핵심 논리는 ‘패권으로부터의 은총’이다. 패권국가의 역할로 여러 가지 영역이 안정되면서 그 패권체제에 속한 복속국가의 이익이 증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익은 베풀어진 것, 즉 ‘은총’이며 여기에 대해 복속국가는 ‘은혜’를 갚아야할 의무, 그 남성적 표현으로서 우리가 자주 듣는 “동맹국에 대한 의리”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대장-은총/부하-의리-->질서, 이것이 골목대장론에 담겨 있는 평화사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예방전쟁과 제국의 평화론
냉전이 끝난 이후 한때 서구의 평화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탈냉전시기 평화문제의 초점이 국가간의 대규모전쟁이 전쟁예방 조건에서 벗어나 개인과 사회수준에서 갈등과 폭력을 예방하고 조절하는 면으로 변화했다는 기대 섞인 판단이 있었다. 발칸반도와 아프리카 등지의 내전과 종족분쟁을 예로 들면서 이러한 지역분쟁, 국내적 분쟁의 예방에 국제기구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평화연구, 평화운동의 중심과제를 전쟁과 패권 등 국제정치적 차원보다 갈등/분쟁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분쟁해소절차 등 다양한 갈등에 대한 계몽적 접근을 주요한 방법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이후 지속될 “예방전쟁”은 이러한 예측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이제 미국의 예방전쟁을 거론하지 않고 평화를 논하기가 불가능하게 됐다. 21세기 유일제국 미국의 전쟁전략이 동시다발 전쟁 구사, 핵무기 사용 불사, 국제법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무기체계 구사, 국제기구의 분쟁예방조치의 무력화, 중국의 도전을 봉쇄하기 위한 포위전략과 예방행동을 전제로 하는, 전례없는 가공할 폭력노선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제2의 미국혁명”, 군산복합체의 “사실상의 쿠데타”라고 일컫는 미국의 이러한 변화는 제국의 평화론에 대응하지 않는 평화론을 무의미한 것으로까지 만들고 있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을 만든다”라고 말한 챨스 틸리는 국가권력과 전쟁의 관계를 간파하고 있었다. 같은 원리로 이제 미국은 완전한 국가, 즉 세계 단일권력을 목표로 하는 전쟁체제를 갖췄다. 이런 상황에서 한가지 손쉬운 평화론은 골목대장론과 같은 식민지적 발상의 평화론이다. 은총에 의존하는 이러한 식민사상의 전조는 이미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이라는 일본판 패권안정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반도의 식민지 지식인들이 대동아공영권을 신봉하면서 수용한 내선일체론 역시 21세기 한국의 골목대장론의 선조라고도 할 수 있다.

식민지시대 내선일체의 압박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처럼 현재 한국에서 선택하기 어려운 평화론은 패권을 거부하는 평화론일 것이다. 패권의 은총 속에 가려진 사람들, 움츠린 집단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거부하는 평화론, 즉 반패권의 평화주의는 선택하기도 구현하기도 매우 힘든 어려운 선택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어려움을 상쇄하는 분명한 윤리적 우월성이 존재한다. 폭력에 대한 거부, 전쟁을 거부하는 다수의 연대, 남성화된 국제정치의 해체, 다양성과 관용의 원리, 전쟁자원의 복리적 전환, 관용과 협력의 원리 등 이 어려운 선택이 자명하게 차지하는 윤리적 우월성은 매우 높다. 이 윤리적 우월성이 현재 반전평화운동을 세계화하고 미국의 또 다른 패권인 이념적 지도력을 사실상 붕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침공 이후 평화론의 지평은 크게 달라졌다. 이제 평화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패권주의적 평화로서 로마제국 이래 ‘팍스’의 전통을 따를 것인지, 범세계적인 여론과 민주주의의 정신에 따라 반패권적인 완전히 새로운 평화론을 수립할 것인지의 갈등 속에 놓이게 됐다. 팍스 로마나의 이중성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대신 분명한 선택이 요구되고 있다.

이대훈
평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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